<101>
[신성황녀가 당신의 마왕명을 외칩니다.]
[이름 없는 마왕 > 마왕 남태수.]
[마왕 남태수의 이름이 마계 전역에 울려 퍼집니다.]
성진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는 관심 없다는 듯이 꺼 버렸다.
오히려 걱정한 것은 티타니아였다.
-저래도 되는 건가요? 남의 이름을 가져다 쓰다니…….
“괜찮다. 어차피 카르마는 이름이 아니라 영혼에 깃드는 거니까. 동명이인들이 서로 오인하지 않는 것과 같지.”
성진이 마왕명을 남태수로 정했어도 마왕 남태수와 그냥 남태수는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카르마를 죄다 가명으로만 만들어놓으면 사칭에 취약해지긴 하겠지만, 마왕 남태수를 사칭할 간 큰 놈은 없으리라.
저걸 사칭했다간 신성황녀한테 마계 끝까지 쫓기게 될 테니까.
“또한 남태수가 신성황녀의 영토에 발을 들일 일도 없지. 다나한테 맡긴 물건 중에 저쪽 영토에 있는 물건은 없었으니까.”
-확실히 신성황녀가 선생님의 정체를 오인하고 있다면 추적을 따돌리기 쉽긴 하겠네요.
남태수의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면 신성황녀의 입장에선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기 힘들었다.
그 말은 성진이 게릴라전을 펼치기 더 쉬워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일 신성황녀가 남태수를 잡겠다고 다른 마왕의 영토를 침범하기라도 하면 더 좋고.”
마왕들이 자기들끼리 싸움이라도 난다면 이득을 보는 건 성진이었다.
-그러다 남태수가 당한다면요?
“어디서 객사하지 않게 잘 키워뒀으니 괜찮다.”
* * *
한편 그 시각, 남태수는 다나와 함께 화산지대에 와 있었다.
“저기요? 성진 씨? 이러시는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니에요??”
남태수는 플레이어와 NPC를 막론하고 마계 전역에 퍼진 공지를 보곤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신성황녀가 죽자고 자신을 노릴 거라는 뜻이 아닌가?
“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중립지대에서 사고를 친 거?
다나가 그랬다.
간 적도 없는 다르크 지방?
성진이 그랬다.
남태수는 억울했다.
그의 인생이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말이다.
메르키데스는 절망하는 남태수를 내버려 두고 다나에게 말했다.
-피닉스의 둥지는 화산 분화구에 있습니다. 화산지대에서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으니 빨리 움직이시죠?
“너도 은근히 적응이 빠르네.”
-처음 죽어보는 것도 아닌데요, 뭐. 하하하. 이런 미녀분께서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거침없이 쑤셔주었으니 저는 만족합니다.
“아, 응, 그래…….”
화산지대에 도착한 다나와 남태수는 바이크에서 내려 도보로 움직였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마력을 뿜어대며 이동하면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받게 될 게 뻔했다.
때문에 걸어서 이동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동속도가 크게 느려지진 않았다.
100레벨이 넘은 플레이어라면 단기적으로는 차량보다 빨랐으니까.
오히려 포장된 도로가 아닌, 이런 산악지대에선 중장기적으로 봐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거 완전 불지옥이네요. 태수 아재는 괜찮아요?”
“화속성 저항 템으로 세팅해놔서 열기는 괜찮아. 근데 산소가 부족한 건 어떻게 안 되겠는데? 오래 있지는 못하겠어.”
아래에서는 용암이 온천수처럼 솟아나고 있고, 저 위에서는 화산재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화산지대.
마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이곳은 유황불로 가득한 지옥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열풍 때문에 사우나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구만.”
“그러니 빨리 피닉스만 잡고 여길 뜨죠. 지금은 잠들어있는 것 같지만 ‘저것’이 깨어나면 골치 아파질 것 같으니.”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화산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화산을 지고 있는 산맥 그 자체를.
“……저게 한번 뒹굴면 지도가 바뀌겠지?”
카르마를 느낄 수 있는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화산의 카르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화산에게서 느껴지는 카르마는 맥동하는 대자연의 카르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의 것이었다.
-마왕 염제.
이 땅을 지배하는 삼황오제 중 하나.
그 정체는 화산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초거대생물이었다.
-염제는 따로 부하를 부리지 않으니 이곳의 몬스터만 조심해서 이동하시면 됩니다.
신성황녀가 항공모함만한 괴물이라면, 염제는 아예 살아 있는 도시나 다름없었다.
저 초거대 생물은 작은 것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다.
염제의 몸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이 권속으로 잡히긴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염제가 이동하면서 흘리고 다니는 불길에 수많은 화속성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그것으로 화산지대라는 영토가 만들어졌을 뿐.
염제의 불길을 버틸 수 없는 마족들은 모두 이 땅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 땅에 남은 것은 염제와 그 불길로 강화된 화속성 몬스터뿐.
“다나, 저기 좀 봐봐. 소라게같이 생긴 놈이 우릴 바라보고 있어.”
“덤벼들기 전에 빨리 지나가죠. 이놈들 딴에는 제집에 들어온 침입자를 막으려는 것뿐이지만, 저희들에겐 그것조차 치명적일 거예요.”
이 열기 속에서 싸우는 건 둘째 치고, 소란이 일면 사방의 몬스터들이 모두 깨어나 날뛰기 시작하리라.
화산지대를 횡단하며 여기 있는 모든 몬스터를 잡으려는 게 아닌 이상 이곳에서는 조용히 움직이는 게 나았다.
“저건 뭐야? 상어? 용암인데 상어?”
“적룡의 대둥지에서 본 그것들이랑 닮았네요.”
“천사의 피로 변이된 그놈들? 그러네. 변이되기 전에는 원래 용암상어였구나 그거?”
남태수는 적룡들이 출출할 때마다 상어 하나씩 집어먹던 모습을 떠올리며 놈들의 정보를 확인했다.
“……변이하기 전에도 144레벨이라고? 그럼 어스름에 있던 상어들은 도대체 몇 레벨이었던 거야?”
144레벨의 몬스터와 144레벨의 플레이어가 싸우면 당연히 플레이어가 이긴다.
플레이어는 스킬에 장비 효과까지 다 받고 있을 테니까.
이는 반대로 말해 144레벨 몬스터라면 맨몸의 144레벨 플레이어와 맞먹는다는 뜻.
저거 하나가 바깥에서 플레이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이들의 태반을 찢어놓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기 상어 뚜루룻뚜루…….”
“돌았어요 아재?”
“드래곤 피어를 쏘고 있으니까 우리가 선공하지 않는 이상 괜찮아. 봐봐,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어도 경계만 하잖아.”
“어휴…….”
한숨 속에서 계속 이동한 두 사람은 곧 염제의 꼬리에 도달했다.
긴 목과 꼬리를 가진 염제는 브라키오사우루스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날지 않고 등 위로 올라가려면 머리나 꼬리 중 하나를 타야 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들은 꼬리를 택했다.
“마왕이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저라면 제 머리를 밟고 다니는 놈들을 용서치 않을 거예요.”
“아니 넌 꼬리도 용서 안 하잖아.”
남태수는 이미 다나가 귀와 꼬리를 조절하지 못하던 시기에 실수로 밟았다가 말 그대로 밟힌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마치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있다 팔꿈치가 찌릿한 느낌이었다고.
‘꼬리는 척추랑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 당연한가? 잠깐, 그럼 얘는 변신할 때 몸속의 뼈도 변하나?’
생각해보니 궁금했지만 물어봤다간 사룡왕 다됐다는 소리만 들을 게 뻔하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 무르무르에게 물어봤다.
-그거라면 제가 변신 단계별로 붙잡아서 해부해본 적이 있지요. 결론만 말하자면 완전변신 전까진 신체변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귀나 꼬리, 발톱 등만 나타나 있는 경우에는 전부 그냥 마력 덩어리입니다. 완전변신 후에야 신체의 일부로 정착하지요.
‘그럼 다나는 그때 동물 귀랑 인간 귀를 동시에 가진 상태였다는 거네?’
-포병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인재라는 뜻이지요. 쏘기 전에 막을 귀가 4개나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무르무르는 기계몸을 얻은 이후로 어쩐지 거함거포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거함거포주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현시점에서 남태수의 신화급 카르마를 활용할 방법이라곤 결국 타이탄 코어에 다 쏟아붓는 것뿐이었기 때문.
펄럭!
산을 오르던 그들은 갑작스럽게 밝아오는 하늘에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선 화산재가 갈라지며 피닉스가 내려오고 있었다.
다나는 황급히 손가락을 들어 쉿 표시를 하고는 시스템의 귓속말을 통해 말을 전달했다.
[구름 위로 날고 있었나 본데요. 화산재에 마력이 섞여 있어서 이만큼 다가올 때까지 전혀 몰랐어요.]
피닉스가 이동하는 궤적을 따라 불길이 잔상처럼 일렁였다.
남태수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저런 생물이 다른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 위에 적힌 ID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마계 최정예 몬스터.
잡으라고 있는 게 아닌 마왕들을 제외하면, 용병 퀘스트로 등장하는 최고 레벨의 몬스터가 그곳에 있었다.
[200레벨이면 150레벨 플레이여 몇 명이 모여서 잡으라고 넣어둔 거야?]
세력전이 메인인 마계에선 대규모 단일 세력 공격대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하물며 피닉스의 서식지는 염제의 등 위.
말이 토벌몹이지 저것도 잡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세계정부의 사도들조차 잡아본 적 없는 저 적을 지금 그들은 둘이서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근데 부리에 저건 뭐야?]
[아까 그 용암상어 같은데요? 쟤는 여기서도 먹이네.]
[저거 진짜 우리 둘이서 덤벼도 되는 거냐?]
144레벨짜리 몬스터를 그냥 왜가리가 생선 잡아먹듯 물고 다니는 놈.
마계에 올라온 뒤로는 기껏해야 이동 중 몬스터 퇴치 좀 한 게 전부인 두 사람은 각각 104레벨, 105레벨이었다.
원래라면 레벨 차이에 따른 격차로 피닉스 사냥은커녕 화산지대에 들어오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성좌들이 내려준 레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성진 아저씨가 레벨이 낮다고 약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었나요?]
[그런 적은 없지. 그 양반은 레벨이랑 별개로 강하니까.]
[아저씨가 배운 마법도, 제가 배운 검술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이젠 다나와 남태수의 전투력도 레벨로는 따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두 사람의 전투력은 정확히 몇 레벨 치인가?
이는 본인들도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성진뿐이리라.
[성진 아저씨가 시켰을 땐, 할 수 있는 일이라 시키신 거예요.]
주성진이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
다나는 자신의 실력 대신 자길 믿는 성진을 믿었다.
‘얘도 은근히 주성진 팬클럽 느낌이…….’
남태수는 그간 NPC들을 보며 느꼈던 냄새를 다나에게서도 느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화산 정상.
발아래로 펼쳐진 분화구에 절대반지라도 던져야 할 것 같은 그곳에서 두 사람은 피닉스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화산의 열기를 버틸 수 있다곤 해도 용암 속으로 숨어든 적을 쫓을 방법은 없었다.
하늘 높이 날아서 도망쳐도 마찬가지.
잡으려면 피닉스가 둥지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지금뿐.
“먼저 갑니다.”
다나는 피닉스가 그들 앞을 스쳐 지나간 순간, 그 뒤를 따라 분화구 안으로 뛰어들었다.
남태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무르무르를 타이탄 코어로 소환했다.
“바로 정지장 발생기부터 만들어줘.”
무르무르에게 작업을 맡긴 뒤에는 자기도 마법 시전을 준비한다.
그간 쓸 수 있는 마법의 숫자를 꽤 많이 늘린 남태수였으나, 여전히 시전 시간은 느렸다.
피유우우우웅!
그러는 사이, 분화구 아래로 사라졌던 다나가 피닉스의 위에 올라타 하늘 위로 솟구쳤다.
털썩!
“상어어엇, 상어상어……!”
날아오른 피닉스는 물고 있던 용암상어를 떨어뜨렸다.
“이젠 NPC라도 아파하는 걸 보면 안쓰럽네.”
남태수는 내장을 질질 흘리며 애처롭게 우는 용암상어를 보다가, 사신의 대낫으로 그것을 편하게 해주었다.
죽은 상어는 100레벨 패시브 효과로 좀비 상어가 되어 되살아났다.
되살아난 좀비 상어는 고맙다는 듯이 남태수의 다리에 볼을 비볐다.
“끼잉, 낑!”
“……좀 귀여울지도?”
그러는 사이 피닉스의 날갯짓에 불길을 휘감은 토네이도가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좋아, 가자 상어야! 샤크네이도다!”
“상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