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신성존재들은 카르마에 영향을 주지 않고 제힘을 투사하기 위해 사도를 두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침략을 준비하는 성좌들이 그랬고, 성진 또한 여덟 왕의 사도이기도 했다.
힘을 미끼로 귀찮은 일과 부정적인 카르마를 사도에게 모두 떠넘기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방식이었다.
트럭에 치인 이차원의 영혼을 데려와 생명수당 없이 일을 맡길 때만 유용한 게 아니었다.
사도는 신성존재가 일방적으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부하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사도로 들일 수는 없었다.
사도의 패배는 그 배후에 있는 신성존재의 패배이기도 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괜찮지만 지고 다녀선 안 된다.
때문에 사도는 초월을 이룬 강자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놈이 사는 동네 안에선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 했다.
성좌들이 영혼을 탐내면서도 벌떼 같이 몰려드는 대신 사도를 구한 놈들만 달라붙는 것도 이 때문.
사도 후보란 아직 검증 중인 강자라는 뜻으로, 정식 사도에 비해 꽤 많은 수가 있었다.
엔리코 마짜렐라 또한 그러한 사도 후보 중 하나였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그는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창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마족을 바라보았다.
“그 간악한 사령술사 새끼를 죽여라!”
중립지대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사령술사를 잡아오라는 퀘스트.
이 스테이지에서 용병으로 지내다보면 이런 식의 용병 퀘스트를 받는 일이 흔했다.
“거 진정 좀 하시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사령술사란 말이다! 사령술사!”
마족들은 사령술사라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질색했다.
마계에서는 죽은 마족의 시체가 슬라임에 의해 분해되어 마력으로 환원되어야 생사의 순환이 이어진다.
이러한 생태계에서 시체를 부리는 사령술사들은 세상을 좀먹는 벌레들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사령술사를 기피했지만, 마계에서는 아예 순수한 ‘적’으로 규정할 정도.
타락한 자도, 죄를 범한 자도 아니고 그냥 세계의 적 그 자체로 여겼다.
“같은 인간족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책임을 지고 놈을 잡겠다는 생각은 없는가?”
‘그런 거 없는데…….’
엔리코는 이 퀘스트를 할 생각이 없었다.
평범한 21세기 지구인인 그에게 플레이어를 죽이는 건 NPC를 죽이는 것과 달리, 엄연한 살인이었다.
보상이 아무리 좋아도 플레이어들끼리 싸우라는 하는 건 하기 싫었다.
‘게다가 100층 넘은 사령술사라면 남태수밖에 없잖아? 그 인간 엄청 강하다던데.’
싸워서 이기기도 힘들고, 이겨도 문제다.
하물며 잡아 죽이는 거라면 더더욱 꿈자리가 뒤숭숭해지리라.
아무리 남태수가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라도 엔리코는 사람을 죽이기 싫었다.
NPC는 어디까지나 게임 캐릭터 같은 존재였지만 플레이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 21세기의 상식이었으니까.
“죄송하지만 거절하겠…….”
퀘스트를 거부하려던 엔리코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 신의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Y)]
[퀘스트 완료 보상: 정식 사도 승급.]
[수락하라.]
[성공한다면 너를 사도로 삼을 것이라 약속하마.]
“……!”
그 내용을 확인한 순간 엔리코는 전율했다.
‘됐다!’
사도 후보는 많았지만 그중 사도가 된 것은 12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12명은 탑의 바깥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도 사도가 될 수 있어……!’
성좌에게 인정받기 위한 끝없는 고난.
그들은 단순히 탑을 잘 오르는 플레이어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엔리코는 성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온갖 일들을 벌여왔고, 덕분에 후보가 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진 못하고 있었다.
“콜.”
사람을 죽이긴 싫다?
‘사도가 될 수 있다면 말이 다르지.’
이건 안 하면 바보다.
어차피 퀘스트의 목표는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아닌가?
오히려 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며, 성좌가 직접 나서는 걸로 보아 자신이 거부해도 다른 플레이어에게 똑같은 제안이 돌아갈 게 뻔했다.
“사령술사는 알겠는데 살인을 저지른 건 같이 다니던 검사였다며? 그 작자도 잡아야 하나?”
“그쪽은 따로 보상을 하겠다.”
그렇다면 더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제가 꼭 증명하겠습니다.’
엔리코는 저 하늘에서 보고 있을 성좌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불과 광채시여!’
* * *
“부대와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또 졌단 말이냐? 게다가 연락두절이라니. 아주 전멸을 했다는 뜻이 아니더냐!”
신성황녀는 병력을 보내는 족족 성진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초월자라도 머릿수에는 못 당하는 법인데?’
아무리 강해도 쉬지 않고 영원히 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롭게 나타난 마왕은 며칠째 이어지는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약한 다수를 상대하는데 특화된 마왕인가? 그래, 그런 거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렇다면 군단을 일으키는데 특화된 자신과는 상성이 안 맞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놈은 영토도, 권속도 없는 신규 마왕. 언제까지고 그렇게 싸울 수는 없을 겁니다.”
마왕에게 영토와 권속은 단순히 땅과 병사가 아니었다.
이는 마계에 대한 지분 그 자체.
마왕은 이러한 지분이 많을수록 카르마에 보정을 받는다.
즉, 강해서 큰 영토를 가지는 게 아니라, 큰 영토를 가지고 그것을 유지해서 강해진다는 뜻.
“놈이 아무리 강해봐야 본녀는 신성황녀다. 수백 년간 마계를 지배해온 존재란 말이다.”
수백 년간 삼황오제라는 이름으로 마계를 지배해온 신성황녀는 마왕의 카르마를 신화급의 영역에 올려놓았다.
카르마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넘어서기 위해선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백 년의 시간은 그 자체로 강대한 힘을 상징했으며, 다른 마왕들과의 격차를 의미했다.
“나의 칼날들 중 하나를 내보내겠다.”
“기사들을 말입니까?”
“아무리 신생마왕이라고 해도 마왕은 마왕. 본녀의 칼날들이라면 마왕살해의 카르마를 얻고 싶은 것은 모두 똑같겠지.”
신성황녀가 물량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그녀 또한 강력한 엘리트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성황녀의 군단을 이끌고 지친 초월자를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
손쉽게 강력한 카르마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인 만큼 신성황녀의 기사들은 모두들 자신이 나가길 청했다.
그녀는 어미 새를 보며 먹이를 청하는 아기새처럼 아우성치는 자신의 기사들을 보며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녀가 누구 하나를 지목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시합을 열도록 하겠다.”
“시합 말씀이십니까?”
“가장 먼저 놈의 목을 가져오는 자가 승리하는 죽음의 경주다. 승자에게는 추가로 본녀와 자식을 만들 기회를 주겠다.”
여왕개미의 말에 수개미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가라! 가서 본녀를 위해 놈의 목을 따 오너라!”
굴 안을 가득 뒤덮은 신성황녀의 기사들은 그녀의 손짓을 따라 바깥으로 몰려나갔다.
전장에 나서기만 하면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신성황녀의 기사들.
그들이 마계의 하늘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본녀의 칼날들이 나섰으니 지친 마왕의 목을 따오는 건 금방이겠지.”
* * *
“끝이 없군.”
성진은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너무도 많다.
성진은 마족의 시체에서 적당히 주워온 검에 환골탈태로 얻은 마력을 실었다.
초대형 검기.
빛의 기둥이 산의 능선을 따라 적들을 훑었다.
압도적인 범위를 휩쓸어 버린 공격이었으나 그것에 당한 것은 수십 정도.
신성황녀의 권속들은 마왕의 부하답게 광범위하게 뿌린 공격 정도는 피해내며 성진에게 달려들었다.
성진은 다시금 검기를 휘둘렀다.
“티타니아.”
-네 선생님.
그러나 이번에는 검의 궤적이 그려지기 직전, 티타니아의 마법이 대지를 얼렸다.
대지에 발붙인 마족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이어지는 검강을 피하지 못했다.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한 수에 갈려나갔지만, 적들은 순식간에 빈 공간을 채우며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블랙 스웜.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군단의 힘은 초월자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슬슬 물러나지. 빙제의 영역으로 빠져서 마력을 회복하고 온다.”
선전포고 이후 며칠간 계속 이어진 전투로 성진은 마력이 바닥났다.
죽이고 또 죽여도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적이 쏟아졌다.
마력이 회복되는 속도보다 소모되는 속도가 더 빠르니 아무리 마력이 많아도 한계가 찾아온 것.
환골탈태를 통해 대량의 마력을 획득한 성진이었지만, 아직 초월 단계가 낮아 제대로 된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어스름에서는 쌓여 있던 천사의 피를 활용해 검강도 쭉쭉 뽑아냈지만 그곳을 떠난 지금은 환골탈태로 육체에 담아온 분량만큼만 써먹을 수 있었다.
“1% 효율이라는 페널티가 귀찮긴 하군.”
-3단계 초월자인 신성황녀는 초월효과를 100%까지 받고 있을 테니 굳이 싸워줄 필요는 없지요.
초월효과는 단계가 올라갈수록 효율 자체가 상승해, 4단계부터는 아예 실제 힘보다 더 강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러한 격차 때문에 초월자들 간의 전투에서 단계의 차이를 뒤엎는 일은 거의 없다.
신성황녀가 저렇게 자신감 넘치게 군단을 보내오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
그러나 단순한 소모전으로는 지켜야 할 영토 없이 자유롭게 도망 다니는 성진을 잡을 수 없었다.
“이건…….”
다른 마왕의 영토로 물러나던 성진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발을 멈췄다.
“마계기사들인가.”
스스로 마왕이 되어 마계일통을 노리는 대신, 다른 마왕의 아래로 들어가 귀족의 지위를 받은 이들.
-선생님께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입니다.
“별빛 분지에서의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마계를 스테이지에 재현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변화가 있었나 본데.”
정예에 해당하는 이들을 벌써부터 국경까지 보내올 거라고는 성진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따돌리긴 힘들 것 같군.”
성진은 전투를 준비했다.
기사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가장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성진이라도 마냥 방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찾았다. 이름 없는 마왕.”
인간형, 그러나 사마귀를 닮은 칼날 같은 팔이 4개나 닮은 마족이 기사들을 대표해서 나섰다.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한 모양이군. 마왕을 쓰러뜨린 명예는 나 프린스 오브 다르크가 가져가겠다!”
공작급 마족.
프린스 오브 다르크는 성진과 같은 1단계 초월자였다.
‘마왕이 될 수도 있는 능력으로 귀족이 되었군.’
저놈이라면 성진도 간단히 정리할 순 없었다.
문제는 저놈의 말대로라면 시간을 끌었다간 다른 놈들도 몰려오리라는 점.
‘남은 마력량으로 속전속결이 가능한가?’
저놈들도 바보가 아니니 이쪽이 속전속결을 바라고 무리하면 일부러 시간을 끌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진짜 성진이라도 금방 끝내기 힘들어진다.
-선생님께서 쓰러뜨린 마족들이 마력으로 환원되기만 하면 소모분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텐데요.
성진은 지난 며칠간 신성황녀의 군단과 쉬지 않고 싸우며 마력을 소모했다.
마계에선 이만한 시체가 있다면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마력을 수급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의 여파로 근처의 슬라임이 죄다 쓸려나간 탓에 마력이 환원되는 속도가 느렸다.
“마계에서 마력이 부족한 날이 올 줄이야. 시체가 이렇게 널려 있는데 환원해줄 슬라임이 없다니.”
그 순간 차원의 벽을 넘어 어린 시절의 성진과 똑같이 생긴 슬라임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특이점! 오랜만인 거다!”
진마왕은 성진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성진도 그를 보며 인사했다.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