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신성황녀는 자신의 궁전에서 아크데몬의 눈을 통해 별빛 분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이 마법으로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영지를 통치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감지가 되지 않는구나.”
이 마법은 어디까지나 대상의 눈을 빌리는 것.
아크데몬이 보지 못한, 볼 수 없는 것은 신성황녀 또한 볼 수 없었다.
“새로운 마왕이라…….”
삼황오제가 마계를 나눠먹은 지금의 구도는 이미 수백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마왕들도 존재하긴 했으나 그들 외의 모든 마왕들을 합쳐도 삼황오제 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했다.
난세는 진작 끝났다.
젊은 마족들의 꿈은 이제 마왕이 되어 마계를 일통하는 것이 아니라, 삼황오제의 밑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인정받고 입신양명을 이루는 것이었다.
헌데 초월을 이루고도 마왕이 되려는 자가 나타나다니?
“안타깝게 됐어.”
다른 일로 만났다면 권속으로 들여 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자신의 권속을 죽이고, 선전포고를 날린 이상 신성황녀는 성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용납해서는 안 되었다.
군림하는 자.
그녀의 카르마는 모든 것을 발밑에 두어야만 빛나는 카르마였으니까.
신성황녀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놈을 찾아라. 그리고 대가를 치르게 해라.”
그녀의 명령에 어둠이 일렁였다.
수백만의 권속으로 이루어진 검은 파도가 마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계에서도 가장 많은 머릿수를 자랑하는 신성황녀의 군단.
이 땅에 그녀의 분노를 피해갈 수 있는 대상은 누구도 없었다.
그것은 상대가 초월자라 해도 마찬가지.
“놈을 찢어 죽여 내게 대든 놈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온 세상에 알리겠다.”
* * *
성진은 마왕이 되며 줄줄이 갱신되기 시작한 퀘스트 창을 껐다.
어차피 성진이 가이드가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아크데몬의 머리통을 뒤로하고 플레이어들을 돌아보았다.
“꺼져라. 너희들에게는 관심 없으니.”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통을 보며 언제든지 자신이 ‘다음’ 머리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져 있었다.
“가능하면 탑 밖으로 꺼지는 게 좋을 거다. 이제 이곳은 전장이 될 테니.”
마계일통을 위한 전쟁은 별빛 분지만이 아니라 마계 전역으로 확산될 것이다.
때문에 성진은 일부러 그들에게 경고만을 전하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말로 한다고 얌전히 탑을 나가진 않을 테지. 이렇게 해두면 플레이어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알아서 모일 거다.’
그리고 마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머릿수도 많은 플레이어 집단은 100층에서 넘어올 그의 부하들이었다.
일일이 잡으러 다니지 않아도 소문이 퍼지면 알아서 모일 터.
여기서는 이들이 마계 곳곳에 소문을 퍼뜨릴 수 있게 그냥 쫓아내기만 하는 편이 나았다.
애초에 이렇게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10층에서부터 남태수를 데리고 왔던 것이기도 하고.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
플레이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성진의 눈앞에서 도망쳤다.
그들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성진은 아크데몬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일개미들을 통솔하는 병정개미. 신성황녀의 군단 내에서 그리 높은 등급은 아닐 테지만 소모품으로 갖다 버려도 되는 것도 아니지.”
삼황오제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여덟 명 중 하나가 조금만 잘못해도 사달이 난다는 뜻.
아무리 균형이 오래 유지되었다고 해도 놈들은 마왕이었고, 마왕들은 언제나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와중에 신성황녀가 아무런 생각 없이 병력을 놀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신성황녀는 여기서 뭘 하려고 했던 거지?”
별빛 분지는 마왕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심사하고, 자격을 내려준다.
꼭 여기서 마왕으로 인정받아야만 마계일통이 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마족들에게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삼황오제가 이러한 사다리를 걷어차지 못한 것도 그 때문.
별빛 분지가 남아 있는 이상 언젠가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마족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걸 없애려 들었다간 다른 마왕들의 합공을 받을 터였다.
즉, 이곳은 마왕들에게 정치적 계륵.
그런 곳에 굳이 손을 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선전포고도 했겠다, 퀘스트도 깰 겸 신성황녀를 괴롭혀봐야겠군.”
-괜찮으신 건가요? 상대는 3단계 초월자일 텐데요.
“걱정 마라. 이 녀석에 한해서는 위험할 일 없을 테니.”
티타니아는 성진이 대뜸 마왕에게 선전포고를 날리는 것을 보고 걱정했다.
하지만 성진 또한 벌써부터 마왕들과 직접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승부를 볼 생각이 없으면서도 선전포고를 날린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삼황오제 중에서도 신성황녀였기 때문.
“놈은 제 영토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을 터.”
신성황녀는 작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본체를 이동할 수 없는 존재였다.
즉, 본인만 피해 게릴라전을 펼치면 일방적으로 괴롭힐 수 있다는 뜻.
“나는 아직 영토도 권속도 없는 상태. 신성황녀가 내게 전면전을 선포할 순 없을 테니 이 녀석이 상대라면 나는 리스크 없이 싸울 수 있다.”
-상대가 전력으로 나올 수 없다는 건가요?
“그래. 영토와 권속이 있는 마왕이라면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테지만,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물론 아무런 영토와 권속을 가지지 않은 마왕은 약하다.
때문에 성진과 같은 방식으로 시비를 거는 마왕이 나타나 봐야 보통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성진은 따로 마왕으로서의 힘을 쌓지 않아도 충분히 강력한 존재였고, 그가 날뛰기 시작하면 마왕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제압이 불가능했다.
“청소부 슬라임인가.”
-이게 바로 그 마계의 청소부라는 생물이군요. ‘평범한’ 청소부 슬라임을 보는 건 처음이네요.
어느새 시체 냄새를 맡은 청소부 슬라임이 아크데몬의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청소부 슬라임은 마계의 생물 중에서도 이례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마력이 가득 담긴 마계생물의 시체를 먹고, 그것을 순수한 마력으로 환원하여 배출한다.
이를 통해 마계에선 강자가 죽으면 또 다른 강자가 태어난다.
청소부 슬라임들은 섭취한 마력을 다시 배출하기 때문에 아무리 시체를 먹어도 강해지지 않는다.
청소부 슬라임은 언제나 묵묵히 제 일만을 수행할 뿐.
마력이 함유되어 있다 싶으면 일단 집어먹고 보는 마계에서도 이들을 노리는 마족은 없었다.
때문에 청소부 슬라임이 성좌에게 죽은 삼황오제의 시체를 삼켰을 때도 마족들은 그것을 막아서지 않았다.
대신 마족들은 슬라임이 곧 뱉어낼 마력을 기대하며 그곳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마계를 지배하던 마왕들을 전부 집어삼킨 슬라임은 그 힘을 배출하기 전에 초월을 이루어 버렸다지요.
진마왕.
삼황오제 모두의 기억과 힘을 계승한 키메라 슬라임.
성진은 진마왕의 안에서 신성황녀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굴에서 나오지 못하는 여왕개미 따윈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서울 것 없지.”
신성황녀가 말하는 ‘신성’이 꼭 인간이 생각하는 신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좌들이 저 지랄을 하는 것도 지들 딴에는 자신들의 신성을 추구하기 위함이었으니, 대체로 ‘나는 신성하다’ 떠들고 다니는 놈치고 멀쩡한 놈이 없었다.
그리고 성진의 장기는 바로 그런 놈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신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보통 선생님이 신성해져라 얍! 하고 망치를 두들기면 단번에 신성해졌죠.
“하지만 이번에는 망치 없이 해야겠지.”
-그렇다고 지팡이 따위를 만들려고 하시다니. 선생님께는 제가 있는데도.
“네 힘도 본격적으로 쓸 때가 아닌 건 마찬가지 아니냐.”
티타니아는 조그마한 모습으로 성진의 주위를 떠다니며 입술을 비죽였다.
-치사해요.
“뭐가?”
-저는 30층에 남겨두고선 어스름 수도회의 대수녀원장과 총대주교는 챙기셨잖아요.
“30층에서는 너만 문제없이 떼어낼 방법이 없었으니까.”
100층까지 올라오며 남태수도 사도가 되고, 산달폰의 관리자 권한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30층 시점에선 티타니아를 해방시켰다간 그 사실이 천상의 귀에 들어가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어차피 차원문을 만들 사람은 필요했다. 너는 다른 층에서도 정령술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그에 제격이기도 했고…….”
성진은 대답을 하다 말고 문득 입을 다물었다.
탑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한동안 못 봐서 잊고 있었는데, 티타니아의 성격이라면 이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다.”
-그리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티타니아 너만 믿고 있겠다.”
성진의 대답에 티타니아는 눈을 감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뿌듯해 보였기에 성진은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개미굴의 출입구들을 파악해다오. 우선 지상에서부터 신성황녀 공략에 나선다.”
신성황녀의 영토는 별빛 분지와 맞닿아 있었다.
선전포고를 했으니 곧 병력을 보내오리라.
“굴의 출입구 근처만 피하면 내가 마음대로 지상을 누벼도 저쪽에서는 대응하기 힘들겠지.”
성진으로서는 신성황녀가 직접 튀어나오는 것만 피하면 되는 일이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
성진은 육감으로 저 멀리서 밀려오는 마족들을 감지하고 감회가 새로워짐을 느꼈다.
그가 올 때마다 마계의 주민들은 항상 그를 반겨주었다.
그들은 항상 성진에게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기 위해 가진 것을 내놓았다.
보통 칼이나 창 따위의 날붙이였고, 손잡이가 아니라 날 쪽을 내밀긴 했지만.
“여기 친구들도 이렇게까지 나를 반겨주는데 나도 가만있을 순 없지.”
성진은 아크데몬이 가지고 있던 창을 주워들어 군단이 밀려오고 있는 방향을 향해 집어 던졌다.
피이잉!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창은 곧 능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곤,
쿠구구구구구!!!
산사태.
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흠!”
흐느적거리며 바닥을 기던 진마왕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다.
언젠가 조금 받아먹었던 특이점의 유전자로 구성한 어린 시절의 성진과 같은 모습.
“맛있는 냄새가 났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그를 운반하고 있던 루프레시아가 물었다.
“맛있는 냄새 말씀이십니까?”
“응! 맛대가리 없는 천사 말고! 특이점의 냄새!”
진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빵빵해진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드렸다.
저 멀리선 지금도 적룡장군이 신나서 천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끼얏호우!!! 죽어라 벌레 같은 놈들아!!! 으하하하하!]
사룡왕의 부탁으로 천사의 시체를 먹어 치우고 있던 진마왕은 이 일이 싫었다.
천사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 크기와는 별개로 맛이 너무 없었다.
사실 마력에 무슨 ‘맛’이 있겠냐마는, 진마왕이 가진 카르마는 그에게 ‘입맛’을 부여했다.
“그런데 특이점…… 없다? 하지만 냄새는 난다!”
루프레시아는 진마왕이 갑자기 여기서 왜 특이점을 찾는지 몰랐으나, 둥지에서 그녀와 연결되어 있던 사룡왕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여와의 연결을 통해 여가 지켜보고 있던 지구의 냄새를 맡은 것인가?]
“폐하!”
[코 하나는 더럽게 좋구나. 차원을 초월한 그 후각으로 천상의 좌표나 좀 찾아줬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엣헴! 맞다! 진마왕은 대단하다!”
[칭찬이 아니니라.]
청소부 슬라임 출신의 진마왕에게는 신성존재에 걸맞은 품격도, 소양도 없었다.
그러나 삼황오제 모두의 힘과 기억을 집어삼킨 그는 무시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특이점이 보고 싶다! 특이점은 항상 진마왕을 위해 요리를 해줬다!”
[요리가 아니라 죽여서 시체를 만든 거겠지. 그리고 네놈을 위한 게 아니라 여를 위한 것이었다.]
“천사는 맛없다. 진마왕은 특이점이 해준 마족 요리가 먹고 싶다…….”
[마왕 먹고 탄생한 놈이라 그런지 입맛은 더럽게 까다로워선.]
진마왕은 성진이 잡아준 마족을 가장 맛있다고 여겼다.
그 욕심 많은 사룡왕이 샘플 하나 남기지 못하고 마족 시체를 탈탈 털어 넘겨줬어야 할 만큼이나 그 맛을 좋아했으니, 사실상 성진의 손맛에 빠져서 연합에 참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마왕도 특이점 따라갈래다!”
[멋대로 차원이동 하지 마라! 네가 지구에 그대로 강림하면 대계가 물거품이 된단 말이다!]
“맞다. 특이점도 카르마를 떼어놓고 갔다. 그럼 진마왕도 카르마를 떼어놓고 가면 된다! 진마왕 천재!”
[어이 잠까……!]
진마왕은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의 몸 일부분을 툭 떼어냈다.
떼어낸 조각은 조금 작은 모습으로 원본과 똑같이 행동했지만, 원본의 힘과 카르마는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 분열한 것이냐?]
“진마왕은 슬라임이다! 슬라임은 이렇게 늘어난다!”
[분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식에 가까운가? 연결은 되어 있지만 본인이 아니라 별개의 존재로군? 슬라임 출신의 신성존재이기에 가능한 기예인가…….]
“이걸 특이점한테 보내놓고 나중에 다시 합체하면 된다!”
진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자랑하듯 주먹만 한 자신을 들어 보이더니 이내 차원 너머로 집어 던졌다.
돌팔매질하듯 차원이동을 행하는 모습에 루프레시아는 입을 떡 벌렸으며, 사룡왕은 그 목적지가 정확히 지구의 탑 안에 있는 성진의 위치라는 점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족은 국물 맛이 끝내줘요다! 사룡왕도 먹어 봐라다!”
해맑게 웃으며 외치는 그 모습에 사룡왕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