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금빛 섬광이 번쩍인다 싶으면 사방이 터져 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진의 공격은 보이지도 않았다.
선 안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갔다간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이 날아가리라.
때문에 그들은 어차피 실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성진보다는, 그를 상대로 계속해서 교전을 이어나가고 있는 다나와 남태수에게 주목했다.
-하하하하! ‘언데드’이자 ‘타이탄’인 저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 저와 마스터는 사령술의 신 영역을 개척한 겁니다!
다른 모든 언데드들이 역소환되는 와중에도 무르무르는 멀쩡히 남아 상공에 떠 있었다.
-제게 기존의 소환해제 마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무르무르는 배틀로이드 상태로 인공위성처럼 상공을 떠다니며 정확히 선 바깥에서 다나의 전투를 지원했다.
4미터 남짓한 탑승형 기체에 무려 16개나 되는 미사일 컨테이너를 얹어놓은 형태.
방어와 회피를 완전히 포기하고 공격에 집중한 무르무르는 기동포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냈다.
-하하하하! 보아라 비루한 살덩이 골렘들아! 이것이 바로 강철의 육체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플레이어들에게 과시하듯 화력을 뿜어냈다.
에렉투스에서 주워온 고등급 아이템을 재료로 온갖 난쟁이 병기가 쏟아졌다.
성진은 정말로 선 밖의 상대를 공격하지 않을 셈인지 일방적으로 방해를 받으면서도 무르무르에게 반격하지 않았다.
-마스터! 이렇게 엄호를 하는 것도 얼마 못 갑니다. 곧 피할 곳 자체가 사라질 겁니다.
성진이 거인의 검으로 그어놓은 선은 헥타르 단위의 면적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거인의 검을 휘둘러 싸우고 있는 이상 그리 넓은 면적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됐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마력에 카르마를 링크시킨 남태수가 스킬을 시전했다.
“이클립스!”
검은 태양이 떠오르자 빛이 사라졌다.
사령술사의 100레벨 각성기.
검은 태양의 그림자 아래에서는 모든 적에게 저주가 걸리며, 모든 시체가 계속해서 언데드로 부활한다.
지역을 장악하는 광역 필드기.
스킬로 발동한 이클립스는 20층에서 무르무르가 보여준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분명 강력한 마법이었다.
‘물론 성진 씨한테는 의미 없는 수준일 테지만……!’
직접 마법을 시전한 것도 아니고 스킬 시스템으로 발동한 것.
고작해야 100레벨 스킬이 성진을 상대로 충분한 위력을 내진 못할 테지만, 지금 남태수의 마력은 그의 카르마와 연동된 상태였다.
탑의 시스템은 스킬의 시전만을 대신해줄 뿐, 마력은 플레이어 본인에게서 가져다 쓴다.
남태수는 자신의 마력에 카르마를 연동시켰고, 그의 마력으로 시전된 이클립스에는 용의 피가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용의 피는 차원 너머의 존재를 불러들였다.
[고작해야 몸 푸는 일에 여를 귀찮게 하지 말거라.]
리처드 카이만이 불과 광채의 성좌를 불러왔듯, 남태수의 부름에 사룡왕이 답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성진을 가리키자 용의 숨결이 뿜어졌다.
성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제한한 극히 일부분의 힘.
사도인 남태수의 능력이 상승하며 더 안정적으로 힘을 투사할 수 있게 된 사룡왕.
그런 그녀가 뿜어낸 용의 숨결은 100층의 인간들을 몰살하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현시점에서 다나와 남태수 중 더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것은 신화급 카르마를 지닌 남태수 쪽이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남태수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은 ‘사룡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콰과과과과과!!
하늘에 구멍처럼 뚫린 검은 태양에서 사룡의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성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나와 남태수에게 말했다.
“너희 둘은 합격이다.”
이어서 성진은 정령술을 발동했다.
“티타니아.”
그간 성진은 마력을 아끼기 위해 티타니아를 미니언급 정령으로만 소환했다.
미니언급으로 소환된 티타니아는 SD캐릭터마냥 자그마한 모습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티타니아의 외형 그대로 소환된 마스터급 정령은 후광과 함께 나타났다.
예복이자 전투복인 정령의장을 착용한 모습.
“처리해라.”
명령을 받은 티타니아는 용의 숨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용의 숨결과 그들 사이의 공간이 블록처럼 쪼개지며 뒤틀렸다.
용의 숨결은 뒤틀린 공간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갈라졌다.
수십, 수백 가닥으로 갈라지며 위력이 약해진 숨결들은 이내 티타니아의 공간전이에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머지의 합격 여부는…… 굳이 찍어 먹어보지 않아도 알겠군.”
강력한 마력이나 카르마에 노출된 쇼크.
30층에서 불과 광채의 시선을 받자 다나와 남태수를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들이 정신을 잃었듯, 이곳에서도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지금 서 있는 녀석들은 나와 함께 마계로 간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산달폰의 지시를 따른다. 이상.”
* * *
그 후 성진은 이틀간 100층에 머무르며 몇 가지 문제를 정리했다.
“산달폰은 탑 안팎을 오갈 수 있다. 베르나데트 네가 진행하던 일에 쓰도록.”
성진은 베르나데트를 따로 불러 리모컨을 건넸다.
“뭔가요 이 리모컨은? 버튼이 하나밖에 없는데.”
“눌러봐라.”
베르나데트가 버튼을 누르자 옆에 있던 산달폰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위이이이잉!
“……뭔데요 진짜!”
“전기충격기다. 버튼을 누르면 바로 이 녀석의 뇌에 전기 자극을 주게 되지.”
“저보고 천사를 전기 고문하면서 일하라고요?”
“너는 천사들이 뭐하는 놈들인지 알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냐. 이 녀석은 지금 육신에 속박당한 상태라 유효할 거다.”
“통속의 뇌도 아니고 이게 무슨…….”
졸지에 과학자가 되어 버린 베르나데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녀는 센트럴 시티의 플레이어 몇몇을 졸업시켜 바깥에 보내놓은 상태였다.
그걸로 바깥의 정보도 얻고, 굴라그의 죄수들도 탈출시키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진행 중인 참이었다.
“탑을 오갈 수 있는데다 천사이기까지 하니 쓸모야 많을 텐데.”
당장은 쓸 곳이 없었다.
인류해방전선과 접촉하고 있는 와중에 천사의 존재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셈일 테니.
그쪽 놈들은 탑에서 나온 거라면 뭐가 됐든 경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플레이어는 그래도 원래 지구인이기라도 했지, 천사는 완전한 외계인이었다.
“알았으면 가서 다음 놈 불러와라.”
다음은 100층의 남태수였다.
이미 남을 인원과 위로 데려갈 인원을 다 분류해놓은 상태였지만, 마리아와 테레사의 처리에는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빨리 해라.”
“저를 아무리 재촉하셔도 검은 관의 작업속도가 빨라지진 않는다고요. 두 분의 영혼에 담긴 카르마가 나머지 전원의 카르마보다 배는 많아서 어쩔 수 없어요.”
신화급 카르마는 다른 카르마들과 말 그대로 급을 달리했다.
안 그래도 초월자인 두 사람이 어스름에서 새로운 신화급 카르마를 달고 나왔으니 처리가 늦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해라.”
“진짠데…….”
남태수는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일하러 돌아갔다.
남태수 본인만 모를 뿐, 이미 주변 인물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갈구면 갈굴수록 능률이 올라가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딱히 평소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귀찮은 성격이야.’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딱히 갈구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는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였다.
“버티는 게 고작이었어요.”
다만 지금은 별로 척척척 하지 않았다.
“마력을 깨우친 지 1년도 안 되어 네가 나를 이겼으면 네가 특이점이겠지.”
“성검의 기억 속에서는 이렇지 않았단 말이에요.”
확실히 성녀는 다나의 나이에 다나보다 훨씬 강했다.
그러나 성진은 딱히 다나의 재능이 성녀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경의 차이지.”
“환경이요?”
“내가 이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멀쩡히 지구에 남아 있었다면, 그래서 탑을 오르다 뒤늦게 재능을 발견했다면. 어쩌면 나는 여기서 세계정부의 사도 중 하나가 되어 있었을 지도 모르지.”
“어……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성진이 성좌의 편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경우에는 지금처럼 강해지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강해질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이미 지구 최강자로서 더 이상 쓰러뜨릴 상대가 없는 상황이라면 과연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성진은 원래 재능이나 잠재력 따위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건 결국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이었으니까.
“이 우주는 카르마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카르마는 오로지 실제로 일어난 일에만 깃들지.”
어스름이 어스름이라 불리는 것은 그것이 허상이기 때문.
현실에 IF는 없다.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발자국 뿐.
카르마의 세계에서는 스스로 해낸 일에만 가치가 있었다.
“타인이 해낸 일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라. 너는 네가 해낸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산이 아무리 높아 보여도 걷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도달하는 법이었다.
“성검의 카르마는 네게 강력한 무기가 될 테지만, 그것 때문에 너 자신이 성장할 수 없다면 보물이 아니라 장애물에 불과하다.”
“……!”
“장애물이라면 뛰어넘어라.”
남태수라는 인간을 잘 알게 된 것만큼, 다나에 대해서도 슬슬 감이 잡히고 있었다.
이 녀석은 천재다.
그 말은 나이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며,
아무리 잘났어도 애는 애라는 뜻이었다.
“징징대는 건 그쯤 해라. 마계대전의 마왕은 선 따윈 그어주지 않고 싸울 테니까. 너는 원래 버티는 걸 우선하는 게 맞고, 실제로 버텨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대충 이야기를 맺은 성진은 원래 그녀를 불렀던 이유로 돌아갔다.
“네 누이에 대해서 말이다만.”
다나는 어스름의 신시아가 행한 일을 보며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성좌를 따르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성진도 그것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사실이라면 신시아를 포섭할 수 있다는데 동의했지만, 실제로 그걸 행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만일 저쪽이 우리의 예상과 다를 경우 먼저 이쪽의 정보를 넘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접촉은 신중해야 한다.”
괜히 성좌와 싸우는 여덟 왕의 연합에 대해 말해줬다가 그걸 어디서 들었냐고 되묻는다면?
신시아가 오히려 자신과 다나의 안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진을 팔아먹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따라서 제안은 충분히 상대를 확인한 뒤, 산달폰을 통해 신중하게 전해질 거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 제때 제안을 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거면 됐어요. 아무리 사정이 있을 지 모른다고 해도 제 언니는 사도인 거니까요.”
“알면 됐다. 앞으로 무술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마리아나 테레사에게 물어보도록. 순수한 무술 지식은 나보다 그 둘이 더 많을 테니까.”
본인들의 주특기가 권각술인 거지, 배우기는 다 배워뒀으리라.
어스름 수도회의, 나아가 수도자들이 상대했던 수많은 이들의 무술을 모두 섭렵한 두 사람이라면 다나의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그럼 이제 저도 다음 사람을 불러올까요?”
“누굴 더 불러오려고?”
“글쎄요. 카심이라든가? 그 아저씨 나간다고 해놓고 버티고 있던 모양이던데.”
카심이 숨어 있던 건 진작 이들에게 들킨 상태였다.
애초에 ID가 뜨니 플레이어끼리는 신분세탁이 힘들었다.
아예 안 보이게 숨는 거라면 모를까.
‘어스름에 갔다 오면서 아예 전수조사를 했는데 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놔둬라. 마계대전을 위해선 쓸 만한 놈은 조금이라도 많을수록 좋으니까.”
다른 마왕들을 다 쓰러뜨려도 마계를 지배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머릿수가 필요했다.
“101층에 올라가면 나는 한동안 마왕 퀘스트를 진행하게 될 거다. 너는 그동안 마계에서 이 아이템들을 최대한 모아둬라.”
쪽지를 받아든 다나는 영수증처럼 길게 늘어진 목록을 확인했다.
-용의 이빨
-정령목 가지
-거인의 발걸음
-피닉스의 깃털
“이걸 다 어디다 쓰시려고요?”
“타이탄 코어에 저장된 설계도 중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더군.”
이 위에서는 또다시 다른 관리자가 등장할 테니 마음대로 망치를 꺼내 쓸 순 없었다.
그러나 마계대전에 등장하는 마왕들은 지금의 성진이 망치 없이 때려잡기 힘든 초월자들.
“마법 지팡이를 하나 만들려고 한다.”
성진은 전사가 아니라 마법사이기도 했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걸로 말이지.”
물론 워메이지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