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성진의 퀘스트를 받은 것은 다나와 남태수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도 최선을 다해 덤벼봐라.”
“저희도요?”
“마계대전에서는 초월자인 마왕들이 적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가기 전에 너희들도 초월자와의 전투를 경험해봐야지.”
검강을 정통으로 맞으면 성좌라도 성치 못한다.
이처럼 초월자들의 싸움에서는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었다.
“체급 차이, 레벨 차이 그런 건 모두 양쪽 다 충분히 전투에 익숙할 때나 의미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카르마를 가지고 있어도 싸울 줄 모르면 의미가 없다.”
다나는 그 말에 남태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남태수는 그녀보다 훨씬 많은 카르마를 가지고 있었지만, 만일 둘이 싸우게 된다면 다나는 확실하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남태수가 무엇을 하든 그녀가 먼저 베어 버리면 되니까.
다나의 검기는 사람 하나 베어 버리기에는 충분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별 건 아니고 한 방에 죽이려면 어딜 고민했을 뿐이에요. 목이 잘려도 잠깐은 의식이 이어진다고 하잖아요? 마법사는 목을 잘라도 죽기 전에 마법을 쓰고 갈 수도 있으니까…….”
“별거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완전 별거인데?”
성진은 수도회가 자리한 산, 세계의 끝 정상에서 거인의 검을 꺼내 선을 그었다.
“선 밖으로는 나가지 않을 테니 덤벼봐라. 대신 선 안에서는 나도 봐주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성진은 자신의 기세를 발산했다.
[<불패의 선봉장(전설)>효과가 해제됩니다!]
[<높은 탑의 성자(전설)>효과가 해제됩니다!]
[<에렉투스의 수호자(전설)>효과가 해제됩니다!]
[<요정향의 구원자(전설)>효과가 해제됩니다!]
…….
성진이 그들을 적으로 대하겠다 마음먹은 순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던 카르마 효과가 모두 해제되었다.
탑에서 일부나마 복구된 해당 카르마들은 대부분의 효과가 제한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제한된 효과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이었는지 버프가 사라지자마자 물 먹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엑, 역체감이 무슨…….”
“진심이신 거네요.”
그동안 계속 성진의 카르마 효과를 받고 있던 두 사람은 효과가 사라지고서야 그 힘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마계대전 중에 죽어서 탑의 거름이 될 거라면 차라리 여기서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러니 진심으로 덤벼라.”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다는 그 태도에 다나와 남태수는 일단 물러나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일단 마리아, 테레사 씨의 영혼을 언데드로 되살리면 어떻게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성진 씨는 지금 초월 1단계잖아.”
마리아와 테레사의 영혼은 초월 3단계.
현시점에서는 스펙 상 그 둘이 오히려 우위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빼고 생각하셔야 할 거예요.”
“테레사 말이 맞아. 성진이 진심이라고 한 이상 우리가 도움이 되긴 힘들겠지.”
아무리 성진이 진심이라고 해도 청동망치까지 가져다 쓰진 않으리라.
하지만 망치의 힘을 빌리지 않는 선에선, 정말로 최선을 다할 것이 분명했다.
“그 녀석한테 언데드 소환을 취소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 말이야.”
NPC인 상태에서는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
그렇다고 언데드로 만들면 간단히 소환해제 당할 뿐.
“천사를 잡아 온 덕에 우리가 보스 몬스터로 등록되어 있던 문제는 해결되긴 했는데, 그래도 탑이 무너지기 전까진 일단 종속된 영혼이라서.”
마리아와 테레사는 티타니아처럼 레벨제로 상태로 특별관리 되던 영혼이었다.
티타니아의 경우에는 어차피 차원문을 만들어둬야 했으므로 데려가는 것을 포기했지만 이 둘은 순수 전투원.
보물이 널려 있는 탑의 환경 탓에 계획이 점점 상향조정되다 보니 성진은 이 둘도 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를 통해 어스름에 있던 폐하의 힘을 불러와서 해결하려 했다던가.’
그러나 중간에 100층의 관리자인 산달폰이 난입하여 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그럼 무르무르나 다른 영혼도 못 쓰는 건가? 답이 없는데?”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마스터. 수도회의 두 분은 직접적인 전투원이라 소환해제를 당하면 끝이지만, 저는 후방지원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성진은 선 안쪽에서만 전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깥에 소환해놓은 언데드가 그들을 지원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계약자님께 직접적인 공격마법은 의미가 없을 테지요. 하지만 후열에서 걸어주는 보조마법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전투 전에 챔피언들을 소환해서 버프와 디버프를 다 바르면 어떻게든 근접전이 가능할지도.”
다나는 성진의 괴력을 가늠하며 견적을 내렸다.
“야수화까지 하면 저도 힘은 어떻게든 될 거예요.”
“웨어울프의 힘을 쓰겠다고? 그래도 괜찮아?”
“네, 지금이라면요.”
다나가 손에 넣은 성검의 카르마는 그녀의 몸속에 잠들어있는 웨어울프의 피보다 강했다.
성검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야수화해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데다, 변신의 심도도 조절할 수 있었다.
“성검이란 거, 성능 확실하네.”
“물론 육체능력을 따라갈 수 있다는 거지 기량은 별개의 문제에요.”
다만 이것은 최소한의 힘 싸움이 가능하다는 거지 기량 차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게 아니었다.
거인의 나라에서 성진이 힘을 제한하고 보여준 신기는 지금의 다나가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검강까지 사용한다면 다나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버티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면 우리 전력을 좀 정리해보자.”
다나와 남태수는 진지하게 성진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 * *
다나와 남태수가 진지하게 공략을 준비하는 동안, 베르나데트를 비롯한 그 외의 플레이어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성진을 아는 센트럴 시티의 플레이어들은 그들 나름대로 대천사를 때려잡던 성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성진의 힘을 모르는 기존 100레벨 플레이어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사도급 괴물을 어떻게 이기냐고 한탄했다.
“부하로 보이는 남태수 하나도 못 이겼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겨?”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그냥 나가라는 소리를 돌려서 말하는 거 아냐?”
“그래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조건이 달렸잖아.”
그들의 희망은 하나뿐이었다.
[자격의 증명은 임무의 성패와 상관없이 기여도에 따라 개별 평가됩니다.]
시스템 메시지 중간에 낀 저 문구대로라면 성진을 쓰러뜨리지 못해도 인정만 받으면 괜찮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커트라인이 낮을 리는 없었으니 문제였다.
“굳이 이런 식으로 시험까지 하겠다는 건 반은 떨어뜨리겠다는 거지? 망했네 이거…….”
플레이어가 된 그들은 NPC라고도 부르는 일반인과, 탑의 힘을 손에 넣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은 평범한 플레이어와 사도의 차이도 잘 알았다.
세계정부를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한 성진이라면 평범한 플레이어가 백 명이 모이든, 천 명이 모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덕분에 그들 가운데 진지하게 성진을 공략하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다나와 남태수가 준비를 마치고 공략에 나섰을 때.
사람들은 두 사람의 활약이 아니라 성진의 힘을 보고자 세계의 끝으로 모여들었다.
“준비는 끝났나?”
산 정상에 꽂힌 거인의 검.
성진은 그 검 위에 걸터앉아 가장 높은 곳에서 도전자들을 맞이했다.
남태수는 뒤에서 무르무르의 두개골을 쓰고,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을 손에 쥔 채 파티의 지휘를 맡았다.
“그럼 작전대로 간다. 궁병대 준비!”
남태수의 명령에 풀 세팅 상태로 대기 중이던 요정기사들이 활을 들고 나섰다.
마티아스가 소총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던 것처럼 요정족에게 사격술은 검술 못지않은 대표 무술이었다.
요정기사라면 누구나 활을 다룰 줄 안다.
그리고 그들이 손에 쥔 활과 화살은 모두 타르트의 과자 연금술로 만들어진 특수한 활이었다.
파앗!
다나가 선 안쪽으로 뛰어드는 것에 맞춰 수십 발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화살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다나를 호위했다.
“연계를 시도하는 건가? 재미있군.”
“……!”
전조는 없었다.
다나는 어느새 거인의 검 위에서 도약하여 자신의 뒤를 잡은 성진을 보며 경악했다.
‘빠른 건 둘째 치고 무슨 움직임이!’
음속은 가볍게 뛰어넘은 속도였음에도 용왕파천무의 묘리를 이용한 성진의 움직임에는 아무런 여파가 없었다.
마치 상대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나는 황급히 성검을 휘둘렀다.
덥썩!
성진은 대뜸 검기가 씌워진 성검을 맨손으로 잡아 버렸다.
‘아냐! 이건……!’
맨손이 아니었다.
아주 얇고 세밀한 검기가 성진의 손 위를 덮고 있었다.
‘검기(劍氣)…… 아니, 권기(拳氣)!’
시작부터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버리려는 수법.
성검이 없으면 카르마가 폭락하는 다나에겐 실로 적절한 수였으나, 그 정도는 다나도 예상하고 있었다.
[트리거 발동.]
[저장된 저주가 발동합니다!]
남태수가 발라둔 저주가 발동하자마자 다나는 검기를 해제했다.
검기를 붙잡고 있던 성진은 순간적으로 성검을 놓치고 말았다.
다나는 그 틈을 타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쓰러지듯 잠수했다.
살아 있는 그림자.
사령술사의 소환수를 이용해 저 멀리 다른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다나는 성진에게 쏘아지는 화살비를 보았다.
화살을 이용한 T.O.T. 사격 (Time On Target).
다나가 저주를 걸고 빠지자마자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쏟아지며 미사일이라도 폭발한 듯한 위력을 발휘했다.
후폭풍이 몰아닥치며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다나의 육감은 시야가 가려진 상황에서도 비상을 외쳐댔다.
서걱!
몸을 뒤로 젖힌 순간, 검강이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반응 좋군. 달부름 없이도 꽤 잘 다루는데.”
직후, 코앞에서 나타난 성진이 돌려차기를 날렸다.
‘죽는다.’
저거 맞으면 죽는다.
아니, 막아도 죽는다.
회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위기였지만, 다행히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이젠그라드!”
대방패를 든 강철의 거인이 그녀와 성진의 사이를 막아선다.
동시에 성진의 돌려차기가 아이젠그라드의 대방패에 작렬했다.
피잉!
대방패에 새겨진 보호의 룬이 깨져나가며 대포라도 맞은 듯, 강철 방패가 뚫렸다.
방패를 찢어 버리고도 남은 발차기의 여력은 거인을 하늘 위로 날려 버리며 그 가슴까지 꿰뚫었다.
일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소환해제.
“너무하잖아요.”
“마왕도 이 정도는 한다.”
다시 한번 검강이 그녀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다나는 또다시 도망치는 대신 검기를 뿜어내며 정면으로 그에 맞섰다.
극한의 집중력에 세상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다나는 그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검강에 닿은 검기가 강물에 담근 솜사탕처럼 분해되어간다.
검기성강.
닿는 대상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만 같은 힘.
‘하지만 닿지 않으면 괜찮아!’
검기를 지우고 들어온 검강이 성검의 본체에 닿기 전에 검로를 비튼다.
대신 심판의 검을 소환해 궤적 위에 덧댔다.
검기가 검강에 지워지는 것보다 빠르게.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심판의 검은 순식간에 파괴된다.
‘그렇다면 더 많이!’
한 자루
두 자루
이런 걸로는 1초도 막아내지 못한다.
열 자루
스무 자루
백 자루
천 자루
만 자루
검기가 다 형성되기도 전에 지워져서 취소되다 보니 찰나의 순간에도 수백 수천 번의 심판의 검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머리가 타 버릴 것만 같아.’
과도한 집중으로 의식이 아득해져 갔다.
그래도 괜찮다.
웨어울프의 재생력이 뇌의 과부하마저 회복시킬 테니.
영겁에 가까운 스킬 시전 끝에, 다나는 한 번의 휘두름을 흘려냈다.
“마티아스!”
데스나이트 특유의 검은 불꽃 검기.
본인의 육체 그대로 데스나이트가 된 마티아스는 생전의 힘을 되찾아 기습을 가했다.
성진은 가볍게 권기를 발현해 마티아스의 검을 튕겨냈다.
그 사이 이미 수십 명의 요정기사가 성진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초월자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
그러나 성진은 특이점이었다.
여덟 왕의 진전을 이은 그들의 대전사.
[사자(死者)는 시체로 되돌아가라.]
성진의 언령이 그곳에 있던 모든 언데드를 구속했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그들을 둘러싼 요정기사들은 순식간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자, 그럼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지.”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황금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저 뒤에 배경처럼 꽂혀 있던 거인의 검이 금빛 광채를 뿜어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덤비지 않으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