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남태수가 2차 전직으로 고른 묘지기는 원래 사룡왕이 처음 사령술을 가르친 13명의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용들의 묘를 지키기 위해 선택받은 그 고대 리치들은 그들의 주인을 배신한 죄로 모두 숙청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하나는 성좌가 되어 지금도 용들과 싸우고 있었다.
“증오의 성좌.”
불과 광채.
침묵과 광기.
질병과 쇠약.
수많은 성좌들이 자신을 한 가지로 규정하지 못해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을 하나로 규정하는 데 성공한 존재.
근원에 도달한 절대좌.
“이 세상의 사령술은 사룡왕과 증오의 성좌, 이 둘의 계파로 나뉜다. 그리고 탑의 시스템이 제공하는 플레이어의 직업 ‘사령술사’는 후자이지.”
남태수가 배워야 할 것은 전자에 해당하는 사령술이었다.
“지금까지는 양측의 공통된 부분, 즉 기본 마법만을 배웠으나, 카르마를 배운 이제는 다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근데 이걸 왜 폐하나 무르무르가 아니라 성진 씨한테 배워요?”
“내가 사룡왕의 14번째 제자이자 마지막 제자이니까.”
사령술이든, 정령술이든, 룬 마술이든 혈마술이든.
성진의 위로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특이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였다.
“증오의 성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놈이 사용하는 사령술은 나와 다른 걸 테니 비교가 무의미하겠지.”
결국 무르무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성진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카르마를 다루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사령술을 배우던 너라면 더더욱 그렇지. 영혼에 관한 부분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으니까.”
머리로 이해하든, 몸으로 체득했든 남태수는 이미 필요한 모든 기반지식을 습득한 상태였다.
“마법에 마력 대신 혼을 담아라.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성진은 카르마의 운용방식을 천천히 시범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을 거다. 모르겠으면 그냥 마력에 카르마를 담고 마력을 움직여서 마법을 써도 된다.”
사실 대부분이 후자의 방식을 사용했다.
심지어 성좌들까지도.
“하지만 이런 방식은 편하긴 해도 그만큼 상대에게 가로막힐 가능성이 크지. 최종적으로는 카르마와 마력을 따로 사용해야 한다.”
마력에 카르마를 담으면 마력 운용이 더 뛰어난 상대에게 그것을 빼앗기거나 디스펠 당할 수도 있었다.
반면 순수한 카르마는 달랐다.
“카르마를 이용한 신성마법은 진정한 힘의 주인과, 그 주인이 허락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다. 이걸 막기 위해선 힘으로 상쇄하는 수밖에 없지.”
“그렇겠네요. <지구 최초의 사령술사>는 저, 남태수이니 누군가 이 카르마를 빼앗아간다고 그 힘을 사용할 순 없겠죠.”
남태수는 그러다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럼 성진 씨는 어떻게 망치에 담아둔 카르마를 쓸 수 있는 거예요? 한번 포기한 이상 그건 성진 씨의 카르마가 아닌 거 아니에요?”
“좋은 지적이다.”
카르마는 마력처럼 단순히 어딘가에 옮겨 담아두는 것이 불가능했다.
성진이 카르마를 버렸다는 것은 그것의 소유권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뜻.
당연하지만 주인이 아니게 된 이상 성진이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야 했다.
“청동망치에 담긴 카르마는 더 이상 주성진의 카르마가 아니지. 때문에 나도 주성진으로서 그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요?”
“망치의 주인으로서 청동망치의 힘을 사용하는 거지.”
원래 힘의 소유권은 완전히 망치에게 넘어갔지만, 망치의 소유권이 성진에게 있기에 그 힘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것.
자회사의 지분 100%를 가진 모회사가 자회사의 재산이나 특허권 등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과 같았다.
“원래는 성진 씨가 쌓았던 카르마인데도요?”
“그래. 티타니아가 정령왕의 카르마를 이어받은 것도 마찬가지다.”
티타니아는 애초에 정령왕의 대체제로 만들어진 복제품이었기에 카르마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원래라면 딸이라고 해도 부모의 카르마를 이어받을 순 없었다.
실제로 오직 그것만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체임에도 티타니아는 온전한 힘을 계승하지 못해 반신에 머물러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카르마는 신성존재라도 조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다.”
신들조차 벗어날 수 없는 우주의 법칙.
그 누구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성좌들이 탑을 만드는 거지.”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요?”
“지구에는 46억 년 동안 지구의 생물들이 쌓아온 카르마가 있다. 이를 억지로 침범하려 하면 저항을 받게 되지.”
억지로 침범할 경우 지구의 카르마에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된다.
또한 성진이 성녀 살해의 카르마를 얻어 성녀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처럼, 지구의 영혼을 먹어 치워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반면 지구의 생물들이 천사와 성좌를 반기게 된다면?
“이쪽에서도 원하고 있을 경우, 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이곳에 와서 모든 생명을 먹어 치우겠지.”
성좌가 이 땅에 강림하는 날,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종말을 맞이하리라.
“그러니 한동안은 괜찮은 거다. 내 존재를 들켰다고 바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니까.”
놈들이 억지로 강림할 경우, 놈들의 힘도 제한된다.
성진은 자신의 카르마를 버려서, 놈들은 지구의 카르마에 제약이 걸려서.
피차 멀쩡하지 못한 상태라면 싸우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물론 그 경우 천상의 좌표가 물 건너간다는 문제와, 신성존재들이 싸우는 여파로 지구가 멸망하는 문제가 있겠지만.”
“……아니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잖아요! 왜 사소한 것처럼 넘어가려는데!”
“지구가 멸망해도 너는 사룡왕이 언데드로 되살릴 테니 괜찮지 않나? 네 영혼에 담긴 카르마를 생각해서라도 성좌들에게 넘겨주진 않을 텐데.”
“그게 죽는 것보다 나은 거 맞아요? 진짜로?”
남태수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다.
그의 심상세계는 그가 살던 반지하 자취방이었다.
현실의 기억을 토대로 똑같이 구현된 그 방 안에는 온갖 카르마들이 소포처럼 박스포장 되어 널려 있었다.
‘일반등급은 담뱃갑만 한 사이즈, 희귀등급은 5개들이 라면 묶음만 한 사이즈…….’
이러한 카르마들은 자취방의 선반이나 침대, 냉장고 안, 밥솥 위 등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사룡왕의 사도>라는 신화급 카르마는 방 안 어딜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남태수가 찾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신화급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크잖아.’
그의 자취방이 자리한 빌라 건물.
빌라가 자리한 서울시.
서울시가 자리한 한반도.
한반도가 자리한 대륙, 그리고 행성.
이 행성은 남태수의 상상이 구현한 지구가 아니었다.
‘거대한 카르마 덩어리.’
남태수의 심상세계 속 모든 것이 얹어진 이 별이 바로 <사룡왕의 사도>였으니까.
인간은 별이 얼마나 큰지 알 수는 있어도 체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남태수 또한 <사룡왕의 사도>의 끝을 알 수 없었다.
신화급 카르마라는 건 이런 뜻이었다.
‘심지어 임시 사도인데도 이 정도라니. 영혼에 이런 걸 여럿 품고 있으면 신이 될 만도 하네.’
남태수는 이러한 자기인식을 통해 지금까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성진의 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에 성진 씨가 성좌들의 진실을 말해주기 위해 나를 자신의 심상세계로 불러들여 기억을 보여줬었지.’
그때 보았던 성진의 심상세계 속에는 별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게 전부 이 <사룡왕의 사도> 같은 것들이라면…….’
인간이 성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성좌들이 한 인간을 두려워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실제로 성좌들은 성진 씨를 두려워하고 있던가?’
이 우주적 전쟁 속에서 지구가 얼마나 작은 곳인지.
성진이 인간을 구하겠다 나서는 게 아니라 성좌를 조질 생각만 가득한 게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남태수는 여기까지 와서야 이 모든 일들을 겨우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방법은 다 이해한 것 같군. 나머지는 연습의 영역이니 알아서 정진하도록.”
남태수는 성진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저쪽도 끝난 모양이니.”
눈을 뜨자 그곳에는 다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남태수는 다나의 상태도 어느 정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와 무슨 아수라장을 지나온 역전의 용사 같은 살기가…….”
무슨 카르마를 손에 넣은 건진 몰라도 겉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대단했다.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 성녀의 삶을 체험해보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거니까.”
“성녀라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에 저래요?”
“평범한 여자애가 신성무구가 될 정도의 삶.”
“아.”
남태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장대한 이야기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을 열 수 있겠나?”
“네, 돌아가죠.”
다나는 성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검을 허공에 그었다.
그러자 어스름이 갈라지며 현실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 * *
베르나데트는 100층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그곳에서 뒤이어 올라오는 플레이어들을 맞이하며 성진을 기다렸다.
어차피 100층 밑으로 남아 있는 플레이어는 과반이 센트럴 시티 출신이었으므로 그녀가 플레이어들을 통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장님! 하늘 좀 보세요!”
상점에서 구매한 마법 걸린 양모 코트를 알파카 같다고 두른 부하직원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곳에 왔을 때부터 하늘에 휘몰아치고 있던 어스름이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뭉쳐진 직후 빛이 내려왔다.
빛이 스테이지를 훑고 지나가자, 그 자리를 따라 100층의 NPC와 플레이어들이 어스름에 빨려 들어갔던 원래 그 자리에 나타났다.
원래 자리에 누가 서 있던 경우에는 그냥 그 옆에 나타났다.
“베르나데트.”
“보스!”
“설명은 차차 하도록 하지. 일단은 플레이어들을 모두 모아다오.”
대놓고 어스름에 들어갔다 왔으니 100층의 플레이어들도 거취를 명확히 해둬야 했다.
추가로 산달폰의 처분과 마리아, 테레사의 해방 문제도 있고.
그러는 사이 남태수는 무르무르와 재회했다.
“무르무르!”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헌앙해지셨군요.
“엥? 그다지 변한 건 없을 텐데. 드래곤 피어도 잘 제어하고 있고.”
-가진 카르마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지 않으셨습니까. 고개 들고 어깨 펴는 것만으로도 인상은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실제로 어스름 이전까지의 남태수가 영혼에 뭐가 덕지덕지 달린 그냥 플레이어였다면, 지금의 남태수는 사도다운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카르마를 감지할 수 있는 녀석이라면 남태수의 영혼을 보고 그를 경계하리라.
-아직은 어설픈 점이 보이지만, 처음 만난 입장에선 그래도 경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일부러 허점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니까요.
대부분의 경우, 남태수의 실력이 처참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하리라.
사룡왕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를 사도로 들이려 할 리가 없으니까.
싸우지 않고도 남태수가 가진 카르마에 비해 굉장히 약하다는 것을 알아채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허세를 부리면 먹힐 거라는 이야기지? 그건 나쁘지 않은데?”
싸우지 않고 승리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건 없다.
심지어 이에 관해서는 성진도 같은 의견이었다.
성진이 싸우는 건 그저 그가 상대하는 적들이 어느 한쪽이 절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놈들이기 때문이었으니까.
-그 검은 관은 뭡니까? 어쩐지 그분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맞아. 어스름 쪽 폐하가 만들어준 물건이거든. 탑의 아이템이 아니라 인벤토리에는 안 들어간다는 문제가 있지만.”
-잘 됐습니다. 제 리치의 영혼석이 타이탄용으로 쓰이고 있으니 이제 영혼들은 그쪽에 담아두면 되겠군요.
“그보다 너는 어스름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안 그래도 그것부터 말씀드리려고 했지요.
무르무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과 함께 있던 영혼들을 불렀다.
마티아스를 비롯한 그 영혼들은 하나같이 온전한 육신을 가진 상태로 소환되었다.
“……이게 다 뭐야?”
-어스름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올 기회는 영혼마다 한 번뿐이지요. 그래서 여기 있는 전원, 어스름에서 본인 시체를 구해왔습니다.
천사들과 싸우다 죽은 영웅들은 모두 본인의 시신을 되찾았다.
-본인들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갖춰졌으니 이제 이들을 생전의 능력을 모두 갖춘 상태로 소환할 수 있을 겁니다!
세 자릿수 레벨의 NPC가 수백 명.
그들에게도 사도가 보유한 클랜에 뒤지지 않은 강력한 전력이 갖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