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90화 (90/170)

<90>

현실의 사룡왕은 지구상에서 마음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성좌들이 성진의 존재를 눈치챌 테니.

하지만 어스름의 사룡왕은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산달폰의 새 육체가 만들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탑의 NPC 시스템을 참고 좀 했느니라. NPC들은 안에 든 영혼의 의사와 상관없이 육체에 이끌려 다니잖나? 이 몸에 들어가 있는 이상 이 녀석은 너를 위해 일하게 될 거다.”

사룡왕이 가져온 육체는 산달폰의 영혼과 같은 토끼 수인의 육체였다.

“몸에 들어가 있는 이상? 그렇다면 죽거나 자살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육체와 분리될 경우 영혼은 그 즉시 검은 관을 통해 어스름에 있는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느니라.”

천사라면 누구나 죽음보다 두려운 결말에 대해 알고 있었다.

죽지도 못하고 언데드가 되어 영원히 고통 받는 삶.

사룡왕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싶어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거라면 저 녀석도 다른 마음을 먹진 못하겠지. 내게 영혼을 넘겨주는 것보단 그대와 함께 다니는 게 차라리 나을 테니까.”

폭탄목걸이를 채워놓고 협력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

그러나 죽어도 끝나지 않는단 점에서 사룡왕이 훨씬 악질이었다.

“물론 끝까지 그대에게 빌붙어 살아남는다 해도 결국 육체가 늙어 죽으면 여의 손에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이 육체의 수명은 1년으로 설정해뒀거든. 케헷.”

인간의 성대로는 구현할 수 없는 용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족들이 다른 종족의 몸을 사용할 때 나는 특유의 웃음소리는 사악한 용왕의 심사처럼 뒤틀려 있었다.

‘이래서야 누가 악당인지.’

남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대로 가다간 사룡왕의 장난감 신세인 건 그도 마찬가지.

그러거나 말거나 성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차피 1년이면 충분하다. 그때쯤 되면 내가 탑의 꼭대기에 도달해 있든, 성좌들이 내 존재를 알아채고 몰려와 있든 어느 쪽이든 결판이 나 있겠지.”

그러니 가능하면 성좌와 엮이기 전에 초월 3단계는 찍어놓는 편이 좋다.

‘신화급만 따지자면 성녀를 통해 하나, 어스름의 사룡왕과 계약한 것으로 둘.’

후자는 계약조건을 완수해야 활성화될 테지만, 어쨌거나 하나만 더 구하면 3단계 초월을 이룰 수 있었다.

‘나라면 3단계만 되어도 신성광휘를 다룰 수 있을 거다.’

성진의 청동망치에는 5초월을 이뤘던 카르마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미 한번 이뤄본 것이니 최소한의 자격만으로도 해당 카르마의 전력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다시 5단계에 도달한다면.’

하나의 몸으로 두 개의 신성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사룡왕에게 카르마를 얻은 것처럼 티타니아에게서 카르마를 얻을 순 없나?’

성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정령으로 소환된 티타니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성진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성진은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었다.

-확실히 그렇네요. 탑 안에서 신화급 카르마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서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힘을 복구할 수 있을지도요.

“하지만 네 영혼이 탑에 묶여 있는 상태로는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군. 혹시 뭔가 생각나는 방법이 없나?”

-그, 그러면 이런 건 어떠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티타니아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저와 결혼하는 거예요. 요정공주의 부마로서 왕가의 일원으로 편입된다면 분명 강력한 카르마가 될 거예요!

“내가 너와 혼인한다?”

티타니아는 딴생각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절대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요! 제가 죽고 나서 왕가의 적통이 끊어진 상태니까 이름이라도 올리면 왕가의 카르마를 이어받을 수 있을지도…….

일리는 있었다.

성진 본인이 요정족은 아니었기에 온전한 효과를 다 볼 수는 없겠지만, 요정왕가의 카르마는 일부만으로도 상당한 것일 테니까.

“확실히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지, 진짜요?

“으음? 마음에 안 드나? 하긴 제대로 카르마 효과를 받으려면 거짓으로 혼인할 수는 없겠지. 부담스럽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아직 급한 건 아니니.”

성진이 결혼계획을 포기하자 티타니아는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으나, 아무리 그녀라도 용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혼인을 강행할 순 없었다.

-으읏, 기회가 눈앞에 있었는데……!

이 문제는 좀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당장은 눈앞의 일이 먼저였다.

“남태수, 받아라.”

성진은 어스름의 사룡왕에게서 받은 검은 관을 남태수에게 넘겼다.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어스름에서 무언가를 들고 나갈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했잖나. 내 기회는 이미 썼으니 이걸 들고 나가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즉, 검은 관은 남태수의 기회를 이용해 들고 나가겠다는 뜻.

이는 남태수에게도 한 번뿐인 어스름 기회를 성진이 써 버리겠다는 의미였으나, 그에게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성진 씨가 아니었으면 제가 어스름에 들어올 일도, 이렇게 100층까지 올라올 일도 없었으니 상관은 없는데요. 그래서 이게 뭐하는 장치인데요?”

“영혼수집기. 기본적으로는 어스름의 사룡왕이 현실의 영혼을 다룰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다만, 너라면 리치의 영혼석을 대신할 보조장비로 써먹을 수도 있을 거다.”

남태수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영혼을 모두 무르무르가 들어있는 리치의 영혼석이라는 아이템에 넣고 다녔다.

보통은 그냥 인벤토리에 넣어두니 문제가 없었는데, 리치의 영혼석을 타이탄 코어와 함께 골렘으로 소환해놓은 지금은 무르무르와 떨어지면 다른 영혼들도 부를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영혼 보관용으로도 성능은 확실할 거다. 아마 70억 지구인의 영혼을 모두 담아도 자리가 남겠지.”

“그렇게까지 데리고 다닐 일은 없지 않을까요…….”

“글쎄.”

어쨌거나 메카 무르무르와 따로 움직일 때도 영혼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선 남태수에게도 나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나저나 사신의 대낫에 이젠 관까지 지고 다니는 셈인데.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사령술사네요 이거.”

“이미 사룡왕의 사도로 전직했으면서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군. 모든 사령술사들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일 텐데.”

“아니 전 애초에 사령술사가 될 생각도 없었거든요?”

성진은 남태수를 통해 지켜보고 있을 현실의 사룡왕을 생각해 일부러 말을 돌렸다.

다른 이들에겐 대충 검은 관을 천사의 영혼 같은 걸 어스름에 팔아넘기고 도움을 받기 위한 물건이라고 설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검은 관은 사실 성좌를 어스름에 처박아 버리기 위한 물건이었다.

‘사룡왕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 귀한 영혼들을 왜 어스름에 주냐고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가능하면 마지막까진 비밀로 하는 편이 낫겠지.’

성진의 일 중에는 서로 종족부터가 다른 여덟 왕들을 중재해 연합하게 만드는 역할도 있었다.

그리고 사룡왕 또한 여덟 왕 중 하나였다.

같은 인간끼리도 말이 안 통하는데 아예 종족이 다른 놈들끼리 무슨 협조가 되겠는가.

‘왕들의 땡깡은 기본적으로 들어주면 안 된다.’

애매하다 싶으면 일단 드러눕는 놈들이다.

실제로 땡깡 좀 부려서 자신의 종족에게 이득이 된다면 드러눕는 게 나쁜 선택인 것도 아니고.

덕분에 왕들이 이건 양보할 수 없다며 드러누울 때마다 ‘너흰 거기서 살아라 나는 간다’ 같은 소리를 하며 밀고 당기는 것도 성진의 일이었다.

“슬슬 정리되었으면 100층으로 돌아가지.”

성녀는 이미 떠났지만, 원래 어스름은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세트로 되어 있었다.

들어올 때 사용된 성녀의 카르마는 아직 남아 있었기에 그들까지는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법이었다.

“다나, 네가 해야 한다.”

“네?”

“네가 가진 성검. 그것이 열쇠다.”

성녀의 영혼이 담겨 있던 성검.

성녀의 카르마를 조작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검이 필요했다.

“어…… 다시 마리아 님 드리면 되나요?”

“아니, 네가 해야 한다. 저 녀석은 못해.”

처음 어스름에 들어올 때, 성검을 뽑아들고 문을 연 것은 마리아였다.

그러나 실제로 마리아가 했던 것은 대수녀원장의 권한으로 성검에 잠들어있던 성녀의 영혼을 깨운 것뿐.

어스름의 문을 연 것은 성녀 본인이었다.

“성녀는 떠났고 검만 남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직접 해야지. 그리고 우린 성녀의 힘을 못 쓴다.”

“왜요?”

“우린 성녀 살해의 카르마를 가지고 있으니까. 남태수를 시킬 순 없으니 네가 배우는 게 제일 빨라.”

이러한 카르마를 가지고 있는 이상 성녀의 힘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다나 양은 자신의 카르마를 인식하는데 성공하셨죠? 어렵지 않답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을 때처럼 검을 들여다보세요. 검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과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카르마를 인식하는 것은 곧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

대상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그 방식은 대상이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더라도 적용 가능했다.

“검의 카르마를 느낄 수 있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혼과 혼의 이어짐. 카르마를 이용한 소통이란 그런 것이거든요.”

탑의 번역 시스템이 단순히 말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파시처럼 뜻을 전하듯.

카르마는 상대와 ‘통할’ 수 있는 힘이었다.

“검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검사로서의 기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할 거예요.”

다나는 그 말에 따라 마음을 가다듬고 성검에 집중해보았다.

눈을 감자 그에 반응하듯 촉감이 선명해졌다.

마리아는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 음색으로 다나의 곁에서 속삭였다.

“네가 느끼는 성검은 어때? 대충 넘어가지 말고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는 거야.”

웨어울프의, 거기에 플레이어의 레벨로 더더욱 강화된 다나의 감각에 검의 손잡이가 느껴졌다.

평범한 롱소드 사이즈임에도 불구하고 성검은 톤 단위의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자루에는 제사용으로 축성된 성포가 감겨 있어 마력전도를 높이고 안정적인 그립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루 위로는 어스름의 종교적 심볼을 형상화한 십자가 형태의 코등이가 있었다.

이어서 칼날.

무게중심은 다소 치우쳐져 있었지만, 날 자체는 완전히 균일한 구조로 정련된 모습.

또한 칼날은 서 있지 않아 가검처럼 뭉툭했는데, 방치된 탓은 아니었다.

‘애초에 검기 사용을 전제로 만든 거야.’

칼날, 코등이, 자루가 통짜 금속으로 이루어진 검.

각각의 부품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마력의 전도율 또한 일정하게 유지된다.

무언가를 베는 도구가 아니라 검기를 발현하는 도구.

다나는 성검에 자신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

우웅하는 소리는커녕 미세한 진동조차 없이 검기가 솟아난다.

다나는 그제야 이 성검이라는 것이 범상치 않은 재질로 만들어졌음을 깨닫고 눈을 떴다.

“이거…… 도대체 뭐로 만든 거죠?”

“거기까지 도달했구나? 직접 들여다보렴. 그걸 깨달았으면 이제 볼 수 있을 거야.”

그와 동시에 다나의 정신이 성검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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