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현실의 지구는 다른 세상과 접촉하기 전에 성좌와 먼저 만났다.
탑이 내려온 세상은 천상의 관리 하에 들어간다.
때문에 현실의 지구인들은 여덟 왕의 연합이나 여타 다른 종족들과 접촉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반면 어스름은 달랐다.
이곳에 천상은 없었으나, 준비되지 않은 채 이차원의 존재들을 조우하게 된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으음, 탈출기가 이륙하려면 활주로를 정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도가 올라갈 때까지 누군가 남아서 대공 몬스터를 막고 있어야 한다?”
영국이 위태로워지자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신시아는 PMC를 창설하고 각국의 부자와 정치인들을 구하러 다녔다.
몬스터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 그리고 실질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자신이 영국을 떠난 것처럼 탈출을 원하는 돈 많은 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리라.
용병사업을 통해 그들을 구해주고 돈을 벌며, 강력한 헌터들을 포섭하면 안전해질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신시아는 기업가를 구하고 돈을 챙겼으며, 독재자를 구하고 군사 장비를, 정치인을 구하고 인맥을 얻었다.
신시아의 PMC는 공식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이 되었으며, 비공식적으로 미국 다음가는 군사조직이 되었다.
일개 기업이 군사규모 순위에서 국가와 같은, 그것도 기존의 2위 국가 이상의 평가를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PMC가 보유한 핵탄두가 러시아와 중국의 보유분을 합한 것보다 많아졌으니까.
PMC에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은 없어도 공간이동 능력자는 널려 있었다.
허나 그러고도 대뜸 본사 건물 위에 초대형 게이트가 열려 몬스터가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내려야겠네.”
“사장님!”
“개 같은 발연기로 감동 받은 척하지 마세요. 같이 남아서 의무를 다하라고 하는 수가 있으니까.”
신시아가 자진해서 사지에 남겠다고 했을 때, 다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언니 지금 뭐하는 거야? 사실 본사 지하에 비밀 탈출로 같은 거라도 만들어놨어?”
“지하벙커를 만들어서 자폭용 핵탄두는 좀 깔아두긴 했지만, 저어기 전자기파 내뿜는 놈들 때문에 공간이동은 불가능해. 알잖니?”
“그럼 왜 남으려는 건데! 살겠다고 나라도 버리고 도망친 인간이!”
신시아는 영국을 버린 그 일로 억 단위의 사람들과 원수를 졌고, 그에 대한 마음고생은 온전히 다나의 몫이었다.
그런 신시아가 이제 와서 갑자기 자기희생을 하겠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 다른 애들한테 내리라고 하면 네가 들고 일어날 거잖아?”
“……!”
“분명 온갖 억지를 쓰면서 따라 내릴 텐데 그럴 바에야 내가 남는 게 낫지.”
“그, 그러니까 지금 나를 태워 보내려고 언니가 내리겠다는 거야?”
“영국에서 강제로 비행기를 태웠을 땐 진짜로 뛰어내렸잖니? 그거 다시 건져온다고 사람 네댓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한 달을 내리 굶었고. 내가 데려온 신부님이 미안하면 봉사활동이라도 다니라고 설득하지 않았으면 진짜로 굶어 죽으려 했으면서.”
그러니까 여기서 또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살아남으면 그거 가지고 지랄 날 게 뻔하다는 소리였다.
“내가 다른 사람보고 남으라고 하면 너도 따라 남을 거고. 그렇다고 너를 두고 갈 수는 없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남아야지.”
한평생 제 한 몸밖에 모르는 인간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심지어 자기 살기 위해선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목숨을 물론 나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다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겠다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굶지 말고. 기껏 살려놨더니 복수하겠다고 일부러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도 말고. 알았지?”
그것이 다나가 본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신시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기절시킨 뒤 활주로로 나아갔다.
다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저 멀리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언니가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다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현실의 신시아는 가문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전 인류를 성좌라는 괴물에게 팔아넘겼다.
하지만 지금의 이야기는 그 이유가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것도 아마 다나를 위해서 벌인 짓이라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그 모든 일이 다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녀가 신시아를 탓할 수 있는 걸까.
충격을 먹은 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앞서 산달폰을 잡아온 성진이 심문을 위한 사룡왕의 108고문 쇼를 직관하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군. 허탕이라도 쳤나?”
“허탕이라면 허탕이긴 하네요.”
다나는 성진에게 어스름의 자신을 만났던 이야기를 전했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다고요?”
“동기가 그런 거라면 성좌에 맞서는 이들이 있으며, 성좌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설명하면 이쪽으로 포섭할 수 있지 않겠나.”
듣고 보니 그랬다.
충격이 커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던 다나는 성진의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가 사도 일을 그만두게 한다?”
“포섭할 거라면 계속 사도로 남아 있는 게 낫겠지. 천상에 사람을 심어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아예 다나가 사도로 뽑히는 것도 생각하고 있던 성진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적의 품 안에 보낼 수 있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심장을 찌를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사도를 포섭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성좌는 모두 죽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의 법대로 처벌해도 상관없다.’
애초에 성진의 관심사는 정의집행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신시아가 사법거래를 하든 뭘 하든 그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그럼 제가 탑을 나가서 언니를 만나 봐야…….”
“그럴 필요는 없다. 베르나데트가 내보내 놓은 놈들도 있고, 이번에 저 녀석도 잡았으니까.”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산달폰을 가리켰다.
죽은 상태로는 천사라도 탑 안팎을 오갈 수 없다고 했지만, 이곳은 어스름.
사룡왕이 있는 이상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저 녀석을 이용하면 숨어 다니는 게 고작일 반정부세력도 조금은 써먹을 수 있게 되겠지. 거기에 사도의 협조가 더해진다면 탑 바깥의 문제는 걱정을 덜 수 있을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나에게도, 성진에게도 모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부웅!
그러는 사이 지구상에 퍼져 있던 100레벨 플레이어들을 모두 붙잡아온 남태수 또한 루프레시아와 함께 귀환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군.”
“그러게요? 이게 하니까 되네. 루프레시아 씨가 나설 것도 없이 저 혼자서도 할만하더라고요.”
“100층까지 그만큼 퍼다 줬는데 아직도 1인분이 아니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지.”
“이 집은 1인분이 뭐 이렇게 비싸…….”
동레벨 플레이어를 상성이고 뭐고 줄줄이 다 때려잡은 셈이지만, 그간 먹은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야 했다.
남태수는 신화급 카르마인 사룡왕의 사도를 가지고 있으니 이론상 초월도 이룰 수 있었다.
그 경우 망치를 제외한 현재의 성진과 동급인 1단계 초월자가 될 테니, 사실 지금보다 훨씬 강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걸 써먹는 방법을 모른다는 점.
“그래도 용들과 함께 다녀서 그런지 용의 피가 좀 진해졌군.”
“예?”
“몰랐나? 미미한 수준이다만, 지금의 네게선 계속 드래곤 피어가 나오고 있다.”
남태수를 상대한 플레이어들은 드래곤 피어에 의해 디버프가 걸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리라.
“제가요?”
“보아하니 전혀 모르고 있었군. 그럼 어스름을 나가기 전에 용들에게 그걸 조절하는 방법이라도 배워 놔라. 안 그러면 나중에 일상생활도 힘들어질 테니.”
진짜 용이라면 날 때부터 드래곤 피어를 조절할 수 있겠지만 남태수는 아니었다.
조절법을 배우지 않으면 앞으로 한평생 사람들을 기절시키고 다닐 테니 외출은커녕 대화도 힘들어지리라.
“엑. 아니 그런 중대한 문제가 있었으면 미리 말씀해주셨어야…….”
[뭐가 걱정이니?]
“네?”
[인간들이랑 살기 힘들면 그냥 우리랑 살면 되잖니.]
“괜찮은 생각 같군. 보니까 인간보다는 용들한테 더 사랑받던 것 같던데.”
“팩트 밴입니다.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세요.”
“정정당당? 결투를 하자는 것인가?”
성진은 의문을 표하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성진 씨 말이 무조건 맞는 것 같네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하고 사는 게 좋지 않겠어요?”
[물론이지.]
루프레시아는 방긋 웃으며 남태수를 핥았다.
“카르마는 보유하고만 있어도 기본적인 효과를 발휘하지만, 당연히 직접 사용하는 편이 더 강력하다.”
“그야 그렇겠죠. 마력도 왕창 모아서 기본적인 신체능력이 올라가는 것보단 그 마력으로 신체강화 마법을 쓰는 편이 강하니까요.”
다나와 남태수는 지금까지 카르마의 보유효과만을 받고 지내왔다.
두 사람이 카르마를 다루기는커녕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시스템과 별개로 카르마를 감지할 수 있게 된 이상, 이제는 배울 수도 있을 터였다.
“탑 안에서는 카르마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지. 어스름에 들어온 김에 너희 둘도 자기가 가진 힘을 관리할 수는 있게 만들어주겠다.”
“저희를 무슨 인간병기로 만드실 생각이세요?”
“못해도 바깥에 있는 사도보다는 세져야 할 거 아니냐.”
이제와선 그리 힘든 목표도 아니었다.
성검의 카르마와 사룡왕의 사도라는 카르마.
둘 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힘만 다룰 줄 알게 되어도 이룰 수 있는 목표였으니까.
‘이 녀석과 이렇게 계속 가게 될 줄은 몰랐지.’
대충 지구에 대한 정보나 조금 얻기 위해 데려온 녀석이었다.
일찌감치 불과 광채의 사도와 마주친 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헤어졌으리라.
그러나 임시라도 사룡왕의 사도까지 된 이상, 이제 남태수는 파티에서 빠질 수 없는 멤버였다.
‘어제의 동료가 성좌의 유혹에 넘어가 적으로 나타나는 일은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적고, 그중 지구에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지.’
개중 사도와 대적이 가능한 것은 다나와 남태수 단둘뿐.
‘성좌를 우선하기로 해 바로 탑에 들어왔지만, 이 둘에겐 지구의 일을 맡겨도 괜찮을 거다.’
지구를 방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나가 정말로 신시아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다면 지구상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운신의 폭이 넓어지면 다른 이들도 지구로 부를 수 있으리라.
“밥값을 뽑아내려면 밥을 최대한 많이 먹여둬야겠지?”
“발상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건 아무리 봐도 동료가 아니라 가축 같은데요?”
“쥐새끼 같은 놈들을 잡기 위해 키웠으니 고양이인 걸로 하지.”
“키야악!”
“앙칼지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