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88화 (88/170)

<88>

산달폰은 눈치가 빠른 천사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성좌의 혈족이라고 해도 결국 천사는 성좌에게 봉사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태생부터가 고위천사라고 해도 천사는 천사.

전쟁 중인 상황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선 정치적인 감각도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마도문명이 개화하지 않은 촌구석 행성의 탑에 발령받아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어스름에서 성진을 발견한 순간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특이점……!’

적룡장군을 대동하고 나타난 이상 저게 가짜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특이점이 지구에 나타난 거라면 모든 문제가 설명됐다.

‘그 마귀 같은 새끼가 왜!’

특이점 주성진에 대한 것은 케루빔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일이었다.

당장 그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인 여덟 왕의 군대.

그 실질적인 구심점이자, 최대전력이 바로 특이점이었으니 성진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천사들 사이에서 특이점에 대한 소문은 그 내용이 불분명하게 퍼져 있었다.

예컨대 죄를 지은 천사가 죽으면 사후에 특이점이 다스리는 지옥에 떨어진다든가.

특이점의 눈물은 필멸자를 신성존재로 만들 수 있으나, 특이점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든가.

특이점이 전장에 홀로 있으면 그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홀로 상대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질병과 쇠약의 성좌가 권능이 담긴 독침으로 특이점을 찔렀더니 오히려 자신이 중독되어 죽었다고도 하지.’

그 외에도 수많은 소문들이 있었으나 사실이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특이점을 만나고 살아 돌아온 성좌나 천사가 아무도 없었기에.

‘특이점을 마주친 이상 살아날 길은 없다.’

때문에 산달폰은 뉴욕 상공에 파멸의 오브를 뿌리고 도망쳤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저 끔찍한 인간에 대한 공포로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 지옥 같은 행성에서 빠져나가야 해!’

하지만 도망치고 싶어도 그냥 도망칠 순 없었다.

용들은 이미 지구 전체에 보이지 않는 불의 장막을 둘러뒀으니까.

때문에 산달폰은 곧바로 도망치는 대신 다시 한번 기척을 숨기며 지구 반대편으로 향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최고위 천사인 그녀의 은신은 용들에게도 유효했다.

금방 들키더라도 당장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산달폰은 숨어 있기를 택했다.

인도양 한복판.

무작정 도망쳐온 그녀는 잠수하기 직전 무지막지한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거대한 빛의 기둥이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검강.

그녀의 육감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저 거대한 검강은 행성 반대편에서부터 지구를 통째로 투과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창과 같은 장병기를 다룰 때는 손목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창끝에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채찍은 일반인의 힘으로 휘둘러도 끝부분이 음속을 넘는다.

그렇다면 행성 반대편에서 날리는 검격은?

산달폰이 빛의 기둥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베어졌다.

-……!!!

산달폰의 육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했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은 검강에 베인 뒤에도 멀쩡히 남아 있었다.

신성광휘를 닮은 이 특수한 검기라면 영혼까지 베어 버릴 수 있을 텐데도.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을 때, 성진은 이미 그녀의 눈앞에 도달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악마가 그곳에 있었다.

* * *

성진의 검강이 지구를 가르고 지나갈 때 남태수는 하필 그 궤적 위에 있었다.

“끼야악 시…… 벌? 뭐야? 괜찮네?”

곧게 뻗어 나가는 게 아니라 방출되듯 뿜어진 검강은 끝으로 갈수록 넓어졌다.

덕분에 남태수가 서 있던 곳에서는 못해도 제주도만한 너비의 빛의 기둥이 사방을 뒤덮듯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방금 그거, 설마 거, 검긴가?”

성진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믿기 힘든 일이었다.

마법을 배워본 남태수는 마력을 완벽하게 원하는 대로 다루는 것이, 그것도 저만한 규모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검기가 마법보다 쉬운지 어려운지는 몰라도, 저쯤 되면 그냥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 뭐…… 성진 씨가 인간이 아니긴 하지. 여러 가지 의미로.”

성좌들마저 특이점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닌가.

지금까지 성진의 힘을 곁에서 봐오던 남태수는 항상 하던 대로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아니었다.

“허억!”

“우웨에에엑!”

마력을 느끼는 육감이 없어도, 육체는 마력에 영향을 받는다.

대량의 마력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체내의 마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일반 플레이어들은 구토를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일반인이라면 오히려 괜찮았겠지만, 플레이어라서 문제였다.

플레이어들은 마력을 전혀 통제할 수 없으면서도 많은 마력을 몸 안에 담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비정상적인 몸 상태는 성진의 검강이 그들을 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강렬한 멀미와 토악질을 선사했다.

“끄으으으으……!”

물론 남태수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아잇, 엄살들이 왜 이리 심해! 빨리 안 일어나?”

그의 눈에는 플레이어들이 엄살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실제로 남태수 혼자서 못 믿겠다거나 여기가 더 좋다고 버티는 이들을 다 때려눕히고 끌고 온 것이니 그에겐 이들이 약골 같아 보이기도 했다.

‘베르나데트도 이것보단 강했는데.’

베르나데트를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인층이었으니 100레벨이나 되는 플레이어들이 그 정도 실력이라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약하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건 그냥 남태수의 비교기준이 요정기사나 명예의 전당 챔피언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자자, 정신들 차리고. 다시 너부터 앉은 번호 시작!”

“하, 하나!”

남태수는 명단을 체크하며 지구 각지에 떨어져 있던 플레이어들을 모았다.

다행히 적룡 루프레시아가 도와준 덕분에 세계 일주에 80일씩 걸리는 일은 없었다.

[숙제는 다 했니?]

“숙제? 아 예, 성진 씨가 부탁한 일은 다 했어요.”

[그럼 이제 이빨 닦고 코 자자? 착한 드래곤이 되려면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길어야 해요.]

“응애.”

이놈의 아가취급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으나 사령술사라고 핍박받던 것에 비하면 차라리 나았다.

플레이어들이 보기엔 그냥 미친놈이 따로 없었지만.

‘탑에 등장하는 용들은 못해도 300레벨 아니던가?’

‘저 새끼는 뭔데 용을 데리고 다니는 거야?’

‘애초에 사령술사로 100레벨은 어떻게 찍은 거야? 저 쓰레기 직업으로 솔플이 돼?’

미친놈도 정도가 있다.

용을 데리고 다니면서 응애응애 거리는 100레벨 사령술사는 잘 봐줘도 기인열전.

어지간하면 그것이 알고 싶다에나 나올 인간이었다.

백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으나 이것만은 모두 똑같았다.

‘이 인간은 미친놈이다. 세계정부에서 괜히 공개수배를 한 게 아냐.’

그런 생각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태수는 이 자상한 드래곤의 비위를 맞추는데 열심이었다.

“아 이것만 하고 잘게요.”

[약속이다?]

‘쯧쯧, 완전히 미쳤군.’

남태수의 악명에 변태성향이 추가되는 날이었다.

* * *

다나가 어스름의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은 라인 강 유역에서의 일이었다.

강을 통해 침투해오는 해양 몬스터를 막고 있던 그녀의 그림자는 다나의 등장에 크게 놀라며 그녀를 맞이했다.

정확히는 대뜸 칼부터 꽂으려 들었다.

“도플갱언가?”

현실에서 온 자신을 그냥 몬스터쯤으로 여기고 공격한 그림자는 이내 다나의 손에 제압당했다.

실력이야 그렇다 쳐도 성진의 카르마에 의해 강화된 것은 현실의 다나뿐이었기에 전투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크윽, 무슨 도플갱어가 이렇게……!”

“도플갱어 아냐.”

“하! 말은 그렇겠지! 자기가 도플갱어라고 밝히는 도플갱어가 어디 있겠어?”

그야 그렇지만 왠지 말하는 것이 아니꼬웠으므로 다나는 자신의 그림자에게 초인적인 힘으로 딱밤을 먹였다.

딱콩!

“으겍!”

5층에서 성진을 처음 만난 자신이 NPC의 해방을 방해했을 때 그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때 왜 대뜸 사람을 집어던진 건지 알 것도 같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자니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러니 성진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세계정부를 무너뜨리는 대신 그냥 바로 성좌들이나 족치려했던 것이리라.

“언니는 어디 있어?”

“뭐?”

“나는 언니를 만나러 왔어. 프랑스로 망명했다고 들었는데 같이 있던 거 아냐?”

그녀의 말에 그림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 개 같은 새끼야! 도플갱어면 다 알 거 아냐! 언니는 죽었어! 너희 몬스터들이 죽였잖아!”

“……!”

발작적으로 외치는 그 모습에 다나는 흠칫 놀라는 한편 의아함을 느꼈다.

“언니가 죽었다고?”

신시아는 성좌에게 사도로 선택받을 정도의 강자였다.

성좌의 권능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플레이어 중에서 손꼽힐 실력자라는 뜻.

어스름의 신시아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 언니의 그림자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이곳의 지구는 몬스터가 나타나서 위험해졌다고 해도 언니 정도 되는 실력자가 당할 정도는 아닐 텐데?’

애초에 신시아는 위험을 자처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스름에서도 해양 몬스터로 영국이 위험해지자 아예 내륙으로 망명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세히 설명해봐.”

분해도 목에 칼이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다.

다나의 말에 그림자는 이를 갈며 옛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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