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86화 (86/170)

<86>

적룡장군의 명령을 받은 용들은 지구를 완전히 격리시켰다.

지구 안에 있을 천사가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또한 용들의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고 괜한 파리가 지구에 끼어들지 못하게.

전 세계의 상공은 어느새 용들의 차지가 되었고, 바다에 이어 하늘까지 잃어버린 인간들은 절망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천사의 영혼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진 구분하기 힘들구나.”

“찾는 데 오래 걸리나?”

사룡왕은 성진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원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천사를 불러낼 수 있다. 지상을 모두 불태운다면 말이니라.”

성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현재 이곳에는 100층에 있다가 같이 어스름에 끌려온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용들이 지상을 불태우기 시작한다면 그들도 모두 죽어나가리라.

벌레 하나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순 없었다.

“이만한 수의 용들을 동원하고 있다면 전 지구를 일일이 뒤져보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인간들에겐 손대지 말고 천사만 수색해라.”

병을 치료하기보단 병의 원인을 싹 다 조져놓겠다는 마인드로 사도를 방치하고 탑으로 직행했던 성진이었다.

그런 성진이 이제 와서 지구 돌아가는 꼴을 알아보겠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었으나, 이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침묵과 광기 외에도 어떤 성좌들이 지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성좌들은 탑의 침략이 끝날 때까지 지구상에 직접 강림하지 못하거나, 강림하더라도 성진이 힘을 버린 것처럼 큰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 정도라면 30층에서 불과 광채의 눈을 날려 버렸던 것처럼 성진이 제어할 수 있었다.

운 좋게 1층부터 천사를 잡고 시작한 덕에 기대했던 것보단 힘의 회복이 빨랐으니까.

‘하지만 그중 근원에 닿은 성좌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필멸의 굴레를 초월해 신성에 이른 영혼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다.

신성존재들이 서로 전공만 다른 게 아니라 상하관계도 나뉜다는 것.

천상의 성좌 중에는 태곳적부터 살아온 절대적인 존재들도 있었다.

왕을 죽인 절대좌들.

이들은 성진이 지구로 넘어오기 전의 모든 힘을 회복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지구의 탑이 티타니아나 황금룬처럼 성좌들에게도 귀중한 보물들을 보관해둔 곳인 이상 절대좌가 끼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힘을 회복하고, 탑을 올라, 성좌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린다.

그 과정에서 적의 강함 따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시절에도 똑같이 성좌를 몰아내기 위해 싸웠으니까.

“그럼 나는 다른 놈들이 수작질을 부리지 못하도록 바깥을 보고 있겠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적룡장군에게 말하게나.”

사룡왕은 그렇게 말하며 떠나갔다.

당장 볼 일은 다 끝났으니 돌아간다는 투였지만, 이어서 들어온 사람을 보면 이유는 명확했다.

“성진 씨!”

사룡왕과 교차하듯 들어온 남태수는 현실의 사룡왕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어스름의 사룡왕으로서는 성진과의 비밀계약이 들키기 싫을 테니 현실의 자신이 껄끄러우리라.

“들으셨어요? 다나가 프랑스에 가겠다고 한 거!”

“어스름에 있는 제 언니를 만나보겠다고 그러는 거라면 이미 알고 있다.”

“괜찮은 거 맞아요? 걔, 제 언니랑 사이가 그 모양인데요? 아무리 이쪽에 있을 언니는 사도가 아니라고 해도 싸움이 벌어지면 난리가 날 텐데…….”

“용들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위험할 건 없을 거 아니냐. 어차피 부딪힐 거라면 현실에서 만나기 전에 이곳에서 마음을 다잡는 게 좋겠지.”

오히려 기회라고도 할 수 있었다.

실력은 떨어져도 사룡왕의 사도로서 강력한 카르마를 가진 남태수와 달리, 다나는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도 카르마가 부족했으니까.

어스름에서 들고 나갈 수 있는 보상에는 한계가 있지만, 얻을 수 있는 카르마에는 한계가 없었다.

“다나는 제 언니와의 대립이 카르마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니 그 만남에서 나름대로 얻어가는 것들이 있겠지.”

“으으음…… 어라? 폐하? 잠깐만요.”

남태수는 자신의 스킬창에 떠오른 사룡왕의 말을 성진에게 전해주었다.

[어스름에 들어와 잠깐 못 본 사이에 새로운 신화급 카르마를 손에 넣었군? 결국 성녀를 죽인 모양이지?]

성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오래전부터 자기네 스승을 해방시켜주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왜? 불만이라도 있나?”

[어차피 영혼도 없는 꿈속 세상 따위. 여에게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니라. 오히려 그대가 강력한 카르마를 손에 넣었으니 이득이라고 해야겠지. 다만 그대가 이 세계의 사룡왕과 함께 다니는 건 마음에 안 든다.]

뭔가 눈치챈 건가 생각했더니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대는 여의 것이니라. 아무리 여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라고 해도 다른 년과 붙어먹는 건 심기가 불편해지는군.]

자기 자신에게도 질투하는 사룡왕의 모습.

욕심 많은 용들 사이에서도 정점에 이른 용왕다운 태도였다.

어스름의 사룡왕이 모든 시간대의 성진을 독점한 것처럼, 현실의 사룡왕도 생각하는 것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어스름과 달리 현실의 성진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보다 더 성장할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해 억압하지 않을 뿐.

사룡왕의 본질은 성진을 꼭두각시로 만들어서라도 손에 넣으려는 또 다른 신성존재에 불과했다.

‘이 녀석에게 지구 따위는 그저 나를 움직일 수 있는 미끼에 불과하겠지.’

사룡왕은 지구 태생도 아니고 인간 종족도 아니다.

필요하다면 외계인과 외계행성에 불과한 지구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으리라.

선을 긋지 못하고 감정에 매몰되면 일을 그르친다.

이미 온갖 세계에서 별별일을 다 겪어본 성진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애초에 같은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갈리는 게 당연한 일. 다른 종족한테 멋대로 무언가를 해주길 기대하는 것은 그냥 무책임한 일이지.’

남들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인 이상, 막연한 기대에 모든 걸 맡기고 손을 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침 성진은 남태수에게도 시킬 일이 있었다.

“온 김에 일을 하나 맡기도록 하지.”

“네? 저한테요?”

“이곳에서 플레이어들을 찾아내 한곳에 모아둬라.”

성녀는 스테이지의 100층에 있던 모든 이들을 어스름으로 끌고 들어왔다.

개중 수도회 NPC들은 어차피 수도회에 떨어져서 마리아와 테레사가 관리할 수 있었다.

반면 당시 100층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어스름의 지구상에 떨어져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있으리라.

“허튼짓 못하게 전부 잡아들여.”

“제 능력으로 가능할까요? 무르무르도 없는데.”

단순히 무르무르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타이탄 코어도 없고, 리치의 영혼석에 담아두었던 마티아스 등의 다른 영혼들도 없었다.

즉, 지금의 남태수가 가진 건 100레벨 플레이어로서의 능력과, 직접 배운 마법들 뿐.

“못 할 것 같나? 진짜로?”

“……생각해보니 될 것도 같고?”

협박에 굴한 건 아니었다.

남태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다른 100레벨 플레이어들보다 강했으니까.

‘성진 씨의 카르마 효과도 받고 있고. 어스름의 증표 덕분에 나는 이미 100레벨 클리어 상태라 각성기도 찍어뒀고.’

타이탄 코어가 없으면 자신이 가진 신화급 카르마도 제대로 활용하기 힘들긴 했지만, 그걸 다 제외하고서라도 남태수는 꽤 강한 상태였다.

“해보죠, 뭐.”

“플레이어를 찾고 이동하는 건 이쪽이 도와줄 거다.”

[안녕!]

성진의 말에 바깥에 있던 비행대장 루프레시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태수가 어스름에서 처음 만난 이 드래곤은 적룡장군의 명에 따라 아예 남태수 담당이 되어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남태수를 보낸 후, 성진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새롭게 신화급 카르마를 얻어 초월 단계를 하나 회복했지만, 아직 초월 특성을 선택하진 않은 상태였다.

“마력적성을 초월하겠다.”

결정한 순간, 성진의 육체가 환골탈태를 이루기 위한 준비상태가 되었다.

이때 추가재료를 넣는다면 좀 더 극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에게는 재료도 있었다.

“이만한 양의 천사의 피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 * *

어스름 수도회가 여덟 왕의 연합에 참여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그러나 테레사가 성진과 함께한 것은 그보다 오래되었다.

사룡왕이 버려진 탑에서 찾아낸 성진을 훈련시킨 것이 바로 어스름 수도회였기 때문.

때문에 그녀는 성진의 과거를 아는 이들 중 하나였다.

“혈마술…… 인가요.”

적룡장군의 대둥지와 연결된 게이트에서는 아직도 천사의 피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주둔중인 적룡들이 그 속에서 연어 같이 생긴 몬스터들만 골라먹는 동안, 성진은 그 안에 자신의 피를 섞었다.

“아무리 성자님이라도 순수한 인간의 몸으로 흡혈왕의 신성마법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 텐데요.”

“확실히 별로긴 하지. 혈마술은 결국 피를 이용하는 기술이니.”

후천적으로 변이가 가능한 종족.

그중에서도 웨어울프 같은 이들이 강인한 육체를 무기로 삼는다면, 흡혈귀들은 피에 마력을 담는 마법 특화 종족이었다.

흡혈귀의 혈마술은 딱히 종족이 흡혈귀가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게 특징이었는데, 사실 효율이 좋지는 않았다.

“내 몸에 담긴 피는 몇 리터 되지 않겠지.”

흡혈귀들은 자신의 몸 안에 무한한 양의 피를 담아둘 수 있는 종족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혈마술을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반면 다른 종족들은 혈마술을 배운다고 딱히 피가 늘어나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산 제물 등을 이용해 남의 피를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

아무래도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기 힘든지라, 혈마술은 사령술과 마찬가지로 배척받는 편이었다.

“게다가 내 피를 다 쓸 수도 없고.”

성진의 초인적인 육체는 피를 모두 잃은 상태로도 전투가 가능했다.

다만 그도 인간인 이상 피가 빠지면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혈마술로 얻는 이득보다 페널티가 더 클 수도 있는 것.

그러나 모든 흡혈귀의 시조, 흡혈왕의 혈청을 받은 성진의 혈마술은 달랐다.

“일어나라.”

성진의 말에 그의 피를 받아들인 붉은 바다가 꿈틀거렸다.

그의 혈마술은 자신의 피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피마저 조종하는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특이점…….”

테레사는 그 모습을 보며 성좌마저 두려움에 떨게 한 그 이름을 떠올렸다.

한평생 무예를 단련해온 그녀는 초월을 이루어 신성조차 노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성진은 하나에만 매진해도 겨우 초월을 이룰 수 있을까 말까한 것들을 모두 극한까지 익혔다.

괜히 여덟 왕들이 자기네 종족을 내버려 두고 인간인 성진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닌 것.

“이 피를 전부 환골탈태의 재료로 사용하겠다.”

적룡들은 이 천사의 피를 이용해 자신들의 대둥지를 가리고 있었다.

천 단위의 용들이 모여 있어도 은폐가 가능할 정도의 마력을 담은 피.

흡수효율이 반만 나와도 앞으로 마력 부족할 일은 없으리라.

“호법을 부탁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