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85화 (85/170)

<85>

성녀의 장례의식이 끝난 후, 성진이 향한 곳은 어스름의 지구였다.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우리와 함께 들어온 그 천사도 처리해둬야겠지.”

그 천사도 성녀의 힘으로 어스름에 들어온 이상 아직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 놈을 어스름에 남겨뒀다간 훗날 성좌들을 이곳에 밀어 넣었을 때, 놈들이 그놈을 통해 다시 현실로 기어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30년이나 탑 관리는 안 하고 지구를 돌아다닌 천사 아니랄까 봐 진짜 지구에 떨어진 게 맞는 모양이네요. 반응이 왔어요.

요정향의 기능을 장악한 티타니아는 순식간에 어스름에서 천사의 위치를 잡아냈다.

“오랜만에 고향 좀 보겠군.”

이미 탑에 들어오기 위해 현실의 지구를 들렀던 성진이었지만, 딱히 그곳에서 고향에 돌아온 기분을 낸 적은 없었다.

남미의 작은 마을에 떨어져 TV로 세상 돌아가는 꼴을 파악하고 나선 그대로 태평양 한복판의 탑까지 해저를 걸어서 이동했으니까.

그리하여 어스름에서 먼저 찾게 된 현대의 지구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개판이었다.

* * *

영국인 맥코이는 영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였다.

그리고 그 말은 이곳에선 그가 법이라는 뜻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작전을 통제한다.”

그 말에 사령부에 있던 군인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군인도 아닌, 하다못해 군사교육도 안 받은 놈이 군대를 지휘하겠다니.

하지만 그 말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 이래, 지구의 바다에는 계속해서 해양 몬스터들이 쌓여갔으니까.

섬나라인 영국은 물류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바다가 막힌 와중에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건 항공수송으로 모든 걸 때울 수 있는 미국뿐.

비싼 항공유를 쏟아부어 가며 수억 수천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건 그 미친 나라뿐이었다.

심지어 그 미국조차 캐나다와 멕시코가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영국은 완전한 섬.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쟁방식이 필요했다.

헌터.

총알과 기름을 먹지 않는 이들은 영국의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어쩌다 저딴 새끼들이 튀어나와선…….’

군인들은 맥코이의 월권행위를 바라보며 치를 떨었지만 그들은 알 수 없었다.

1. 어스름에는 성좌들의 연합인 천상이 없었으며.

2. 따라서 어스름의 지구에는 사도와 세계정부도 없었고.

3. 그런 와중에 현실의 지구에서 플레이어들이 생겨나니 이곳에서도 초인의 힘을 가진 헌터들이 나타났음을.

헌터들의 존재는 마력이 존재하지 않던 지구에 마력을 퍼뜨렸고, 이것이 어스름에 살던 수많은 존재들에 지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어스름의 지구에서는 툭하면 게이트가 열리는 헌터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즉, 어스름에 한해서는 영웅이라 불리는 헌터들이 오히려 게이트라는 재해를 불러오는 원인이나 다름없었다.

“비행 몬스터 제거 완료. 폭격 편대 진입합니다.”

“1차 폭격 완료. A랭크 이상의 몬스터 개체 수 확인. 40 이상입니다.”

“크크, 많이도 나왔구만. 그럼 먼저 놈들 힘부터 빼놓자고. 하급 헌터들 투입해.”

“A랭크 몬스터가 이만큼이나 모여 있는데 하급 헌터들을 투입했다간 피해가…….”

“그럼 상위 헌터들을 갈아 넣으리? 상위 헌터들은 나라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데 이런 데서 갈리기라도 했다간? 나라 망하려고?”

하위 헌터들을 소모하는 것은 미래를 갈아 버리는 행위였지만 아무도 맥코이를 막을 순 없었다.

S랭크 헌터는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S랭크 헌터가 날뛰기라도 하면 지금의 영국은 끝이었다.

“몬스터 토벌 보고! A랭크 격파!”

“뭐? 하위 헌터 새끼들이 그걸 어떻게 잡아? 폭격에 반병신 되어 있던 놈인가?”

“하나가 아닙니다! 최소 20마리 이상 격파……!”

A랭크 몬스터는 시가지에 떨어뜨려 놓으면 도시 하나를 조져놓을 수 있는 놈들이었다.

숨어서 하수도, 상수도에 알을 까는 놈이든 맷집으로 버티며 건물을 도미노처럼 밀고 다니는 놈이든 하나하나가 자연재해급인 것.

그런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이렇게 우르르 토벌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됐다 시발. 그냥 내가 직접 보고 말지.”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지닌 맥코이라면 사령부에서도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저놈들.”

막사 밖으로 나온 맥코이가 발견한 것은 전장 한복판에 서 있는 세 사람.

“동양인 하나에 수녀? 사제?”

전장에서 무슨 저딴 복장으로 다니는 건진 둘째 치고,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동양인 헌터라니.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인가?’

그렇게 인식하고 나니 분노가 치솟았다.

잡기 힘든 해양 몬스터와 달리 지상에 열린 게이트는 그 나라의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헌터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마법장비는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어지는데다, 섭취 시 스탯을 향상시켜주는 마석도 나왔으니까.

“……이 새끼들이 어딜 스틸을!”

맥코이는 분노와 함께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3 대 1의 구도였지만 두려워해야 하는 건 상대였다.

S랭크 헌터는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전력.

당연한 말이지만 맥코이는 해외의 S랭크 헌터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자기 기억에 없는 헌터라는 건 상대가 S랭크가 아니라는 뜻.

광전사의 힘이 담긴 대검이 상대의 머리 위로 내리 찍혔다.

상대는 그의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 듯, 닿기 직전까지도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맞았음을 의심치 않았던 그의 강타는 성진의 두 손가락에 잡혔다.

화아악!

성진에게 붙잡힌 맥코이가 그 자리에서 정지한 가운데, 돌진으로 생긴 바람이 뒤늦게 그를 뒤따랐다.

전함조차 일격에 갈라 버릴 참격이었으나 그걸 받아낸 여파는 바람이 끝이었다.

“스틸이라.”

성진은 붙잡은 검날 너머로 맥코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지가지 하는군. 세상이 이 꼴인데 따지는 게 고작 그건가?”

“어, 어떻게 영국 최강인 내 검을……!”

“영국 최강? 신시아 스펜서가 아니라 네가?”

성진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나의 언니가 사도로 뽑힌 점이나, 다나의 혈연인 점을 생각하면 신시아 스펜서도 상당한 수준의 재능을 타고났을 게 분명했다.

어스름의 역사가 아무리 현실과 달라도 모든 것이 현실을 반영해 만들어짐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곳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여야 했다.

“하! 그년의 개였나? 해양봉쇄 초기에 프랑스로 튄 년이 무슨!”

“그랬나? 여기서도 박쥐 같은 건 똑같은가 보군.”

성진은 손가락을 비틀어 맥코이의 대검을 부러뜨렸다.

그러자 맥코이는 미련 없이 검을 버리고 뒤로 물러나 근처의 헌터에게서 새로운 검을 빼앗았다.

“남의 나라에서 무력행사라니. 여긴 우리 게이트다.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꺼져라.”

성진은 그 말에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좋은 말은 개뿔이 시작부터 칼을 들이대 놓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웃겼지만, 코웃음 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 게이트. 네놈 능력으로 닫을 수는 있고?”

맥코이는 그 말에 슬쩍 그리 높지 않은 허공에 생성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A랭크 몬스터가 좀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게이트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우우웅!

한차례 진동과 함께 게이트에서 붉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는 이내 폭포로 변해 사방을 덮어갔다.

-모든 헌터들은 지금 당장 그곳에서 이탈하라!

“퇴각이라니! 저 새끼들 하는 말 못 들었어? 저놈들이 이 이상 현상을 일으킨 걸지도 모르는데 그냥 물러나라고?”

-붉은 폭포 너머로 S랭크, 아니 오버랭크급 기척이 수백 개씩 잡히고 있단 말이다!

“뭐?”

랭크제도를 넘어 아예 측정이 불가능한 존재를 통틀어 일컫길 오버랭크.

당연한 말이지만 오버랭크라는 존재는 영국 최강의 S랭크 헌터인 맥코이를 S랭크 따위로 여길 괴물들이었다.

“오류겠지! 오버랭크가 수백이라니 말이 돼? 오버랭크라면 한 마리 잡겠다고 미국이 핵 샤워를 쏟아 붓고도 못 막아서 결국 러시아와 중국이 쌍으로 날아간 괴물이잖아!”

그런 괴물이 수백이나 있을 리 없었다.

있어선 안 됐다.

그 말은 전 인류가 끝장났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으므로.

하지만 이어진 광경은 그 무전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푸화아악!

붉은 폭포를 가르고 그보다 더 붉은 비늘로 뒤덮인 용들이 날아올랐다.

하나가.

둘이.

여덟이, 스물이, 수백 마리가.

끝도 없이 이어진 용들의 퍼레이드가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마지막으로 황금빛 후광을 두른 가장 큰 용이 날아오르자 모두가 죽음을 직감했다.

일천의 적룡들 속에서 신성한 후광과 불꽃을 두른 거룡이 날개를 펼쳤다.

찬란히 빛나는 종말은 고고하게 창공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룡군단의 사천왕, 적룡장군이 발하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오히려 신성광휘를 마주하고도 헌터나 군인들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용들이 그들을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성진은 손에 꼽는 그 사람들 중 하나로서, 하늘을 향해 담담히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얼른 내려와라.”

직후, 태양 아래로 새까만 무언가가 눈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읏차, 으아아아 죽는 줄 알았네. 이상한데 떨어져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아니 왜 나는 지구인인데 그런데 떨어지냐고.”

“으윽, 저놈의 피 냄새. 멀미나…….”

다나와 남태수는 성진을 만나자마자 긴장이 탁 풀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로 투덜거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낀 덕분이었다.

“네놈이야 그럴만했지. 다나까지 그쪽으로 딸려간 것은 의외였다만.”

그래도 아예 성진이랑 딱 붙어 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서 용들과 함께 있는 것만큼 안전한 것은 드물었다.

덕분에 성진은 사룡왕에게서 남태수가 적룡장군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 느긋하게 자기 할 일부터 했다.

아무리 성진이 강하다고 해도 어스름에선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차라리 용들에게 맡겨놓는 편이 안전했으니까.

“다나.”

성진은 다나와 합류한 김에 일단 검부터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이건…… 어스름 수도회의 성검이잖아요?”

“성녀의 영혼이 떠났으니 이젠 그냥 검일 뿐이다. 그래도 탑의 기준으로 봤을 때 레전더리급 검일 테니 네가 써라.”

“예? 그래도 되는 거예요?”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리아와 테레사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미 그녀들은 성진과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네, 저희는 검을 쓰지 않으니까요.”

“스승님도 천상과의 전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거야.”

어스름의 성검은 수백 년간 성녀의 영혼을 담고 있던 검이었다.

순수하게 검으로서도 레전더리급인데, 그 안에 담긴 카르마를 생각하면 남태수의 타이탄 코어 못지않은 보물 중의 보물.

검에 실린 카르마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다나도 사도나 천사와의 전투에서 경쟁력을 지닐 수 있으리라.

“맞다, 성진 씨. 저 무르무르랑 다른 곳에 떨어져서 무르무르도 찾아야 하는데요.”

“그 녀석은 네게 아이템으로 귀속되어 있으니 돌아갈 때 알아서 복귀할 거다. 신경 쓰지 마라.”

“진짜 그래도 돼요? 이 동네 막 성좌들도 돌아다닌다던데…….”

“타이탄 코어에 깃들어있는 이상 성좌라도 무르무르를 쉽게 잡진 못할 거다.”

무르무르는 원래도 단독으로 천사과 싸우던 리치다.

마리아나 테레사에 준하는 녀석이 타이탄 육체까지 손에 넣었으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일은 없으리라.

남태수를 확인한 성진은 맥코이를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게이트 닫을 수 있다고?”

영국 최강의 헌터는 용들의 기운에 짓눌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바지춤을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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