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84화 (84/170)

<84>

어스름의 모든 존재는 현실의 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이들이 현실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니었다.

특히 사룡왕이 그랬다.

“이쪽이니라.”

차원간계면에 만들어진 용왕의 둥지.

수많은 차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용왕의 수집품이 가득한 그 세계에 들어서자 무수한 그림자 주성진이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버려진 탑에서 337편의 생존자들과 함께하던 어린 성진부터, 지구로 넘어가기 직전의 성진까지.

모든 성진들은 자아를 잃고 완전히 사룡왕에게 충성하는 수집품이 되어 있었다.

“악취미로군.”

“너무 나쁘게만은 보지 말아 줬으면 하니라. 이들은 여가 거둔 승리의 증명이자, 트로피이니.”

“트로피?”

사룡왕은 성진의 물음에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이곳에 수많은 그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어스름에는 수많은 ‘사룡왕’ 또한 존재했지.”

“이젠 아니라는 건가.”

“여는 어스름에서 유일한 사룡왕이다.”

탐욕.

욕심 많은 태고의 고룡은 자신의 것을 남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자기 자신일지라도.

“과연. 어쩐지 반응이 하나뿐이더라니.”

“그렇게 유일한 존재가 되어 ‘사룡왕들’이 가진 모든 것을 손에 넣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있느니라.”

“영혼 말인가.”

사룡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세상에는 영혼이라는 게 없으니.”

어스름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종속된 세상.

이곳에는 영혼이 없으며, 그림자들이 현실의 존재를 붙잡더라도 그 영혼에 간섭할 수 없었다.

어스름이 아무리 놀라운 자연현상이라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모두 원본이 아닌 가짜였다.

마치 탑의 스테이지처럼.

‘아니, 정확히는 성좌들이 어스름을 보고 탑을 만들어낸 거라고 해야겠지.’

“웃기지 않는가? 영혼을 다루는 사령술사들의 왕이자 죽음의 어머니라 불리는 여에게 벌레 한 마리의 영혼조차 없다니.”

사룡왕은 검은 관 앞에서 멈췄다.

“이것은 여가 만든 영혼봉인장치다. 도구의 힘을 빌려도 우리는 현실의 영혼을 붙잡아둘 수 없었지만, 현실의 존재인 그대가 직접 영혼을 잡아온다면 그걸 유지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녀는 성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약이다! 내게 영혼을 가져다준다면 얼마든지 그대에게 협력해주지!”

성진은 그 손을 맞잡았다.

“계약 성립이다.”

[<사룡왕의 계약자(신화)>를 획득합니다.]

[<사룡왕의 계약자(신화)>가 이미 존재합니다.]

[두 카르마가 공명합니다.]

[초월에 필요한 카르마가 부족합니다.]

[계약을 완수하여 신화급 카르마를 초월시키십시오.]

“흠?”

생각지도 못한 현상에 성진은 눈을 크게 떴다.

‘어스름의 사룡왕과 계약한 것이 기존의 카르마와 같은 것으로 인식된 건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걸 알았다고 해도 똑같은 카르마를 두 번 얻는 게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신화급 카르마의 초월이라니.’

신화급 위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근원급 뿐.

이는 계약을 완수하는 것이 곧 그의 목표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일이 될 거라는 뜻이었다.

“잘 됐군.”

“무슨 일인가?”

성진은 의문을 표하는 그림자 사룡왕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좋군. 유일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카르마가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니라. 다만 거기에 근원급 카르마가 필요한 것은 확정적인 일이겠지.”

근원급 카르마를 손에 넣을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득이었다.

우주의 근원에 닿는 이 힘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할 열쇠니까.

게다가 마침 초월의 조건은 어차피 성진이 하려고 했던 일이기도 했다.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편하군.’

성진은 사룡왕에게서 검은 관을 건네받았다.

“그러면 바로 그 천사를 잡으러 갈 생각인가?”

“아니,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할 일?”

“수도회 녀석들을 만난 김에 못다 한 일을 끝내야지.”

* * *

마리아와 테레사는 어스름 내에서도 현실과 똑같이 어스름 수도원에 떨어졌다.

애초에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수도회 사람이, 그것도 성녀를 직접 쥐고 있었던 사람이 이런 위치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성진은 손쉽게 그 둘을 찾아낼 수 있었다.

“좀 늦었다.”

성진이 공간을 찢고 나타났을 때, 그곳에 있던 수도자들은 성진보다도 그의 목에 매달려 있는 존재를 보고 놀랐다.

“……사룡왕?”

어스름의 주성진들은 특이점이 되지 못하고 모두 사룡왕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여덟 왕의 연합 따윈 없다.

마찬가지로 성좌들도 천상에 모여 손발을 맞추는 대신 모두가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따로 놀았다.

모든 세력이 제각기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각축장.

천상의 위협과는 또 다른 방식의 전쟁터.

이런 곳에서 신성존재를 마주하는 건 보통 좋은 일이 아니었다.

“왜 사룡왕을 매달고 다니는 거예요……?”

“걷기 귀찮다더군. 걱정 마라. 그녀는 내게 협력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드래곤이 공짜로 협력해 주진 않았을 텐데요.”

“괜찮다. 대가를 내는 것은 내가 아니니.”

이곳의 사룡왕이 손에 넣지 못한 것은 영혼 뿐.

그리고 영혼이라면 현실에 넘쳐날 정도로 많이 있었다.

성좌라는 이름의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영혼들이.

“그보다 우리와 함께 들어온 100층의 관리자는 이쪽에 없었나?”

“응. 아무래도 천상이나 지구로 떨어진 모양이야.”

“그렇다면 당장은 신경 쓸 것 없겠군. 일단은 성녀를 만나겠다.”

성진은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현실과 달리 어스름의 산정상에 있는 것은 검이 아닌 거대한 십자가.

성녀의 육체가 담긴 관이었다.

성진은 마리아에게서 성검을 건네받았다.

[당신도 내 몸이 목적이었던 건가요? 하여간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조용히 해라.”

깡!

성진은 성녀의 입에 시동이 걸리기 전에 그녀를 근처의 바위에 두들겨 조용히 시켰다.

[너무해에에…… 당신이 검이 되어보긴 했어요? 이러고 있으면 심심하다구요!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단 말이야.]

“하여간 에고소드들이란.”

생물의 영혼을 도구에 박아놓으면 결과는 보통 둘 중 하나였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거나, 심심함을 풀기 위해 끝없이 떠들거나.

[제가 어디 다른 에고소드랑 같나요? 걔들은 가끔 ‘일’이라도 하지. 저는 뭘 베어볼 일도 없다니까요?]

“그야 뭐만 하려고 했다하면 네가 비명을 질러대니 그렇지. 애초에 재질을 생각하면 좀 후빈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을 텐데.”

[당신이 남의 살 속에 쑤셔지는 느낌을 알아요? 징그럽단 말이에요.]

애초에 성검은 어스름의 문을 열기 위한 귀중한 열쇠이기도 했으므로, 실제로는 검보다는 제사도구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말하자면 제사용 청동검이나 칠지도에 가까운 물건인 셈.

태생적으로 다른 에고소드에 비해 심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란 뜻이었다.

[그래서, 저를 깨운 이유는 뭐죠? 탑 안에서 깨웠다간 성좌들에게 들킬 수도 있을 텐데?]

성진은 100층에서 성검의 존재를 확인하고도 어스름으로 넘어오기 직전까지 그녀를 깨우지 않고 있었다.

일단 손을 대면 그 즉시 관리자에게 신호가 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단번에 진행해야만 했다.

덕분에 성진은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해주어야 했다.

[결국 온 거군요? 당신이 염원하던 그날이.]

“아니, 아직 멀었다. 탑의 꼭대기에 올라간 그 순간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니까.”

[처음 봤을 때는 결국 자신의 분노에 삼켜져 스러져갈 영혼이라 생각했더니. 결국 성좌의 목에 그 비수를 들이댈 날이 올 줄은.]

“추억 회상 따윈 됐다. 어서 네 몸으로 옮겨가도록.”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십자가에 성검을 박아 넣었다.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양 세계를 잇던 성녀는 그것으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갔고,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진작 넘겨 버렸던 수명을 따라잡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솔직히 말해 평범하게 죽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수도회 애들이나, 성좌들이나 어느 쪽이든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

“현재 수도회의 리더는 이 둘이다. 이 둘이 결정한 내용이라면 수도자들도 불만은 없겠지.”

영혼이 되어 나타난 성녀 앞에 마리아와 테레사가 기도하듯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고맙구나.

지난 수백 년간, 성녀는 죽지 못해 살아왔다.

처음에는 분명 자신의 의지로 두 세상을 잇는 가교가 되었던 성녀지만, 아무리 굳건한 의지라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완전한 죽음을 원했으나, 검의 몸으로는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다.

어스름 수도회의 성직자들은 그녀가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성에 가까운 존재가 스스로 희생하여야만 이룰 수 있는 기적.

평범한 이들은 기적을 재현할 힘이 없었고, 힘이 있는 자들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성녀의 희생은 타인에 의해 고결한 것으로 포장되었고, 그녀는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수도회를 위해 봉사해야 했다.

마치 성진이 남태수에게 사룡왕의 사도가 되는 것을 경고했던 것처럼.

“천상과의 전쟁으로 수도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저희는 그 속에서 살아남아 마침내 대수녀원장과 총대주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희가 어스름과 현실의 연결을 끊는다 해도 불만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너희는 나를 구해주었는데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구나. 이 다음부터 본격적인 성좌들과의 전쟁이 시작될 텐데…….

“한계인가?”

성진의 물음에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혼은 결국 모두 굴레로 돌아가야 해요. 아무리 강력한 사령술사라도 그걸 막을 순 없죠. 유예할 수 있을 뿐.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성진의 목에 매달린 사룡왕을 바라보았다.

사룡왕은 성녀의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성진에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저는 혼과 육체가 분리된 채 너무 오랫동안 있었어요. 이만큼이나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남아 있었던 이상, 언데드가 되어 더 남아 있는 건 무리에요.

산 자는 언젠가 죽고, 죽은 자는 언젠가 떠나야 한다.

언데드는 떠날 시간을 유예하는 것뿐.

전쟁 중에 죽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탑의 영혼들과 달리, 성녀는 더 이상 영혼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성에 이른 영혼뿐. 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네요.

“떠날 사람은 떠나야지. 그리고 걱정 마라. 널 보내주는 것으로 우리도 그에 따른 카르마를 얻을 테니.”

성진은 미련 없이 성검을 뽑아 그녀를 보내주었다.

[당신의 행동이 영혼의 업(業)으로 쌓입니다!]

[영웅 등급의 카르마를 획득합니다.]

[<성녀 살해자(전설)>를 획득하셨습니다.]

[<어스름의 문을 닫은 자(신화)>를 획득하셨습니다.]

[초월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초월 시련이 이미 완료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신성에 다가갑니다.]

[현재 초월 단계: 1단계.]

신화급에 이른 막대한 카르마가 성진의 영혼에 차올랐다.

성진의 온전한 힘에 비하면 작은 힘.

그러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조차 개변할 수 있는 막대한 힘이었다.

‘이걸로 내 마력적성을 뜯어고칠 수 있겠군.’

성진의 장기는 단순히 힘으로 때려 부수는 것만이 아니다.

애초에 티타니아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나 모든 카르마를 망치에 옮겨 담은 뒤에는 종족적 한계에 부딪혀 상당수의 기술이 봉인된 상태였는데, 이거라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사룡왕은 성녀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걸로 현실과 어스름의 연결이 끊어졌구나.”

“그래. 이제 현실에서 넘어온 이들이 이곳을 어지럽히고 다닐 일은 없을 거다.”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검은 관을 두들겼다.

“내가 이것을 통해 들여보낼 성좌들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그리고 이 검은 관은 성녀와 달리 일방통행이었다.

즉, 들어가면 못 나온다.

“성녀의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우연의 산물. 이것으로 어스름은 완전한 격리공간이 되었다.”

성좌 같은 것들을 몰아넣기에는 딱 좋은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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