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베르나데트는 센트럴 시티의 플레이어들을 이끌며 성진을 지원하고, 바깥에 사람을 보내 굴라그의 죄인들을 탈출시키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이건 기회야.”
성진이 사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베르나데트는 세계정부에 끈을 댈 수 없게 되었다 절망하는 대신 더 큰 기회를 잡았다고 환호했다.
베르나데트가 생각하기에 성진의 존재는 탑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을 큰 충격이었다.
탑이 나타났을 때 사도가 된 이들은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주성진이 나타난 지금, 다나와 남태수 둘을 제외하면 가장 성진과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은?
“세상이 격변하는 시기야말로 크게 한몫 잡을 기회!”
주성진은 성좌를 쳐부수는 것에만 관심을 보일 뿐, 지구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나는 대의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남태수는 소시민적인 마인드로 자기 자신의 보신에만 관심이 있었다.
온 세상을 뒤집어 버리려 하면서도 그 후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
“이러면 분명히 나한테도 순번이 돌아올 거야.”
초인적인 괴물들이 죄다 권력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에게도 순번이 돌아오리라.
그녀는 센트럴 시티의 플레이어들을 하나로 모으고 성심성의껏 내실을 다졌다.
다른 이들이 그 셋과 통하려면 무조건 자신을 거쳐야 하게.
언터처블인 셋을 제외하면 자신이 최대 공로자가 될 수 있게.
성진이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을 뒷바라지하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계획을 짠다.
“제일 걱정이었던 탈옥수들도 세계정부의 눈을 벗어나 숨어드는 데 성공했고. 그럼 이제 문제는 난데…….”
성진과 함께 가기 위해선 베르나데트 자신도 탑을 올라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아무리 성진의 카르마 효과를 받는다고 해도 천재는 아니었다는 점.
“벌써 100층이라고? 이 인간들 왜 이렇게 빨라?”
남태수가 아무리 평균 미만이라고 해도 무르무르에 사룡왕까지 달라붙어 키우고 있는 인간이었다.
세계정부의 유망주 뺨치는 속도로 탑을 오르고 있는 그녀였지만 세 사람의 등반 속도는 그것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드디어 나도 100층이다! 일단 보스부터 만나서 차후 계획 컨펌 받고…… 엥?”
뒤늦게 100층에 도달한 베르나데트는 스테이지의 풍경을 보곤 의문을 표했다.
“다들 어디 갔어?”
100층의 어스름 수도회 스테이지는 플레이어도, NPC도 꽤 많은 숫자가 상주하는 곳.
당연히 여기저기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야 하건만,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친구창에는 다 100층에 있다고 떠 있는데? 뭐야 이게?”
아무도 없는 스테이지를 돌아다니던 베르나데트는 승천로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개로 가득했던 스테이지에 그곳에만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저건 또 뭐야?”
그렇게 드러난 하늘에는 황혼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 * *
“주성진!”
다나와 마리아가 산을 내달려 올라왔을 때, 성진은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야! 100층 관리자가 돌아왔어!”
마리아가 감지한 기척은 바로 바깥에서 충분히 상황을 파악한 뒤, 탑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100층으로 돌아온 산달폰의 기척이었다.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하필 이럴 때!”
“진정해라. 예상하고 있었지 않나. 이미 테레사가 시간을 끌기 위해 나섰다.”
“그거야 그렇지만 시간을 앞당기면 그만큼 안전장치가 줄어드는데 괜찮겠어? 다나가 어스름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기라도 하면…….”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다나를 돌아보았다.
방금 무언가 깨달음을 얻긴 한 다나였으나, 검증도 안 된 깨달음 하나로는 어스름에서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그 깨달음 때문에 어스름 안에서 예상치 못한 곳에 떨어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이걸로 결심이 섰다면 오히려 변수가 줄어들 테지. 이 녀석이 딴마음을 먹을 녀석은 아니니까.”
성진이 보기에 다나는 아이였다.
순진할 정도로 올곧은,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
현실의 답답함에 번민하던 그녀가 마음을 다잡았다면,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 굽히지 않을 것이다.
“이 녀석이 힘이 다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다른 길로 샐 일은 없다. 그렇지?”
성진의 대답에 다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언니인 신시아를 놔두고 어스름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마리아는 다나의 사정 따윈 몰랐지만, 카르마를 보면 대강의 과거는 알 수 있었다.
“친구창을 보니 태수 아재도 아직 산 아래에 있는 것 같긴 하지만 100층에 도착하긴 했어요. 지금이라면 괜찮아요.”
“알았다. 그럼 성탄제를 시작해라.”
성탄제가 시작되면 모두가 어스름 속에 빨려 들어간다.
즉, 천사라 해도 성좌에게 연락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알았어. 그럼 바로 간다.”
마리아는 산 정상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았다.
한 때 성녀였던 그 에고소드는 어스름의 카르마를 잇는 후예의 손에서 눈을 떴다.
“성녀님 문열어줘요!”
[오랜만에 깨워놓고 인사도 없이 대뜸 본론만 말하기 있기 없기?]
“아잇, 그런 건 어스름에 들어가서 해도 되잖아요! 천사가 오고 있단 말이에요! 테레사가 놈을 붙잡고 있을 때 빨리!”
[정말이지. 이젠 검이라고 사람 취급도 안 해주고.]
“그 말 하려고 노리고 있었네 이 양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성녀는 이미 문을 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당신도 오랜만이네요 특이점.]
“그래. 마계에 가기 전에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꽤 됐군.”
그 어떤 영혼이든 보상을 한 번만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어스름.
성좌들이 탑을 만들 때 참고하기도 한 이 신비한 세상은 원래 현실의 존재가 직접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어스름의 성녀는 육신을 어스름에 남겨두고, 영혼만을 검에 담아 돌아와 육신과 영혼의 이끌림을 이용해 언제든지 어스름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게 만들었다.
우연의 산물이었던 어스름으로의 입장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게 만든 존재.
그리고 그 위엄으로 말미암아 신성무구로 거듭난 에고소드.
[마리아, 꽉 잡으렴. 나를 놓치면 이상한 곳에 떨어질 테니까.]
그와 동시에 상공에 어스름으로 이어지는 차원의 틈이 나타났다.
차원의 틈은 점차 거대해지며 산 정상부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차원의 틈에 삼켜진 이들은 그대로 어스름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정상에서부터 산 아래까지 차례로 스테이지 전체를 집어삼킨 차원의 틈은 100층에 있던 모든 영혼들을 어스름으로 날려 보냈다.
모든 영혼들을 집어삼킨 차원의 틈은 살점을 다 발라먹은 뼈를 뱉어내듯 텅 빈 스테이지를 남겨놓고 천천히 쪼그라들어, 100층의 상공에 정착했다.
* * *
차원이동을 할 때와 비슷한 감각.
성진이 도착한 곳은 그가 와본 적 있는 곳이었다.
“또 이곳인가.”
텅 빈 우주의 한복판.
그곳을 떠다니는 부유물의 집합체.
성좌들이 버린 탑들이 모여 있는 우주의 쓰레기장.
그리고 반으로 쪼개진 태평양 항공 337편의 잔해.
“웃기지도 않는군.”
어스름은 현실이 드리운 그림자와도 같은 세계였다.
이곳에는 현실에 있는 것들만이 아니라, ‘있었던’ 것들도 전부 구현되어 있었다.
현실의 그림자가 무한히 쌓여가는 이 세계에서 정확히 자신이 아는 곳으로 떨어질 확률은?
강력한 카르마에 의한 운명보정이 없다면 이러한 확률에 당첨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다른 녀석들을 찾으러 가야겠군.”
버려진 탑은 기능이 정지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힘을 내려주지 않았지만, 스테이지에 남겨진 몬스터는 여전히 존재했다.
한 때 레벨 없이 탑의 꼭대기에 올랐던 성진은 어스름에서 자신의 과거를 마주했다.
“이걸 일일이 오르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성진은 티타니아를 소환했다.
그의 정령술은 어스름 안에서도 현실에 있는 티타니아를 부를 수 있었다.
-어스름에 들어오셨군요.
“어스름의 요정향으로 갈 좌표가 필요하다. 네 카르마라면 길을 이을 수 있겠지?”
성진의 카르마가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듯, 요정공주 티타니아의 카르마는 요정향으로 이어지리라.
“어스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일단 그 녀석부터 찾아야겠지.”
* * *
어스름의 문을 지나는 동안 다나는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마리아의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은 그녀는 무아지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럼 어디까지면 네가 받아들일 수 있겠니?’
과거 다나는 신시아의 본성을 마주하고 두려움에 도망쳤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영혼 깊숙이 흉터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라.’
본성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이 설득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웨어울프를 더 늘리는 것이라도 막아 장기밀매의 피해자를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다나는 어렸고,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실체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어린 다나에게는 그것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그때 일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도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는 도덕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도, 5층에서도, 그 이후로도 계속.
마리아의 말은 그런 그녀의 본심을 관통했다.
‘이런 일을 겪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 이해받은 순간, 다나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자신의 본심을 직시한 다나는 스스로의 영혼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말 한마디로 다나가 깨달음을 얻은 진상.
그렇게 다나는 카르마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는 둘째 치고. 일단 어스름 공략에 집중하자.”
내면을 관조하고 있던 다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어스름 안에 있었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무수한 묘비로 가득한 죽은 대지.
사방의 지평선이 묘비로 가득한 게, 혼자서 길을 헤매다간 굶어죽기 딱 좋아 보이는 곳이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순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다나는 문득 아는 얼굴이 함께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순식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재는 언제까지 기절해 있을 생각이에요? 빨리 일어나세요.”
“음? 므헉!”
떨어질 때 묘비에 머리를 박았는지 기절해 있던 남태수는 다나가 자신의 몸을 흔들어대자 좀비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다나? 여, 여긴 또 어디야?”
“몰라요. 그보다 여긴 딱 봐도 사령술사들이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인데 아재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여길 어떻게 알아. 이런 건 무르무르한테…… 어라? 무르무르?”
남태수는 익숙하게 무르무르를 불렀으나 항상 느껴지던 무르무르의 존재가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간 거야? 앗, 이거 설마?”
“왜 그러는데요?”
“……무르무르가 우리랑 다른 곳에 떨어진 모양인데?”
남태수는 그간 무르무르를 리치의 영혼석이라는 아이템 형태로 들고 다녔다.
그러나 타이탄 코어를 수리한 이후로는 무르무르를 메카-리치로 소환해놓고 다녔는데, 덕분에 소환수랑 다른 곳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소환 취소해서 되돌릴 수 없어요?”
“취소하고 재소환하는 건 가능한데 그랬다간 소환에 사용했던 타이탄 코어가 원래 있던 자리에 버려질 거야.”
기껏 수리한 타이탄 코어를 어스름에 버리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재소환은 논외였다.
그 말에 다나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남태수를 바라보았다.
“어휴. 아재한테 도움을 바란 내 잘못이지.”
“아니, 아니야! 그래도 무르무르가 있는 방향 정도는 식별할 수 있다고? 엄청 멀리 떨어져 있는 건지 거리는 구분이 안 되긴 하지만…….”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아재 혹시 말 돌리려고 아무 곳이나 짚은 거 아니죠? 어차피 여기선 사방이 다 똑같으니까.”
“아니거든!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쓸모없는 아재?”
“……지금까지 대체로 그렇긴 했지만!”
타이탄 코어를 얻었으니 이전까지와는 다를 거라 외치려던 남태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타이탄 코어도, 무르무르도 없는 상태로는 확실히 쓸모없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당장 위험한 건 없어 보이니까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방향을 정한 그들은 일단 무르무르가 있다는 쪽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몬스터 같은 게 튀어나오더라도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어지간해선 괜찮으리라.
그리고 5분 뒤.
“미친 저게 뭐야.”
십 수 마리의 레드 드래곤들이 편대를 이루어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용의 무덤.
남태수에게 깃든 사룡왕의 카르마가 두 사람을 용들의 고향으로 초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