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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진과 다나라는 플레이어가 함께 100층의 정상으로 올라갔다고요.”
“네! 제가 아는 건 그것뿐입니다! 위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아래에서 알 방법이 없어요. 사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잘 알지요. 당신이 거기까지밖에 모른다는 말은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건 어떨까요?”
“예? 예?”
“당신이 제게 앙심을 품는다면요? 예컨대 이대로 제가 당신을 돌려보낸다 해도, 당신은 오늘 일을 기억하고 저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요? 당신이 복수하려 들지 않으리란 건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설령 그런 마음을 먹어도 100레벨에 불과한 제가 사도님께 위해를 가할 수나 있겠습니까?”
염기환은 그렇게 말하며 바닥을 기었다.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손톱이라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물론 당신의 능력으로는 저를 어떻게 할 순 없죠. 하지만 당신이 다른 사도에게 자신을 위탁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신시아는 아주 낮은 확률의, 그러나 일어날 수 없는 건 아닌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제가 이러한 질문들을 했던 정보를 다른 사도에게 팔아먹는 대가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한다면? 그로 인해 제가 다른 사도에게 피해를 입는다면?”
“그게 무슨…….”
“억지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신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리해.”
가주의 명령에 스펜서 가문의 늑대인간들이 염기환을 끌고 사라졌다.
신시아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권능 스킬을 이용한 공간전이를 시전했다.
전이한 곳은 달의 뒤편.
인류의 카르마가 효력을 발휘하는 한계선.
신시아의 눈앞에 별의 바다가 펼쳐졌다.
그녀는 그곳에서 별들을 향해 폴짝 뛰어올랐다.
인류의 영역을 벗어나 별의 바다로.
달의 중력을 거스르며 뛰어오른 신시아가 카르마 한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별의 바다가 사라지고 끝없는 어둠이 펼쳐졌다.
우주의 진실.
이미 이 우주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별들은 성좌에게 잡아먹혔으며, 지구상에서 관측되는 별들은 성좌들이 위장해놓은 것에 불과했다.
우주는 이미 어두워졌고 이제는 인류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상의 인간들은 이 사실도 모르는 채 내일이 오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 범 우주적 트루먼쇼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신시아는 광분했다.
그녀에게는 저 우주적 존재들이 결정할 종말을 뒤바꿀 방법이 없었다.
인류에게 남은 것은 그저 종말을 받아들이는 것뿐.
신시아는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의 죽음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나는 아니었다.
온 세상의 별들이 사라져도, 그녀의 별을 지킬 수만 있다면.
‘다나.’
자신의 영혼 따윈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그리하여 신시아는 사도가 되었다.
‘이 이상 놈들이 날뛰면 다른 사도들도 눈치채게 돼.’
무언가 집중해야 할 때, 그녀는 항상 이곳을 찾았다.
침묵과 광기의 사도답게 그녀는 이 고요에서 평안을 얻었다.
‘아직 극동에서의 탈옥사건과 30층의 이상현상이 새로운 사도의 소행임을 아는 건 나뿐.’
물론 성진이 새로운 사도라는 것은 오해였지만 그것까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나를 위해서라면,
세상을 불태워서라도.
* * *
지구산 토종 언데드를 만들자는 말에 난색을 표한 남태수였으나, 무르무르라고 무작정 하는 말은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을 죽이자는 게 아닙니다. 지구에도 이미 죽은 사람들이 있을 게 아닙니까.
“아니 그건 그것대로 좀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거잖아.”
-저도 죽은 사람인데요.
“아뿔사! 내가 또 함정에 빠졌구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가불기.
남태수는 순식간에 고인 앞에서 고인드립을 치는 쓰레기가 될 뻔했지만 무르무르는 그를 용서했다.
-후…… 이번만입니다.
농담은 그쯤하고, 무르무르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마스터의 윤리 도덕상 NPC도 아닌 지구인을 마구잡이로 되살리는 게 부담스러울 거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지요.
“응?”
-지난 30년간 지구인 ‘플레이어’도 많이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탑이 나타난 지 30년.
지금에야 공략법이라든가 세계정부의 통제 덕분에 사망자가 암이나 교통사고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줄었지만, 초기에는 많이도 죽어 나갔다.
탑에 도전하는 플레이어들의 사망률이 줄어든 건 첫 번째 사도가 나타난 뒤.
그 전까진 어지간한 익스트림 스포츠 못지않은 사망률을 자랑했다.
‘티비에서 매번 방송해준 내용들을 보면 엄청 죽긴 했지? 사망률이야 윙슈트 같은 것보다 낮았지만, 플레이어는 윙슈트를 즐기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윙슈트가 탑보다 사망률이 높은 건 딱히 탑이 더 안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윙슈트를 즐기는 사람들은 계속 즐기니까 언젠가 죽는데, 탑은 한 번밖에 못 들어오니까 사망률 더 낮았을 뿐.
‘안 되겠다 싶으면 도전을 그만두고 나갈 수 있기도 하고.’
애초에 탑의 시스템은 딱히 스테이지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거인들이나 난쟁이 포대 같은 걸 마주치면?
솔로 플레이는 사실상 불가능.
풀 파티 구성으로 다녀도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간 탑에서 죽은 플레이어들의 영혼은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NPC를 해방시키듯 그들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탑에서 죽으면 영혼이 탑에 귀속된다고 했지?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지구인 영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현지인 영혼을 바로 재가공해서 쓰려면 탑에 복잡한 기능을 추가해야 하니까요. 보통은 동면시켜두고 침략이 끝난 뒤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편입니다.
그 말은 여기 어딘가에 죽은 플레이어들의 영혼이 잠들어있다는 뜻이었다.
-그 영혼들은 일반 플레이어는 닿지 못할 스테이지의 뒤편 같은 곳에 잠들어있겠지요. 찾아옵시다.
“스테이지의 뒤편에 또 가자고? 며칠 전에 그 꼴을 봐놓고? 난 싫어!”
-걱정 마십시오. 이번에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했던 그때와는 다를 테니까요.
무르무르는 그렇게 말하며 타이탄 코어를 가동해 자신의 기계 몸을 만들어냈다.
-지구에 사는 솔개라는 생물은 40살이 되면 날개가 무거워지고 부리와 발톱이 뭉툭해져 사냥하기 힘들어진다고 하더군요. 이때 대부분은 굶어죽게 되지만 자신을 바꾸는 개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그건 인터넷 구라…….”
-저도 솔개가 자신의 깃털과 발톱을 뽑아내고 기계로 몸을 대체하듯, 개쩌는 변신 합체기능을 탑제한 메카-리치로 거듭났으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울 수 있겠지요.
“아니 변신 합체기능은 왜 또 추가되는데? 누구랑 합체하려고?”
그 말에 무르무르는 강철 손가락을 내밀어 남태수를 가리켰다.
-I WANT YOU.
남태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몸이 생기더니 갑자기 열혈로봇물 파트너처럼 구는 이놈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놈도 30년 동안 탑에서 지구의 문물을 접했더니 지구인인 남태수를 흔드는데 도가 터 있었다.
-자, 합체합시다!
“꺼져 미친놈아!”
* * *
“자매님은 아직 준비가 안 되셨군요.”
다나는 10살짜리 아이에게 놀이에서 패배하여 바닥에 엎어졌다.
단순한 놀이는 아니었다.
감각차단 팔찌를 끼고 육감만을 사용해서 진행하는 수련용 놀이.
자기 몸이 아니라 남의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바닥이 용암이라 상정하고 그걸 피해 이동하는 그런 놀이였다.
“너무 멀리 뛰었잖아요. 자기 다리 힘도 몰라요?”
“……차라리 엄청 멀리 뛰는 거면 다리에 마력을 많이 쓰니까 조절도 쉬운데, 이렇게 조금 뛸 때는 마력도 미세하게 조절해야 해서 힘드네.”
“카르마를 이용해서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건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이단심문관의 간파 스킬을 지닌 다나는 상대가 NPC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유 카르마 목록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카르마 종합치: 이단
대상에게 심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업답게 그녀의 스킬 알람은 제제를 상대로 스킬을 발동하라 말하고 있었으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놀이는 계속 지고 있었지만, 연습을 위해 하는 거지 애한테 승부욕이 붙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만한 레벨 차이가 나는데도 몸 쓰는 놀이에서 진다는 건…….’
탑이 체크한 제제의 전투력은 41레벨 수준.
심지어 다나는 종족이 웨어울프라 레벨에 비해 신체능력이 더 뛰어난대도 이러고 있었다.
“자매님은 저보다 카르마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되게 못하시네요.”
“카르마가 많이 있어 봐야 뭐해.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건질 모르겠단 말이야…….”
“이참에 어스름에 귀의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자매님이라면 선배님들도 모두 환영할 텐데.”
모든 면에서 다나가 앞서 있음에도 제제의 카르마 숙련도가 높은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부터 어스름 수도자로서 카르마를 쌓아온 이들은 승천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카르마를 체득하고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말하자면 직업 특성 자체가 카르마에 특화되어 있다는 뜻.
“안 돼. 나는 아저씨를 따라가야 한단 말이야. 혼자 여기 남아 있을 시간은 없어.”
“그럼 한 판 더 하실래요?”
그 말에 다나는 초콜릿 하나를 던져주곤 자신도 벌떡 일어났다.
“감사~”
수도의 장인 이곳에는 단 게 부족하다.
다나는 그 점을 이용해 간식을 대가로 아이들에게 카르마를 체험시켜달라고 요청하고 다녔다.
‘직접 경험하면 빠르게 배울 수 있을 거야.’
생에 처음으로 벽이라는 것을 경험한 천재는 일반인들과 똑같은 발상을 거쳐 ‘맨땅에 헤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좋은 마인드인 걸?”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대수녀원장님?”
“제제 너는 가서 네 수련 하고 있으렴. 이 언니는 이제 내가 봐줄 테니까.”
“에에, 간식 잘 뜯고 있는데 왜요!”
“……나중에 내가 애들한테 압수했던 과자를 나눠줄게.”
“진짜죠? 약속이에요!”
마리아는 신나서 뛰어가는 제제를 바라보다 다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성자님 부탁이야. 계속 그렇게 삽질만 하고 있으면 성탄제 전에 카르마를 깨우치기는 글러 먹었으니 나보고 좀 봐달라고 부탁하더라.”
“우리 성자님?”
다나는 이상한 부분에서 반응했다.
“그렇게 남의 도움만 받으면서 자기 언니를…… 어라? 아직 언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미 빡쳐 있네? 차라리 잘 됐어. 그대로 대수녀원장을 쓰러뜨린 자 같은 카르마를 얻을 기세로 덤벼 보라구.”
그 말에 다나는 검기를 뿜어내며 마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 덤벼도 마리아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을 테니 힘을 아낄 필요는 없단 생각에서였다.
“흐음? 그런 허접한 마인드로 되겠어? 네 목적은 이 세상을 팔아먹으려는 언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는 거잖아? 전 세계와 싸우는 거라구?”
“네가 뭔데 다 안다는 듯이 떠들고 있어!”
“그야 잘 알지. 나는 부모님이 성좌에게 고향을 팔아넘겨서 수도원에 오게 된 거니까.”
“……!”
“나처럼 되지 않으려면 네가 하려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거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시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어지리라.
그러나 마리아는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다나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먼 산을 보고 있었으니까.
“천재라더니. 진짜 천재네. 그것만 듣고도 자신에게 맡게 적용해서 이해한다고? 아무리 원래도 능력은 갖추고 있었고 인식만 못하는 문제였다지만…….”
말 한마디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그 한마디가 어떤 일들을 겪고, 어떤 생각을 해서 튀어나온 건지 전부 이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잘 이해해주면 오히려 부담스러운데.”
무엇보다 탑에 갇혀 똑같은 상대들과 연습하다 새로운 녀석과 붙어볼 기회라고 기대했는데, 그게 무산된 게 더 아쉬웠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 기척은…….”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 스테이지에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