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과거, 성진이 사룡왕과 손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사룡왕은 그를 어스름 수도원으로 이끌었다.
“여긴 어디지? 성좌를 죽이게 해준다 하지 않았나? 성좌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아서라 아가야. 여가 너를 찾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앞으로의 가능성 때문이니라. 지금 실력으로 성좌를 쓰러뜨리는 것은 어림도 없느니라.”
그녀의 의도는 이랬다.
“힘을 키우거라. 이곳에서 여가 준 용왕파천무를 완성해. 네가 전장에 나서는 것은 그다음이니라.”
“이봐, 너……!”
사룡왕은 자신의 할 말을 다한 뒤,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성진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사령술을 창안한 마도의 조종을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남겨진 성진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이를 갈다, 어스름 산맥을 향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좋다. 이 무공만 완성하면 된단 말이지.”
그렇게 성진은 어스름 수도원에 들어섰다.
등 떠밀려 들어선 수도원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성진은 힘을 원했고, 어스름 수도자들은 강해지려는 자를 환영했다.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성진이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성진이 가진 카르마는 그의 선천운명을 개변시키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탑의 끝에 도달한 자 (영웅)>, <천사살해자 (영웅)>, <사룡왕의 계약자 (신화)>의 효과로 운명이 결정한 잠재력을 초월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초월.
그것은 성진의 영혼이 신성에 다가갔다는 뜻이었으나, 성진은 그 메시지를 무시했다.
“여긴 탑이 아니다. 닥치고 있어라 시스템.”
시스템의 보조 따위가 없어도 지금의 성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무공을 수련한다. 용왕파천무를 완전히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든다.’
스킬 따위가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의 힘.
더 이상 성진이 남의 힘에 기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의외로, 무공을 배우는 것은 재미있었다.
“마력이 몸속에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였군.”
“용왕파천무는 큰 힘을 다루는데 특화된 무공이었군. 내 힘이든, 남의 힘이든 말이야.”
“사룡왕 이 자식. 자기 기억 속에서 대충 세 보이는 무공을 다 갖다 붙인 건가? 이걸 이따위로 곡해해놓다니. 잘 보니 완전 잘못 붙여놨잖아?”
스킬로 사용하던 무공과 용왕파천무의 비교.
원리를 이해 한 다음에는 용이 만든 무공을 인간에게 맞게 최적화하는 작업까지.
초월을 통해 오성이 깨어난 성진은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낼 수 있었다.
[용왕파천무 개(改) 주성진류를 창안 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군.”
이윽고 자신의 무공이 충분한 경지에 이르자 성진은 도전에 나섰다.
“졌습니다.”
“대단하시군요. 처음으로 무공을 배우셨으면서 그 정도라니.”
사제급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 수 배웠습니다.”
“형제님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실력은 소문 이상이시군요.”
주교급조차 성진에게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배워야 했다.
그러는 동안 성진은 경험을 통해 용왕파천무를 더더욱 갈고닦았다.
[용왕파천무의 성취가 8성에 도달합니다.]
비록 사룡왕의 전공이 무공은 아니라 할지라도 용왕파천무는 우주에서 손꼽히는 세월을 살아온 신성존재가 만들어낸 무공.
이렇게 해도 용왕파천무는 아직 그 끝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구지?”
“나다 이 자식아!”
창문을 깨고 튀어나온 수녀가 성진의 앞에 착지했다.
깨진 창문 안쪽에서는 다른 수녀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매님 제발…….”
“왜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문을 깨고 다니시는 건데요?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치만 이게 더 멋있는걸.”
“깨신 창문은 직접 치우세요!”
“알았어. 이따가 치울게.”
“창문부터 치우고 하세요! 아니면 오늘 간식은 없어요!”
수녀들의 말에 마리아는 어색하게 성진을 바라보았다.
“자,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어디 가면 안 된다?”
그러고선 주섬주섬 깨진 창문 파편들을 줍기 시작했다.
성진은 훗날 지구에서 만날 어떤 사령술사를 보듯이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는 사이 소동을 듣고 주교복 차림의 여성이 달려왔다.
“형제님? 이게 무슨 일인가요? 갑자기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악! 테레사 새치기 하지 마!”
그것이 성진과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 *
그로부터 한 달.
당시의 두 사람은 분명 뛰어난 실력을 지닌 강자였지만, 지금처럼 각 파벌의 정점에 위치해 있진 않았다.
“또 졌어! 이번엔 아주 전멸을 했잖아?”
마리아는 체스판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테레사는 미소를 지으며 전투화를 들고 일어섰다.
“제 승리네요. 그럼 오늘 대련은 제 차지입니다.”
테레사는 깡충 뛰어 공중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남겨진 마리아는 체스판 앞에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 위에 양팔을 얹어놓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턱을 괴기도 하고, 다리를 꼬기도 하고, 꼬은 다리 중 위에 얹은 발을 까딱이기도 했다.
갈수록 점점 몸이 배배 꼬이는 모습.
그러나 진짜로 꼬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심사였다.
“아 진짜! 나도 성진이랑 대련하고 싶은데!”
마리아와 테레사를 만난 첫날.
성진은 마리아에게 도전했고, 접전 끝에 패배했다.
중요한 것은 패배가 아니라 ‘접전 끝에’라는 점이었다.
성진은 아직 용왕파천무를 배운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그의 무공은 완전하지 못했다.
이튿날 완전히 회복한 성진은 이번엔 테레사에게 도전했고, 전날보다 확실히 나아진 실력으로 다시 패배했다.
“선배들은 다 천사들이랑 전쟁하러 나가서 그만한 연습 상대가 또 없는데…….”
강함을 추구하는 어스름 수도자들에게 자신과 맞먹는 좋은 연습 상대란 귀한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의 성진은 아직 그녀들보다 약했지만, 매번 놀라운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오래 기다릴 것 없이 조금만 더 있으면 나랑 비슷해질 것 같은데.”
그러한 상대가 있으면 자신도 더더욱 강해질 수 있다.
마리아와 테레사는 서로 자신이 성진과 연습하기를 원했고, 성진은 귀찮으니 둘이서 합의를 보고 오라고 일축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것.
매일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승부거리를 가져오고, 이긴 쪽이 성진과 대련하는 것.
보통은 주제를 가져온 쪽이 이기기 마련인데 오늘은 마리아 본인이 체스를 가져왔음에도 지고 말았다.
“아 씨, 필승법이라고 배워왔는데 쟤 왜 이렇게 잘해? 이럴 거면 오목으로 할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성탄제를 열어 버리자. 어차피 선배들 다 나가고 없어서 지금은 내가 수녀회 대표잖아? 그럼 반대할 사람도 없으니 문제없겠네!”
성탄제.
성녀의 탄생을 기념하는 어스름 수도회의 전통행사.
성탄제가 열리면 현실의 존재들도 어스름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곳에서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권한은 한 사람당 한 번뿐이기에 이미 권한을 사용한 마리아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안에서 하는 거라면 괜찮았다.
“어스름 안에서라면 몇 날 며칠이고 대련해도 되니까!”
어스름은 꿈속 세계이자 세계의 꿈.
그곳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겸사겸사 성진 같은 강력한 수련자에게 어스름의 은혜를 알려줘야지!”
무공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저 정도라면 어스름의 은혜를 받을 경우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잘은 몰라도 그녀의 선배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놀라운 경지를 기대해볼 수 있으리라.
‘어쩌면 저 녀석이 성녀님의 뒤를 이을 예언의 주인공일지도.’
망상은 그쯤하고 마리아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성탄제의 결정을 마리아 혼자서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다른 수녀들도 성탄제에 찬성했다.
“언제까지고 선배님들이 돌아오시길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요.”
천상과의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성탄제는 성진의 등장을 계기로 재개되었다.
한가롭던 수도원이 분주해지자 자기 수련에만 빠져 살던 성진이라도 이 분위기를 모를 순 없었다.
“요즘 무슨 일 있나? 다들 바빠 보이는군.”
“성탄제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성진은 고개를 젖혀 테레사의 발차기를 피했다.
전투화에 박힌 칼날굽이 코끝을 스쳐 지나간 직후, 성진은 튕기듯 일어나 테레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발차기를 쓰는 적에게는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주효하다.
그러나 테레사는 특유의 발기술로 성진을 통과하듯 지나쳐 보냈다.
“성탄제?”
“성녀의 힘으로 어스름을 오가는 이벤트랍니다.”
테레사는 그 신묘한 보법을 수비만이 아니라 공격에도 활용하며 성진을 압박했다.
성진은 자신이 피할 곳을 줄여나가는 그 압박 속에서 당하기 전에 쓰러뜨리겠다는 마인드로 정면 맞대결에 나섰다.
“참가하는 이들은 꿈속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가지고 나올 수 있지요.”
“참가자들에게 기념품도 챙겨주는 축제라 이건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진지한 축제랍니다. 기념품에 제한이 없거든요.”
성진은 테레사의 옷깃을 붙잡아 메쳤고, 테레사는 그라운드 상황으로 이어지기 전에 붙잡힌 겉옷을 벗어 던지고 빠져나왔다.
넉넉한 품의 주교복 아래에 감쳐졌던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트한 전투복이 드러났다.
“성직자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벗기시다니.”
“헛소리 말고 설명이나 해라.”
“설명이랄 것도 없어요. 어스름은 꿈속 세상이자, 세계의 꿈이기도 하지요. 이 세상에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곳에도 있어요. 정말로 무엇이든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 안에서 원하는 걸 찾아내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요.”
이 우주만큼이나 큰 공간에서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낼 확률.
한없이 0에 가까운 그 확률을 현실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필연에 가까운 운명이 필요했다.
“카르마가 부족한 자들은 돌아오는 길조차 찾지 못해 그곳에 갇히고 말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말하자면 운빨x망겜이라 미리 확률조작을 해둬야 한다는 이야기군?”
“예? 예? 우, 운빨 뭐요?”
한평생 무예를 수련하며 살아온 성직자는 특정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세상에! 망측해라!”
“……그딴 말에 과민반응하는 네가 더 망측하다만. 방금까지 자기 옷도 훌렁훌렁 잘만 벗어 던졌으면서.”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요! 아무튼 다른 거예요!”
지나가던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쐐기를 박았다.
“바보 아냐?”
* * *
탑의 바깥.
인공섬 위에 생겨난 출입구 포탈.
티타니아가 30층을 틀어막은 후, 새롭게 들어가는 이들이 사라진 이곳은 오로지 출구로만 쓰이고 있었다.
100층의 도전을 포기하고 나온 염기환은 그곳에서 플레이어 등록을 하고 있었다.
‘시발, 시발…….’
남태수와 헤어진 후 염기환은 커뮤니티에서 남태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남태수가 세계정부에 수배된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돈을 갚지 않고 같은 층에서 버틸 배짱이 없었다.
‘각성 못 한 100레벨로 끝나다니. 그 새끼 때문에 내가…….’
남태수가 들으면 저 새끼는 지가 남한테 피해준 건 생각도 안 하고 피해자인 척 한다고 욕을 박았을 생각과 함께 등록을 마치고 나자 이제 그의 인생은 완전히 결정되었다.
“100레벨, 미각성. 등록 완료하셨구요. 지금 항공편은 군용기밖에 없으니까 저쪽 군부대로 가보세요.”
한껏 심통이 난 상태에서도 염기환은 그 말에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접수원도 나보다 레벨이 높네…….’
이곳의 접수원은 단순 사무직이 아니라 졸업한 플레이어가 날뛰어도 바로 제압할 수 있는 전투원인 탓이었으나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대신 그다음으로 향한 군부대에서 만난 사람은 알 바 아니라고 넘길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 100층에서 막 나오셨다고요.”
사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시간 좀 내어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