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냐는 말에 산이 거기에 있어서라고 답한 산악인이 있었다.
남태수는 누군가 자신에게 왜 계단을 오르냐고 묻는다면 죽빵을 날릴 자신이 있었다.
“허억! 지금이라면! 허억! 성진 씨라도! 허억! 때릴 수 있을 것 같아!”
-진짜요?
“……마음만은 그렇다는 거지.”
세계의 끝으로 향하는 승천로.
남태수는 어스름의 증표 덕분에 사제에게 도전하지 않고도 승천로를 오를 권한을 얻었다.
하지만 승천로의 끝없이 이어진 계단은 단순한 계단이 아니었다.
평범한 계단이라면 그 숫자가 아무리 많든 100레벨 플레이어의 체력으로 오르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100레벨이면! 계단을 오르면서 지치는 것보다! 회복되는 속도가 더 빨라야지! 왜 이리 힘들어! 아 몰라 나 좀 쉬다 갈 거야!”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마스터는 실시간으로 약해지고 있는 중이니까요.
“엉?”
-세계의 끝에 있다는 어스름 승천로는 성녀의 기적이 남겨진 장소입니다. 이곳을 오른다는 행위는 그 카르마를 받들겠다는 제사 의식과도 같습니다.
“제사 의식이라니?”
-지구의 종교에서도 축일에 특정한 성인(聖人)의 행적이나 전승을 재현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에 마구간을 만들어놓는다거나.
“그걸 제사로 봐야 하나?”
-물론 그건 단순한 기념에 불과합니다만, 크리스마스처럼 기념 그 자체가 문화로 정착하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행위에 카르마가 깃들게 되니까요.
기적의 재현.
이러한 행위는 해당 신도나 추종자로서의 카르마를 쌓게 했다.
-만일 어스름 수도자라면 이 계단을 오르는 것만 반복해도 힘이 쌓일 겁니다. 하지만 마스터께선 아닙니다.
“왜?”
-마스터는 성녀가 아니라 왕의 계약자 주성진 님을 추종하는 분이잖습니까. 여기서 다른 사람을 추종하는 행위를 했다간 해당 카르마가 희석됩니다.
남태수는 성진의 <불패의 선봉장> 카르마에 의해 온갖 보정 효과를 받고 있었다.
단순한 신체 스펙이나 마력에서부터, 심지어는 마법을 배우는 속도까지.
-여기서 마스터가 다른 것을 따르는 행위를 하니까 그 정체성이 희석되며 효과가 약해지는 겁니다. 즉, 한걸음 올라갈 때마다 버프가 하나씩 꺼지는 셈이니 힘들게 느껴질 수밖에요.
“성진 씨의 부하로서 얻은 효과이니 배신하면 버프가 사라진다곤 했지만. 그게 이런 걸로도 약해지는 거였어?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 뭐 그리 약해?”
-기존에 쌓아둔 카르마가 너무 적으니 다른 카르마에 그만큼 쉽게 영향을 받는 겁니다. 우유 한 트럭에 콜라 한 컵을 섞으면 티도 안 나지만, 우유 한 컵에 콜라 한 컵을 섞으면 바로 구역질 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남태수 인생이 성진에게 많이 휘둘리긴 했지만, 동료 의식이나 부하로서의 충성심을 가진 적은 별로 없긴 했다.
-원래대로라면 견습 마법사 수준도 안 되는 마스터께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우스운 일입니다만. 타이탄도 생겼겠다. 마스터께서도 카르마를 쌓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성진에게서 받는 부가효과가 아니라 남태수 자신만의, 스스로의 업.
-슬슬 사도 다운 기품을 갖춰봅시다.
* * *
어스름 수도회의 총본산이 위치한 산맥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
속칭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수도원의 성지가 위치해 있었다.
구름으로 가려져 하계의 인간들이 볼 수 없는 그곳에서, 성진은 성지에 발을 내디뎠다.
“언제 봐도 놀라운 풍경이로군.”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구름을 발아래 두고 솟아오른 설산의 봉우리들.
그 위로 별빛이 닿지 않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화창함을 넘어 쾌청한 그 하늘에는 단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에서나 보일 법한 소용돌이가 머리 위에 위치한 모습.
그 모습은 구름이 발아래 위치한 것과 더해져 마치 세상이 반전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스름의 문.”
세계의 꿈과 이어지는 물리적인 통로.
어스름의 성녀가 만들어낸 신화적인 현상이 탑 내부에 재현되어 있었다.
아니, 재현 따위가 아니었다.
저건 성좌도, 여덟 왕도 재현해내지 못한 기적이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건 진짜 어스름의 문이다.
“저게 여기 있다는 건 어스름의 성녀도 이 탑에 있다는 거군.”
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성녀뿐.
저게 여기 있다는 것이야말로 성녀가 이곳에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성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성녀를 지키는 두 사람도 이곳에 있다는 뜻.
세계의 끝. 그 정상에서 어스름 수도회의 두 기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수녀복으로 온통 까만색 일색인 마리아,
하얀 머리에 하얀 주교복으로 온통 하얀색 일색인 테레사.
짜고 친 것 마냥 완전히 대조되는 두 성직자가 성진을 맞이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아아, 부른지가 언젠데 왜 이제야 오는 거야?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네.”
총대주교 테레사는 성진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그를 반기는 반면, 대수녀원장 마리아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어머, 수녀원장께서도 참. 높은 탑의 성자께서 오셨다는 말에 미사 시간 내내 발을 동동 굴렀으면서.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아, 아니거든? 누가? 언제? 몇 시 몇 분 몇 초?”
마리아, 테레사는 범차원적인 조직의 최고지도자답지 않게 장난스러운 태도로 성진을 맞이했다.
그러나 태도와는 별개로 그녀들이 가진 힘은 절대 장난스럽지 않았다.
강한 자가 올라가는 어스름 수도회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건, 이 두 사람이 어스름을 신봉하는 이들 중 가장 강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둘이 합치면 티타니아 하나 정도는 되겠지.’
온전한 신성존재였던 요정왕과 달리 반신이었던 요정공주.
요정향을 계승하며 얻은 몇 가지 능력을 제외하면 이 둘은 티타니아에 준하는 강자였다.
물론 그건 티타니아가 가진 능력에 비해 직접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컸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마리아와 테레사의 영혼은 NPC가 되어서도 티타니아처럼 자아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슬슬 저 위에 있는 놈들에게 한 방 먹이려는 거지? 말만 해. 우리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딱히 마리아 네 도움이 필요해서 온 건 아니다.”
“엑?”
“내가 볼 일이 있는 건 어스름이다.”
강자존을 교리로 삼은 이들이 교황이 아닌, 총대주교나 대수녀원장을 최고지도자로 두고 있는 이유.
“성탄제를 열어달라고 하신 걸 보니 성녀님을 만나러 오신 거죠?”
“당신은 이미 어스름에 들어갔다 나왔잖아? 뭐하러 성녀님을 또 만나려는 거야?”
“검술을 배우러 왔다.”
아직까지 어스름 수도회의 그 누구도 성녀의 기적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배울 게 남아 있어? 당신이?”
그 말에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배우는 건 내가 아니다.”
“그럼 누구? 당신이 데리고 왔다던 그 여자애? 그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걔도 보통이 아니긴 한가 본데?”
“높은 탑의 성자께서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아이라니 저도 관심이 가네요. 분명 어스름에 크게 기여할 아이겠지요.”
마리아와 테레사는 다나에게 기대하면서도 그녀를 수도회에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어스름 수도회의 특징 중 하나였다.
그들은 굳이 다른 사람들을 수도회에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스름은 그 특성상 세상에 강자가 늘어나기만 하면 그들이 어스름의 신자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때문에 어스름 수도회는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또 전파하며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것을 추구한다.
오히려 억지로 끌어들였다가 다양성이 줄어들고 가능성이 억제되는 것을 경계하여 외부인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종교라기보다는 NGO에 가까운 조직인 것.
완전히 외인(外人)인 성진이 수도회 내에서 최고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성향의 결과물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지금의 당신한테 부하가 필요한 건 아닐 텐데? 하물며 힘쓰는 일이라면 더더욱.”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진의 팔에 매달렸다.
“잘 생각해봐. 응? 내가 전쟁과 영광한테 죽긴 했지만 그 이후로 탑에서 깨달음이 꽤 있었거든? 왠지 여기 관리자는 담당 영혼한테 관심이 없어서 자유롭게 수련했단 말이야.”
그녀가 말하는 것은 산달폰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전쟁과 영광이랑 다시 싸워서 이길 자신 있다구. 이제 와서 새로 제자를 키우는 것보다 나를 데리고 가는 건 어때?”
“전쟁과 영광의 성좌는 이미 내 손에 죽었다. 난쟁이들의 청동망치를 빌려서 머리통을 깨부숴줬지.”
“뭐? 그런 카르마는 안 보이는데?”
“탑에 다시 들어오려고 가진 카르마를 모두 망치에 옮겨놨으니까.”
“말도 안 돼! 그놈은 내가 목을 따려고 했단 말이야! 너무해!”
마리아는 초등학교 피구팀 편 가르기 도중 마지막까지 선택받지 못하기라도 한 것 마냥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앗, 새치기하지 마세요, 마리아 자매님! 이 스테이지에는 ‘보스’가 필요하다고요. 저희 둘 중 하나는 남아야 하는 상황에서 은근슬쩍 자기가 가려고 하다니!”
지구의 플레이어 중에서 100층의 마지막 보스까지 도달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탑의 시스템에는 보스가 등록되어 있어야 했다.
이곳의 보스인 마리아와 테레사가 둘 다 이곳을 떠난다면 탑의 동작이 멈춘다.
문제가 거기까지 가면 담당인 산달폰 선에서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다른 관리자들은 물론 성좌까지 성진의 존재를 알게 되리라.
“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시면 안 된답니다. 성자님? 여기서는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저를 데려가세요.”
“무슨 소리야? 너보다 내가 더 센데. 당연히 내가 더 도움이 되지.”
“저것 좀 보세요. 뭐든지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분명 사고를 칠 게 뻔하니 여기서는 제가!”
마리아와 테레사는 성진의 팔을 한쪽씩 잡고 늘어져서는 마구잡이로 당겨댔다.
성진은 그 사이에서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당기지 마라. 처음부터 한쪽만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게? 설마 당신이 남아서 보스 역할을 하고 우리 둘이 올라가라는 건 아닐 거 아냐?”
“저희가 함께 갈 방법이 있는 건가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는 산맥의 저 아래에서 낑낑대고 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 올라오고 있는 놈이 해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