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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약 당첨 사실을 확인한 직후, 남태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반창고와 연고를 사러 가는 일이었다.
“아우 씁.”
끼얏호를 외치며 뛰어오른 남태수는 자신이 좁은 골방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정수리로 되새겨야 했다.
천장에 머리통 박고 뒹굴던 와중에 새끼발가락도 찧고 난리부르스를 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하고 약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흐흐흐, 그래도 됐다! 이제 나도 플레이어다!”
청약에 당첨된 이들은 탑에 들어가기 전, 세계정부의 시설에서 한 달간 연수를 받는다.
연수기간 동안 인성검사나 이것저것 하긴 하지만,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거기까지 가서 사고를 치고 퇴소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연수 받으러 가기 전까지 최대한 준비해야 돼.”
무릇 인간이란 복권을 살 때는 당첨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도박을 할 때는 돈을 따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법이었다.
남태수는 청약을 넣은 후로 항상 당첨된 이 순간을 꿈꿔왔다.
때문에 그는 빠르게 그간 망상으로만 계획해온 일들을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저 플레이어 청약 당첨됐으니까 이제 출근 안 해요.”
-뭐? 야, 너 갑자기 그렇게…….
“아무튼 출근기간 만큼 월급이랑 퇴직금이나 알아서 입금하시고, 다음에 만날 땐 플레이어니까 알아서 사려라 NPC 새끼야!”
사표 내러가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싫은 사장에게 욕을 박아준 뒤, 남태수는 은행으로 뛰어갔다.
“축하드립니다. 대출 승인되셨구요. 오늘 안에 입금될 거예요.”
레벨이 곧 신분인 시대.
플레이어 청약 당첨은 그 자체로 담보가 되어주었다.
최하급 플레이어라도 돈을 갚을 능력은 확실했고, 탑에 박혀 있는 동안 이자가 왕창 쌓일 테니까.
이들은 고이율 대출상품도 서슴없이 집어 들었으므로, 은행은 졸부를 맞이한 명품숍처럼 신나서 대출을 내주었다.
“이걸로 군자금은 확보했고. 다음은 몸만들기인가.”
탑에서 아무리 스탯을 올려줘도 같은 값이면 단련이 되어 있는 편이 유리했다.
“근육을 키우는 것보다는 유연성을 키우는 쪽으로. 역시 필라테스가 좋겠지? 스포츠 선수들도 한다고 하고.”
한껏 벌크업한 보디빌더는 자기 등을 긁을 수 없다.
과도한 근육으로 관절의 가동범위가 줄어들면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것.
하지만 플레이어의 힘은 어차피 근육이 아니라 스탯에서 나오므로, 초인인 플레이어는 근육을 키우기보다 유연성을 키우는 게 유리했다.
“유도나 검도 같은 것도 배워둬야지.”
기존의 스포츠는 결국 인간의 신체능력에 맡게 만들어진 것이라 플레이어에게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몸을 쓰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플레이어라고 해도 결국 팔다리 둘 씩 달린 인간이라는 건 똑같았으니까.
관절기나 힘을 싣는 법 등, 초인에게도 유효한 기술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격, 수영, 승마, 운전면허 갱신 등 할 게 많네.”
탑에 들어가면 온갖 장비를 다루기 마련.
높은 층까지 가면 포인트로 차량이나 보트, 비행기를 구매하기도 하니 최소한의 운전법은 배워두는 편이 좋았다.
몇몇 보스 레이드는 건설장비를 쓰는 공략이 정석으로 자리 잡은 덕에 관련 면허가 있으면 공격대 취직이 프리패스이기도 했으니까.
단체행동을 할 거면 수송차량을 몰기 위한 대형면허도 필수였다.
“아, 맞다.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도 해봐야지. 일주일 정도 날 잡고 계속하면 익숙해지려나?”
플레이어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버릇은 플레이어가 충분히 착지할 수 있는 높이에서도 겁을 집어먹게 했다.
전투 상황에서 높은 걸 무서워하고 있어서야 제대로 싸울 수 없다.
가진 능력을 100% 활용하려면 미리미리 높은 곳에 익숙해지는 게 나았다.
“이걸 다 배우자니 대출받은 돈이 살살 녹네. 그래도 열심히 준비해서 한 층이라도 더 올라가면 이득이니까.”
기본적인 건 세계정부의 연수원에서 다 가르쳐준다지만, 한 달간의 연수로 배울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결국 높이 올라가고 싶으면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게을러빠진 인간이라도 꿈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부지런해지는 법이었다.
평소 생각하던 내용들을 부지런히 실현하고 다니자 몇 달 지나지 않아 처음 대출받은 돈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추가대출을 받아야 하나.”
돈을 거의 다 써 버렸음에도 남태수는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 덕분에 몸이 튼튼해져 찌든 피로가 사라진 건 물론, 자신감이 늘어 있는 상태였다.
“아냐. 슬슬 연수원 들어가야 하니 필요한 돈도 얼마 안 되는데 예전에 빌려준 돈이나 받아서 해결하자.”
남태수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시설 출신이었다.
당시는 탑의 등장으로 세계정세가 급변하던 혼란기.
나이가 찬 남태수는 고시원 생활 반년 정도나 겨우 가능할 지원금만 달랑 들고 사회로 던져졌다.
고졸에 시설 출신, 아는 것도도 별로 없는 그가 멀쩡한 직장을 찾아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같은 시설 출신의 형들을 따라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시설을 나올 때 받은 자립금을 털어간 개자식들인데…… 덕분에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건 배울 수 있었지? 아마.”
서울에선 원룸 보증금도 안 될 액수의 자립금으로 시설 출신의 고졸이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는 사람, 게다가 숙식제공이라는 조건은 집도 절도 없는 남태수가 혹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그 대가로 반쯤 강탈에 가깝게 돈을 빌려주긴 했으나 플레이어가 될 지금이라면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못 받을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참에 가서 자랑도 좀 하고, 돈도 받아와야지.”
처음에는 그렇게 가벼운 생각이었다.
자랑할 일이 생겼으니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 얼굴이나 한번 보려는.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친구라 할 만한 사람도 없는 남태수로서는 달리 만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시설 선배 염석환은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플레이어 청약에 당첨됐다고?”
“흐흐, 그러니 이제 플레이어님이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와 씨 그거 우선순위자들 때문에 무작위 추첨까지 내려오는 TO는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그게 너한테 걸리네…….”
예상대로 염석환은 남태수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다음, 염석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남태수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럼 너 청약대출 받아서 지금 돈 좀 있겠네.”
“예? 아니 그거 다 훈련하느라 쓰고 없어서 예전에 형한테 빌려준 돈 받으러 온 건데…….”
“그래도 추가대출 나올 거 아니야 새끼야. 나 요즘 돈 들어갈 곳이 많아서 그런데 좀만 빌려주라.”
너무나도 당당한 그 모습에 남태수는 어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얼마가 필요한데요?”
“3,000만원.”
“500빌려준 거 받으러 왔더니 3,000을 내놓으라고 하네. 형, 저 이제 플레이어인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래요?”
“시발 네가 청약에 당첨된 거지, 벌써 탑에 들어갔다 나왔냐? 아직 NPC인 건 똑같은 새끼가 뭘…….”
염석환은 돈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돌변했다.
남태수는 대강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형, 기환이 형이 청약 당첨된 후로 맨날 신경질만 내고 다녔지.’
염석환과 염기환. 염씨 형제는 남태수의 시설 선배로, 그가 시설을 졸업하고 나왔을 때 자신들의 사업장을 소개해준 이들이었다.
전형적인 양아치 사업장에서 갈굼 당하고 살던 남태수는 염기환이 플레이어 청약에 당첨되어 사업장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자신도 덩달아 발을 뺐다.
‘하긴 형제끼리도 돈을 안 빌려주니까 나한테 와서 빌려가던 인간이니…….’
형 염석환은 동생인 염기환이 플레이어가 되면서 ‘쩐주’의 눈에 들자 개같이 버려졌다.
남태수를 갈구던 인간들이 형제끼리라고 친하겠는가?
한평생 갈굼 당하며 살던 동생은 갖가지 방법으로 형을 엿 먹였고, 염석환의 인생은 빠르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괜히 연락했네.’
뒤늦게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태수의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번호는 손에 꼽을 숫자였으므로, 염석환 외에는 연락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잘됐다 너 잠깐 기다려봐라.”
염석환은 갑작스럽게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예 형님. 내일 갚기로 한 돈 말인데요. 여기 동생이 대신 갚아주기로 해서요. 예. 지금 같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남태수는 염석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돈을 빌렸음을,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동생을 만나러 나온 이유가 혹시라도 돈을 더 빌릴 수 있을까 싶어서임을 깨달았다.
“형 미쳤어요, 진짜?”
“청약도 당첨된 새끼가 고작 그 돈을 못 빌려주냐? 지밖에 모르는 새끼. 넌 이제 좆된 줄 알아라.”
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소주를 까던 고깃집 앞에 텔레포트가 시전되었다.
도착한 것은 112레벨의 성기사 남성과 100레벨의 마법사 여성이었다.
“일 때문에 텔레포트 필요하다더니 웬 고깃집? 오빠 설마 밥 먹으러 나오기 귀찮아서 나 부른 거야?”
“시꺼 인마. 돈 빌린 놈 하나가 여기 있다고 해서 온 거니까.”
전형적인 문신 새긴 덩치와 클럽녀 스타일의 커플.
그러나 그 머리 위에 떠 있는 레벨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았다.
‘시발.’
남태수는 그 둘을 알고 있었다.
염씨 형제의 쩐주.
운 좋게 당첨된 탑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132레벨을 찍은,
그걸 바탕으로 여기저기에 끈을 만들어 극동지구 국회의원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인물.
이들은 평소에 염씨 형제 같은 이들의 뒤를 봐주고는 그 대가로 상납금을 받아 간다고 알고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양아치 새끼라도 힘만 세고 싸움만 잘하면 장땡이라 이거지. 좋겠다…….’
남태수 본인도 똑같이 인생역전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그는 한효승을 졸부처럼 폄하하면서도 내심 부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형님 여깁니다.”
그들은 염석환의 얼굴을 보자마자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래. 얘가 네 돈 대신 갚아준다고?”
“예. 이 새끼 이번에 플레이어 청약 당첨돼가지고 돈 좀 있을 겁니다.”
“이야 그럼 후배네? 기환이한테도 후배고.”
그 말에 염석환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염석환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효승은 웃으며 남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세 자릿수 레벨에 달하는 그들은 일반인인 그들에겐 총칼로 무장한 테러리스트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100레벨을 넘긴 한효승은 플레이어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인물이었고, 딱 100레벨인 방지연은 전형적인 버스 받아 100층만 찍은 인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00레벨이 넘은 플레이어란 말은 내가 탑에 갔다 와도 선배로 모셔야 할 인간이라는 뜻…….’
어지간한 사람은 100층을 못 넘으니까 100층이 벽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자기 주제를 잘 아는 남태수로서는 랭커가 되는 것을 꿈꾸는 한편, 현실적으로는 50층만 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100레벨이 넘는 이들을 마주하자 자연스럽게 몸이 굳어졌다.
“계좌 불러줄 테니까 이체해.”
“아, 아니 전 돈 갚아준다고 한 적 없는데 이 형이 마음대로…….”
“뭐? 그래서 안 갚겠다고? 그럼 시발 난 여기 뭐 하러 왔는데? 지연이 텔레포트 쓰는데 들어간 마력은 누가 보상하고?”
마법사의 텔레포트는 같은 거리를 이동했을 때 기름값의 100배 정도로 취급됐다.
물론 이는 고급인력을 써먹는 인건비가 대부분이었기에 지인을 통해 텔레포트해온 한효승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핑곗거리로는 충분했다.
“그냥 대신 갚지? 좋게 좋게 가자고. 어차피 플레이어 될 거면 그 정도는 부담되는 금액도 아니잖아? 아니면 뭐.”
그렇게 말하며 한효승은 남태수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132레벨이 하는 말은 좆으로 들리냐? 너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떼인 돈을 받으러 온 것이었던 남태수에게 빚을 대신 갚아줄 여윳돈이 있을 리 없었다.
덕분에 그날 남태수는 염석환과 함께 인적 없는 골목에서 한껏 얻어터지고, 후에 추가대출을 받아 돈도 상납해야 했다.
억울하게 얻어맞고 돈까지 빼앗긴 상황이었으나 그는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남태수는 청약이 당첨된 예비 플레이어.
지방경찰은 플레이어간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단 핑계를 대며 세계정부에 책임을 떠넘겼고, 세계정부는 남태수가 아직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이니 자기들 관할이 아니라며 지방경찰에게 책임을 떠넘겼으니까.
“씨발, 씨발…….”
이런 꼴을 당하고 나니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더 짜증나는 건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132레벨을 넘기고 나와 한효승에게 복수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개새끼들. 나도, 나도 플레이어가 돼서 NPC 새끼들 삥이나 뜯으면서 개 같이 살 거다.”
남태수는 분노를 연료 삼아 의욕을 불태웠다.
안타깝게도 남태수의 탑 공략은 첫날부터 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박살 났지만 말이다.
* * *
“형 바깥에서도 저한테 돈 빌려가셨죠? 탑에서 나오면 갚겠다고.”
“어? 그랬나? 얼만데? 얼마 안 될 거 아냐? 그거 갚는 건 이제 문제가 아니지. 내가 레벨이 몇인데.”
“3,500이요. 이자 빼고 원금만.”
“3,500? 이게 사람 기억 못 한다고 병신으로 아나. 너한테 빌린 거 끽해야 500인데!”
자기가 빌린 돈은 기억 못 하는 것처럼 굴더니 3,500이라 말하자마자 정확한 금액이 튀어나오는 모습에 남태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형 들어가고 나서 석환이 형이 3,000 더 빌려 가셨거든요.”
“그 새끼가 빌린 걸 왜 나한테 달라고 하는데?”
“아무튼 잘됐네요. 요즘 포인트 쓸 곳도 많았는데. 포인트로도 받을 테니 오늘 안에 갚아주세요.”
“같은 레벨이라고 뵈는 게 없냐? 100레벨도 100층에서 구른 시간만큼 차이가 있는 거 몰라? 보아하니 파티도 없는 마법사 계열인 것 같은데…….”
성기사인 염기환은 갑옷을 두른 몸으로 남태수를 밀어붙이며 위압하려했다.
그러나 타이탄 코어로 재빨리 장갑팔을 장착한 남태수는 손가락 하나로 그를 막아냈다.
“왜? 해보시게요?”
그러곤 반대편 손으로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을 꺼내 들었다.
“자신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