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남태수는 이미 30층의 요정향에서 한번 성좌의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방어기재는 머릿속에서 그날의 일을 지워 버렸고, 무의식만이 성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남았다.
‘사실 그마저도 다행인 편이라고 했던가.’
후에 듣기론 그날 티타니아가 재빨리 결계를 펼치지 않았으면 성진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라고 했다.
성좌의 영혼은 너무나도 거대해 평범한 이들은 그저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쇼크사할 거라고.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백치나 미치광이가 되어 평생 헛소리만 하다가 죽을 거라고도 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기억이 날아갈 정도라면 진짜겠지 그거.’
그리하여 또 성좌가 나타난다 싶으면 바로 도망가겠다 결심한 남태수였으나, 이곳에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무르무르? 아니 그보다 스테이지에 성좌도 등장해?”
“영혼과 카르마를 위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신성존재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진짜 성좌가 나타나는 건 아닐 겁니다.”
성진 또한 탑에 숨어들기 위해 진짜로 카르마를 버려야만 했다.
그러니 스테이지에 불과한 이곳에 진짜 성좌가 나타날 일은 없다.
“다만 마스터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요.”
진짜 성좌가 아니더라도 위험한 건 똑같았다.
당장 눈앞의 성진도 NPC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저만큼 강력한 NPC들이 몰려들면 남태수의 능력으로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길밖에 없었다.
“도망치시지요. 지금은 저 말대로 물러나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어디로?”
최심부인 왕성도 털린 마당에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가.
다행히 그들에게는 왕립 마이스터가 있었다.
“이쪽으로!”
리젤로테는 남태수를 데리고 폐허 속으로 내려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근처에 0번 구획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네.”
“0번 구획이요? 1번이 끝이 아니었어요? 여기가 왕성인데 더 안쪽이 있다고요?”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내가 누군가?”
왕립 마이스터.
전 차원에 퍼져 있는 난쟁이 종족 최고의 장인 중 하나.
“에렉투스의 설계도 내가 했다네. 당연히 0번 구획의 존재도 알고 있지.”
“거긴 또 뭐하는 구획인데요?”
“에렉투스의 모든 구획에 동력을 공급하는 엔진룸.”
삼신기가 보관된 장소였다.
“찾았다.”
[신원확인 완료. 왕립 마이스터 리젤로테. 방문을 허가합니다.]
리젤로테를 따라 들어선 0번 구획은 거대한 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닌가? 반대편에도 건물이 있는데? 구체 형태로 저쪽은 중력이 반대로 작용하나본데?”
돔 두 개를 동그랗게 붙여놓은 모양.
두 돔의 바닥면을 따라 건물들이 다닥다닥 늘어선 모습이었다.
“무슨 몬스터 볼을 정면에서 바라본 것 같은 모양이네.”
“몬스터 볼?”
“그런 게 있어. 친구를 포획해서 담아놓는 물건이지.”
“어떤 천사 같은 장인이 만든 건진 몰라도 정말 끔찍한 물건이로군.”
구획의 중앙부로 향하던 그들은 먼저 와 있던 난쟁이들을 발견했다.
“리젤로테 중장님?”
“친위대인가. 왕족들도 안전히 대피한 모양이군. 길을 열어주게. 폐하를 만나 봬야겠네.”
“아, 안 됩니다. 지금은…….”
병사들이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이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콰아앙!
“폐하!”
중앙의 건물에서 정문을 박살 내며 튕겨 나온 것은 난쟁이 왕자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백성들을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
“포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거야말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이어서 안쪽에서 등장한 것은 난쟁이 왕이었다.
“삼신기로 지켜지는 이곳은 성좌가 직접 나타난다고 해도 뚫리지 않는다! 놈들의 침공을 막지 못할 거라면 뛰어난 장인과 전사들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임을 어찌 모르느냐!”
“나머지 모두를 버리고서라도 말입니까!”
“그렇다.”
“저 위에선 특이점이 난쟁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데 어찌 난쟁이들의 왕이 난쟁이를 버릴 수 있습니까! 그에게 청동망치를 내어준다면 이렇게 숨을 필요 없이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단 말입니다!”
왕자는 절박하게 외쳤지만 왕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리젤로테가 나섰다.
“폐하.”
“마이스터인가. 다행히 제때 대피에 성공한 모양이군.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네.”
“외람되지만 이번 일에 관해선 왕자님의 생각이 맞는 것 같군요.”
“그대도 백성을 버린 왕이라 짐을 비난할 셈인가?”
리젤로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판단은 폐하와 내신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왕립 마이스터이자 방위군 중장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우르릉!!
1구획에 남은 성진이 결국 성좌와 맞붙기 시작했는지 엄청난 진동이 밀려왔다.
“이대로 가면 이곳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삼신기로 보호받는 곳이다. 그 어떤 성좌라도 이곳을 뚫을 순 없어!”
난쟁이들은 거인족이나 용족처럼 신성존재가 왕으로 군림하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이 섬긴 것은 과거 난쟁이 출신 신성존재였던 대장장이 신과, 신이 남긴 3개의 신성무구.
난쟁이 왕가는 각 부족에서 뛰어난 이들을 데려와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경쟁하여 가장 뛰어난 자가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 대의 왕은 뛰어난 장인이었지만, 신성존재는 아니었다.
대신 난쟁이 왕이 사용하는 힘은 대장장이 신의 삼신기에서 나왔다.
사람의 영혼이 카르마를 쌓아 신성존재로 거듭나듯, 물건에도 카르마가 쌓일 수 있다.
천 명의 목을 벤 요도, 가진 자를 미치게 만드는 마검.
그러한 물건들이 끝내 신의 반열에 든 것이 바로 신성무구.
“이곳에는 신성무구가 무려 셋이나 있단 말이다. 신성존재 셋이 지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물론 아무리 강한 성좌라도 신성존재 셋을 홀로 상대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면?”
쿠우우우웅!!
리젤로테의 말에 답하듯 울려 퍼진 진동은 아까보다 커져 있었다.
“……몇 놈이나 쳐들어온 거지?”
“제 계산대로라면 다섯. 삼신기의 보호를 뚫기에는 충분한 숫자입니다.”
“큰일이로군.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특이점에게 신기를 내어줄 수는 없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홀로 다섯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게 아니냐.”
콰아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천장이 부서지며 신성광휘가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무기를 꺼내 들고 경계했으나, 신성광휘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NPC 성진이었다.
“더럽게 단단하군.”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전갈의 꼬리를 집어던졌다.
꼬리에서 흘러나온 독기는 순식간에 주변을 녹여 버렸다.
“성진 씨, 그건…….”
“질병과 쇠약의 성좌다. 힘이 달려서 꼬리밖에 자르지 못했어.”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침을 뱉었다.
꼬리의 독기와 같이 새까만 침은 땅에 닿자마자 빠르게 타들어갔다.
이미 성좌의 독에 완전히 중독된 상태라는 뜻이었다.
“맨손으로 성좌의 꼬리를 잘라왔다고요……?”
그에 왕자가 외쳤다.
“난쟁이 전사들이여! 저 모습을 보라! 특이점이 성좌의 꼬리를 잘라왔다!”
“우리가 성좌가 두렵다며 숨어드는 동안 그는 놈들과 맞서 싸웠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무기를 들고 나와라! 특이점에게 난쟁이 전사의 명예를 보여라!!!”
그 말에 전사들이 호응했다.
“젠장 어차피 여기까지 뚫렸으면 어쩔 수 없지.”
“나가 싸우자고. 싸우다 죽는 거다.”
이미 그들을 지켜주던 보호막이 뚫린 상황.
왕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리젤로테는 그런 왕에게 쐐기를 박았다.
“이대로 나가 싸우면 다 죽을 겁니다. 폐하, 전사에게 망치를.”
망치와 모루, 그리고 화로.
대장장이 신이 그의 후손들을 위해 남긴 3개의 신성무구.
“……사용을 허가하네.”
그중 전사의 신기가 전사의 손에 쥐어졌다.
“성진 씨!”
왕의 허가가 떨어지자 청동망치는 스스로 신성광휘를 내뿜으며 성진의 손에 나타났다.
성진은 남태수의 외침에 그와 리젤로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잘했다.”
“예?”
“사룡왕이 네놈만을 보낸 이유가 있었군.”
오해였지만 성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떨어졌던 구멍으로 뛰어올랐다.
그 뒤를 따라 수많은 난쟁이 전사들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어서 마력과 카르마가 뒤 섞인 엄청난 폭발이 터져 나갔다.
“으음, 당장 죽을 위기를 넘긴 건 좋지만 이제 정말 어떡하지…….”
남태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스테이지의 클리어 조건은 NPC 성진을 쓰러뜨리는 것.
망치까지 손에 넣은 이상, 성좌들도 그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실제 역사와 너무 달라져 버렸군요.”
“실제 역사는 어땠는데?”
“에렉투스의 난쟁이들은 소수의 생존자를 제외하면 왕을 포함해 모두 죽었습니다. 망치가 계약자님의 손에 쥐어진 것은 왕이 죽은 후라고 알려져 있지요.”
즉, 실제로는 0번 구획까지 다 털린 뒤에야 성진이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단 이야기였다.
“원래 역사에선 리젤로테 중장도 타이탄 격납고에서 죽었다. 마스터의 존재가 거기서부터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입니다.”
실제 역사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었지만,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남태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물론 상관이 있지요. 계약자님께서 하나를 들고 나가긴 했지만 이곳에는 삼신기 중 둘이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스테이지에 등장한 삼신기는 실제 신성무구가 아니라 그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설정된 가짜일 뿐이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에렉투스 전체에 동력을 공급하던 물건이라면 3분의 2만 가지고도 충분하겠지요.”
옆에서 역사적 사건이 재현되고 있는 동안 무르무르는 이곳 구획에 해킹을 시도하고 있었다.
현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4세대 타이탄 코어.
난쟁이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코어의 성능을 바탕으로 무르무르는 에렉투스의 심장부에 뿌리내리는데 성공했다.
“난쟁이들의 모선에는 행성파괴병기가 여럿 달려 있지요. 적의 해킹을 대비해 모선의 설계도는 코어에 저장해두지 않았지만, 각각의 병기들은 저장되어 있는 걸 확인해뒀습니다.”
구획 전체를 재료삼아 난쟁이들의 행성파괴병기를 재현한다.
그것으로 만들어진 포대는 분명 거대하지만, 딱히 특별할 건 없는 로켓 발사대 정도의 사이즈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포탄이 발사된 순간, 모든 별들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포탄은 포신 내에서 가속한 뒤, 포구로 나오는 대신 공간이동으로 날아갔다.
직후, 성진과 성좌들이 뒤엉킨 곳 인근에서 등장한 포탄은 그 자리에서 바로 폭발했다.
“이 개같……!”
그 와중에 NPC 성진이 뭐라 외친 것 같았으나 그 목소리는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에 묻혀 버렸다.
[스테이지 클리어.]
“후폭풍에 주의하십시오.”
“뭐?”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과정에 폭압으로 죽는 수가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폭압이 행성을 강타했다.
이어서 에렉투스 행성 전체가 0구획을 향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악!”
부서진 구획들의 잔해가 0구획 천장에 난 구멍으로 떨어져 내리는 상황.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가?
진짜로 하늘이 무너지니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구와아악! 죽는다! 나 죽어!”
1구획의 지표면이 무너지며 왕성의 잔해가 남태수의 머리통을 강타하려는 그 순간.
[퍼펙트 클리어!]
[기여도 순위]
- 100%
(소수점 이하의 기여도는 표기되지 않습니다.)
[기여도 보상을 추가 지급합니다.]
[스킬 포인트를 추가 지급합니다.]
[다음 층으로 진행이 가능합니다.]
남태수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다음 층으로 진행! 빨리 진행!!! 제발 진행!!!”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90 > Lv.91]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졌다.
“아코!”
몸을 던지고 있던 남태수는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91층으로 넘어온 건가? 겨우 살았다…….”
상황을 확인한 남태수는 한숨과 함께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진정하고 시스템 창을 열어 다나가 보내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둘이 벌써 100층까지 올라가 있네. 그럼 91층부터 99층까지는 혼자 깨야 하는 건가…….”
90번대 층들이 암만 어려워 봐야 방금 그가 깨고 나온 스테이지의 뒤편만 할까.
거기에 타이탄도 생겼으니 최소한 위험할 일은 거의 없어졌으리라.
다시금 드론으로 변해 남태수 근처를 둥둥 떠다니던 무르무르는 위잉! 하며 모터 소리를 냈다.
이어서 남태수의 스킬창에 막 사룡왕의 메시지가 적이기 시작했다.
[케헤헤, 여가 드디어 해당 타이탄의 정보를 알아왔느니라! 그 물건은 무려 4세대 타이탄으로 카르마 인버터가 달린…… 어라?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남태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스킬창을 확인하곤, 그냥 다시 드러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