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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네.”
“벌써요?”
“설비는 다 있으니까. 미래의 내가 이걸 만들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호환성과 규격화에 신경을 많이 쓴 설계더군.”
남태수는 리젤로테가 내민 타이탄 코어를 받아들었다.
[신규 사용자 등록.]
[용의 피 확인. 사용자 남태수를 동맹원 자격으로 등록합니다.]
[사용자 콘솔 개방.]
[출력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기능이 정지 상태입니다. 호환 가능한 에너지를 충전해주십시오.]
올바른 사용법대로 사용자 등록을 마치자 코어의 관리 콘솔이 열렸다.
콘솔창의 대부분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지만, 기본적인 정보 확인은 가능했다.
[호환 가능한 무장 목록.]
-강화장갑 계통
-탑승물 계통
-특수장비 계통
[본 코어는 4세대 종결기로, 모든 무장 설계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지정된 격납고의 무장을 소환하는 대신 현장의 재료를 바탕으로 실시간 제작이 가능합니다.]
내용 자체는 앞서 리젤로테가 말한 대로였다.
“아직은 동력이 부족해서 되는 게 거의 없을 걸세. 알아서 카르마를 충전해서 쓰게나.”
그 말에 남태수는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카르마는 또 어떻게 쓰는 건데?’
성진의 카르마 효과를 받아보기야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남태수는 카르마라는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마스터는 아직 마법도 미숙한 상태라 카르마를 다루는 법은 설명하지 않았었는데 곤란하게 되었군요.
리젤로테는 곤란해하는 남태수의 얼굴을 보더니 곧 잊고 있었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아, 여긴 탑 안이랬지? 그렇다면 카르마를 쓰는 건 성좌의 눈길을 끌 수도 있겠군. 카르마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힘은 다 호환이 될 테니 마력이든 전력이든 아무거나 충전해서 쓰게나.”
그 말에 남태수는 마력을 불어넣어 무언가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거 아까 본 기계팔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연결된 격납고가 없습니다.]
[소환 불가능, 제작만 가능합니다.]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부족합니다.]
[부족한 재료.]
-타이탄강(鋼)
-3등급 이상의 마력전도체
[대체제로 무장을 제작할 시 성능 하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작하시겠습니까?]
“제작.”
명령이 떨어지자 남태수의 코어가 역장을 퍼뜨렸다.
그 안에서 주위의 흙이나 금속 등이 자력에 이끌리듯 남태수의 오른팔으로 모여들어 기계팔을 이루었다.
완성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4초 남짓.
남태수는 어느새 소형 타이탄 기계팔을 장착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식으로 자동 제작이 가능하다는 거지? 무슨 SCV가 된 기분인걸. 아니면 네모난 광부인가? 재료만 있으면 뚝딱뚝딱하게. 다이아 곡괭이라도 만들어봐?”
그는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감탄했다.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묵직한 느낌은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리젤로테는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작동하는군.”
“작동법은 금방 알겠는데. 성능도 확인해봐야겠지?”
남태수는 인벤토리에서 금속제 투구 하나를 꺼내 강화장갑을 낀 팔로 꽉 쥐어보았다.
끼익! 끼리릭!
강철투구는 남태수의 손에서 신문지처럼 구겨져 공처럼 다져져 버렸다.
“……개쎈데?”
90레벨인 남태수는 분명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직업이 마법 계통인 이상 힘이 그렇게 센 편은 아니었다.
반면 지금 자신이 구겨 버린 이 투구는 에렉투스에 전시되어 있던 보물 중 하나로, 유니크 등급 투구였다.
탱크가 밟고 지나가도 기스 하나 안 날 물건이라는 뜻.
그런데 남태수는 지금 그것을 한 손으로, 휘는 것도 아니라 완전히 구겨 버린 것이었다.
“힘도 얼마 안 줬는데 이 정도라고?”
심지어 이 기계팔은 코어에 저장된 설계도 중에서도 가장 싼, 단순 작업용 강화외골격이었다.
“잠깐. 이제 보니 이거 목록에 무슨 우주전함도 있는데?”
“에렉투스의 지하대던전과 난쟁이 모선인 트리니티를 제외한 모든 설계가 저장되어 있다네. 물론 제작 재료는 별개인 데다 전함급을 움직이려면 코어가 여럿 필요하겠지만, 이론상 4세대 코어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으니 나중에는 혼자서도 전함을 움직일 수 있겠지.”
전사 하나하나를 군대로 만들어주는 병기.
나라가 망해도 전사가 홀로 싸울 수 있게 만든 병기가 바로 타이탄이었다.
-사룡왕 폐하께서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신 이유가 있군요. 코어에 저장된 설계 데이터만 모아도 엄청난 가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실시간으로 만들어 쓸 수도 있다?
이런 물건을 갖춘 초인군단이라면 우주정복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반대로 신성존재가 그만큼 세다는 건가?’
어찌 되었든 엄청난 무기인 건 확실했다.
-자 그럼 이걸로 타이탄의 수리는 완료했습니다만 이 스테이지에서는 어떻게 나가실 겁니까? 스테이지 목표는 NPC로 등장한 계약자님을 쓰러뜨리는 겁니다만.
“그러게.”
타이탄의 수리를 마쳤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성진을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심지어 이 시점의 성진은 카르마를 버리기 전이 아닌가?
과거인 만큼 전성기보다야 약하겠지만, 탑에 들어오기 위해 힘을 버린 지금의 성진보다 강할 게 분명했다.
“그나마 위안인 점은 NPC 성진 씨한테는 청동망치가 없다는 건데.”
그렇다고 자신이 이길 것 같진 않았다.
“자, 자해라도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계약자님 성격에 그게 통하겠습니까?
리젤로테가 특이한 경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NPC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방어기재가 작용해 공격적으로 반응하리라.
하물며 성진이라면?
‘당신은 사실 진짜 주성진이 아니라 NPC입니다.’
‘그럼 너는 남태수가 아니라 그냥 시체로군.’
곰의 앞발 후려치기는 사람을 찢는다.
‘성진 씨의 앞발 후려치기는 성벽도 찢겠지.’
개소리 말라고 한 대만 얻어맞아도 잘 찌그러뜨린 음료수 캔처럼 납작해지리라.
-원래 NPC들에게는 인식 저해가 걸려 있습니다. 요정공주 같이 강인한 영혼이 아니라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라도 무시하게 되지요.
“리젤로테 씨는 여긴 관리자도 없이 임시로 만들어진 스테이지라 그런 건가.”
그런 고로 NPC 성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스테이지 클리어를 위한 협조를 받아내기는 힘들다고 봐야 했다.
“흐음. 이 스테이지의 보스가 바로 그 특이점인가 보군?”
남태수가 머리를 싸매는 모습에 보고 있던 리젤로테가 입을 열었다.
“예, 일단 그렇게 되었는데요…….”
“듣자 하니 특이점은 이곳에서 망치를 얻어 천사를 쓸어버린 모양인데. 그렇다면 간단하지 않은가.”
“……?”
“망치를 숨기게. 그가 무기를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해.”
역사가 바뀌면 결과도 달라지리라.
어차피 이 모든 건 스테이지. 남태수는 스테이지만 클리어하면 된다.
성진이 천사들의 손에 쓰러진다면 스테이지 클리어는 문제없으리라.
“왕성을 털게.”
“하, 하지만 그걸 무슨 수로요? 저는 망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삼신기라면서요. 분명 엄중히 보관되어 있을 거 아니에요?”
“무슨 수로 털긴.”
리젤로테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왕립 마이스터가 여기 있지 않나.”
* * *
에렉투스는 가장 바깥쪽 구획을 100번으로, 가장 안쪽의 1번까지 양파처럼 겹겹이 포개진 구획들의 집합이었다.
당연하게도 100번 구획이 가장 넓고 1번 구획이 가장 좁았지만, 그마저도 한반도보단 컸다.
제 1구획, 왕성.
“……다 불타고 있는데?”
남태수와 리젤로테가 왕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방이 불바다였다.
“특이점의 손이 닿지 않는 방면으로 돌아 들어온 모양이군요.”
리젤로테는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천사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성진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에렉투스만한 넓이를 다 지킬 수 없으니 생긴 일이었다.
“이럼 망한 거 아냐? 아닌가? 어쨌든 망치는 성진 씨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테니 괜찮은가?”
“잘은 모르지만 자네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을 텐데.”
“무슨 문제요?”
“특이점을 쓰러뜨리는 건 둘째 치고 일단 자네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리젤로테는 그러면서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천사들을 가리켰다.
“천사는 잘 잡나?”
남태수는 잠시 이전 스테이지에서 성진이 천사와 싸우던 모습들을 떠올리고는 눈앞을 바라보았다.
“아닐걸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잘 잡아야 되겠군.”
그와 동시에 수백 발의 파괴광선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스터!
황급히 남태수와 교대한 무르무르는 비석을 불러내 파괴광선을 막아냈다.
-할 수 있겠어?
“절대적인 마력량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것도 곧 뚫리겠군요.”
-안 되는 거야? 나도 여기서 죽는다고?
전투천사들의 파괴광선과 보호막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무기였다.
거기에 적들의 물량까지 생각하면 그 화력에 정면으로 승부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아니오.”
무르무르는 남태수의 호들갑을 사전에 차단했다.
“사령술사라면 사령술사답게 싸워야지요.”
이어서 그는 리젤로테를 바라보았다.
“육군중장이십니까 공군중장이십니까?”
그 물음에 리젤로테는 드론 상태로 떠 있는 두 개의 타이탄 코어를 가리켰다.
“둘 다.”
무르무르는 살아 있는 그림자를 이용해 리젤로테를 삼켰다.
이어서 전장의 그림자를 타고 천사들의 화망을 우회한 리젤로테가 하늘을 향해 포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난쟁이가 쏘아올린 마력펄스탄이 EMP 효과를 천사들의 육감을 차단한 직후.
“전탄발사.”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방에 깔아둔 무수한 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천사들은 황급히 방어막을 치는 한편 포탄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파괴광선을 쏘아댔지만 이미 리젤로테는 자리를 뜬 상태였다.
-와…….
“아직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마스터.”
-응?
“천사 놈들, 난쟁이와 싸우는 거라고 시체를 그냥 버려뒀군요.”
자신을 향한 화력이 분산되고, 전장에 시체가 늘어가기 시작하자 무르무르는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부탁합니다. 마티아스.”
무르무르의 마법이 발동되자 일백 기의 데스나이트들이 일어났다.
마티아스를 비롯한 요정기사들과, 명예의 전당에 있던 전사형 챔피언들.
한 때 천사와 싸우던 그들은 천사의 육체를 이용해 언데드로 부활했다.
“시체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육체가 망가져도 계속 되살려드릴 테니 마음껏 싸우고 오십시오.”
-존명.
천사로 만들어낸 데스나이트 100기.
그 선두에 마검과 AK를 든 마티아스가 자리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전부 적이군. 옛날 생각나는데.
-죄다 싸움이라곤 파괴광선을 쏘는 것밖에 모르는 전투천사뿐이네? 천사 놈들, 소모품부터 밀어 넣은 건가.
-어이 요정기사 양반. 당신이 대장인 것 같은데 작전은?
다른 데스나이트들의 질문에 마티아스는 간단히 답했다.
-눈앞에 보이는 천사를 전부 죽인다.
-거 참 마음에 드네.
대전쟁에서 활약하던 베테랑들이 다시금 전장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