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70화 (70/170)

<70>

“따로 움직이죠.”

남태수는 NPC 성진이 돌아오자마자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전했다.

‘어차피 역사대로라면 원래 여기서 성진 씨가 이기잖아? 그럼 내가 손대지 않아도 괜찮은 거 아냐?’

이런 전장에서 남태수의 존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타이탄 코어의 수리.

‘그렇다면 천사들은 NPC 성진 씨에게 맡겨두고 나는 내 할 일 하면 되잖아.’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알겠다. 이게 그 녀석이 의도한 상황이라면 네게도 뭔가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

다행히 NPC 성진은 사룡왕과의 연결점 덕분에 남태수의 말을 들어주었다.

다음으로는 난쟁이들에게 타이탄을 수리할 방법을 수소문했다.

“타이탄을 수리하고 싶다고?”

“예. 방법이 없을까요?”

“그거라면 안쪽까지 들어가야 할 거요. 그런 중요한 기술을 외곽에 배치했을 리는 없으니.”

“아예 우리랑 같이 가지 그래?”

이미 분리된 구획이었지만 탈출정은 남아 있었다.

남태수는 피난민들과 함께 탈출정으로 이동했다.

“늦게 온 놈들은 다른 쪽으로 가! 이만한 인원들을 여기에 다 태울 순 없다고!”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남태수는 살아 있는 그림자를 불러내 난쟁이들을 모두 그림자 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이거라면 나 하나 탈 자리만 있으면 충분하지.”

온통 난쟁이뿐인 스테이지.

피난민을 데려간다면 최소한 다른 난쟁이들에게 적대되는 일은 없으리라.

[타이탄 코어를 확인.]

[현재 모든 타이탄 오너에게는 부대복귀 명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탈출정의 경로를 수정합니다.]

[제3격납고로 이동합니다.]

“엑.”

남태수는 예상치 못한 메시지에 어떻게 행선지를 변경할 수 없나 계기판을 뒤적거렸다.

“조종간 같은 거 없나? 젠장 마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잖아? 기계가 왜 마력으로 움직이고 난리야.”

-세상 만물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는 데다 조작도 쉽고 간편하니 안 쓸 이유가 없지요.

“끄응, 어차피 타이탄 시설로 가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어쩐지 끌려가는 것 같아서 불안한데…….”

-마스터 인생이야 늘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십시오. 피난민을 데려왔으니 다소의 트러블은 무마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려고 사람들을 챙긴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괜찮게 된 셈이었다.

도착할 때까진 시간이 있었으므로 남태수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일단 숨을 돌리고 나니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SF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이것들이 죄다 마도공학의 산물이라는 거지? 이런 건 원래 과학기술의 영역이어야 하는 거 아냐? 무슨 판타지가 다 해먹어?”

-마법을 쓴다고 다 판타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체감하셨을 텐데요. 마력도 중력이나 전자기력처럼 세상의 근간이 되는 힘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지구에는 탑이 생기기 전까지 마력이 없었잖아?”

-그게 의문이지요.

무르무르가 보기에 지구는 굉장히 이상한 경우에 속해 있었다.

-마력이 없는 세상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 때문에 성좌들도 오래도록 지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지요. 이는 굉장히 이질적인 일입니다.

세상 만물에는 마력이 깃든다.

자연적으로 마력이 없어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지구에서 마력을 없앴다고? 누가? 왜?”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신성존재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신이 있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살던 무르무르는 뒷말을 삼켰다.

어쩌면 아브라함이 믿고 따랐다는 그 존재가 신성존재이며,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다른 종교의 신들을 악마로 격하시키듯 지구상에서 마력도 없앤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세계의 리치로서의 추측이었기에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탄 탈출정이 제3격납고에 도착했다.

“뭐야? 난쟁이가 아니잖아? 당신 누구야? 여긴 타이탄 오너나 엔지니어에게만 공개된 좌표인데?”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인간을 경계하며 남태수를 체포하려 들었다.

그러나 사령술사로 온갖 스테이지에서 핍박받아온 남태수는 이러한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했다.

“잠깐! 여길 좀 보시죠!”

남태수의 그림자에서 수많은 난쟁이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하자 병사들 사이에서 그들을 알아본 이들이 나타났다.

“어어? 한스 엄마?”

“세리 씨?”

“당신들 89구획에서 넘어온 건가!”

89구획 피난민들을 본 병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오오, 살아 있었구나! 천만다행이다!”

“저 아저씨가 마법으로 모두 탈출정애 태워줬어!”

“키다리 양반, 특이점의 동료라고? 고맙네, 정말 고마워.”

제때 대피하지 못한 가족들을 걱정하던 이들은 남태수를 붙잡고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남태수는 분위기가 훈훈해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사실 저는 타이탄을 고치러 왔는데요…….”

“엉? 인간이 타이탄을 탈 수 있나?”

“누가 타든 무슨 상관인가? 당장 우릴 도와주러 온 전사가 무기를 고쳐달라는데! 장인으로서 이 모습을 그냥 넘어갈 순 없지!”

타이탄 엔지니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남태수를 도우러 나섰다.

그리고는 남태수가 내민 타이탄 코어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뭐, 뭔가 이게……?”

“예? 뭔가 문제라도?”

“내 100년 외길인생에서 이런 코어는 처음 보네.”

“어딜 100년 차 꼬꼬마가 나서? 난 250년인데도 처음 본다!”

“300년도 동문이오!”

“450년도!”

장인들은 이상한 부분에서 경쟁심을 불태웠으나 남태수로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못 고쳐요?”

“아니 이 양반아! 그렇다고 못 고치는 건 아니고! 우리도 고칠 순 있는데!”

“멋대로 손댔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마이스터한테 들고 가는 게 좋겠는데?”

“마이스터?”

“타이탄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진행한 것은 7인의 왕립 마이스터들일세. 누가 뭐래도 이 세상에서 타이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그들이지.”

“둘은 죽고 하난 실종, 하난 배신해서 남은 건 셋뿐이지만, 제3격납고는 세 번째 마이스터의 공병창이기도 하거든.”

그들은 남태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길세.”

문이 열리자 강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용광로로 가득한 그곳에는 한 소녀, 아니 난쟁이이니 성인임이 분명한 여성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를 묶어 올리고 사람 몸통만한 기계팔을 양쪽에 장착한 모습.

기계팔에 흐르는 마력을 본 남태수는 흠칫했다.

양쪽에 하나씩 두 개의 타이탄 코어가 박힌 기계팔에는 대천사였던 춘식이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엄청난 마력이 담겨있었다.

“중장님! 지금 당장 이것 좀 봐주셔야겠습니다!”

‘중장?’

마이스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작업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돌아서자 자동으로 얼굴을 가리던 바이저가 올라가고 기계팔이 벌어지며 착용이 해제되었다.

이어서 기계팔은 이리저리 형태를 바꾸더니 드론으로 변해 그녀의 뒤에 둥둥 떠서 따라붙었다.

“뭔데?”

에렉투스 방위군 소속 중장.

왕립 마이스터 리젤로테.

“특이점이랑 같이 온 양반인데 타이탄 코어가 망가졌답니다. 근데 죄다 처음 보는 형식이더군요.”

“보자.”

남태수가 타이탄 코어를 꺼내 들자 리젤로테의 머리 위에서 현미경처럼 변한 바이저가 다시 내려왔다.

“뭐야 이게.”

“설마 중장님도 모르십니까?”

“아니, 아는데 알아서 문제야.”

리젤로테는 계속해서 코어를 살펴보며 말했다.

“카르마 인버터가 들어간 4세대 타이탄 코어. 아직 개념만 제시된 상태의 물건이 왜 실제로 존재하는 거지?”

리젤로테는 그렇게 말하며 남태수를 올려다보았다.

“당장 3세대 시험기도 아직 안 만들어졌는데 왜 4세대 타이탄 코어가 여기에 있나.”

바이저가 다시 젖혀지자 리젤로테의 눈이 남태수와 마주쳤다.

“그것도 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날인이 들어간 물건이 말이야.”

“예?”

“그런가. 그런 거라면 설명이 되는군.”

리젤로테는 남태수가 당황하건 말건 혼자 이것저것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NPC로군?”

리젤로테는 스스로 자신이 NPC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앗, 그, 저, 그게…….”

“당황하는 걸 보니 확실하군. 이것 참. 내가 NPC였다니.”

탑의 NPC는 티타니아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전부 단순한 기계나 다름없었다.

NPC의 몸 안에 들어간 영혼은 그저 컴퓨터 칩과 같은 회로일 뿐. 그와는 상관없는 영혼이었다.

NPC의 정보와 행동패턴은 탑의 영혼들에게서 뽑아낸 사념을 바탕으로 정해진다.

이 말은 영혼이 NPC의 행동에 관여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며,

리젤로테가 자신이 NPC라는 걸 깨달은 것은 순전히 영혼들이 기억하는 리젤로테라는 인물은 원래 이럴만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나라는 개판이라 곧 멸망할 것 같지, 이 시점에 존재하면 안 될 물건이 나타나지, 카르마를 읽을 수 없는 이상한 놈이 튀어나오지.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네.”

“그, 그런가요…….”

자신이 임시로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오히려 남태수가 당황했다.

“내가 이상해 보이나? 하지만 생각해보게.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네가 나타났다는 건 새로운 희망이 태어난 셈이라네.”

“예?”

“플레이어가 있고, NPC가 있다는 건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라는 거 아닌가.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내가 진짜든 가짜든 놈들에게 엿을 먹일 기회가 왔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런 사소한 문제에 고뇌할 필요는 없다.

“자네의 타이탄, 고쳐주지.”

리젤로테의 무지막지한 논리에 입을 떡 벌리고 굳어진 남태수에게 그녀가 덧붙였다.

“미래의 내가 만들었을 물건이라니. 뜯어보는 게 참 재미있겠어.”

그 미소는 너무나도 순수한 공학자로서의 미소라 남태수는 잠시 앞선 모든 말들이 다 거짓말이고 저게 진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겠지.’

자신이 가짜라는 걸 알고도 그걸 그냥 넘기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무던한 인간이거나, 정말로 자기 자신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하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리젤로테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작업을 시작했다.

“카르마 인버터. 사용자의 카르마 자체를 타이탄의 동력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이 물건은 난쟁이 기술의 총아라네.”

“아, 예.”

남태수는 리젤로테가 뭐 하나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뭔가를 설명하고 싶어 보였기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었다.

“사용자의 카르마를 바탕으로 작동하고, 작동하며 코어 자체에도 카르마가 쌓인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능력이 발전하는 시스템. 이론상 4세대 코어의 잠재력은 무한대라네.”

“코어에 카르마가 쌓인다는 건, 그 신성무구처럼 된다는 거죠? 난쟁이 삼신기의 청동망치처럼요.”

“잘 알고 있군? 에렉투스가 멸망해도 청동망치는 성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잘 챙긴 모양이야?”

“성진 씨, 그러니까 특이점이 잘 쓰고 있어요. 그걸로 성좌도 몇 명 잡았다고 하고.”

“처음 사룡왕이 살아있는 존재를 데리고 다닌다고 들었을 때는 노망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특이점이라는 자가 진짜로 보통이 아니긴 한가 보군?”

리젤로테는 성진에 대해서 잘 모르는 눈치였다.

성진이라고 처음부터 모두의 지지를 받는 강자는 아니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4세대 타이탄에는 3세대 타이탄의 기술도 들어있다네.”

“그게 뭔데요?”

“물질재조합 기술. 간단히 말해 재료만 있으면 내장된 설계도에 따라 무엇이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이지.”

이는 지금처럼 대규모 격납고와 수많은 외장갑을 대체하기 위한 기능이었다.

“마법사들은 아무 데서나 골렘을 불러내고 그러지 않나? 그와 마찬가지네. 타이탄 오너들이 코어만 들고 다니다가 주변에 있는 금속들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타이탄의 몸체를 만들어내 탑승하는 거지.”

그것이 바로 타이탄 사용자들이 파일럿이 아니라 오너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전투 중 보급이나 화력지원이 끊기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지. 현지에서 몸체를 만들어 쓸 수 있다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네.”

코어와 오너만 멀쩡하면 어떤 상황이라도 계속 싸워나갈 수 있다.

동력은 오너의 카르마에서, 보급은 주위의 물질을 재조합하면 되니까.

“다 됐네.”

수리는 반나절 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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