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이게 바로 룬 마술의 힘이다. 기회가 있을 때 잘 봐둬라.”
베르나데트를 비롯한 센트럴 시티 플레이어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시간.
성진은 다나와 남태수를 모아놓고 무기나 팔 등을 강화하며 룬 마술을 시연했다.
“어차피 본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것도 정령술처럼 선택받은 사람만 쓸 수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기본적으로는 룬과 사용 자격을 보유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게 맞다. 하지만 나와 함께하는 동안에는 이론상 너희들도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불패의 선봉장 카르마 효과는 엄밀히 말해 부하들을 나처럼 ‘강화시키는’ 카르마가 아니라, ‘나처럼’ 강화시키는 힘이니까.”
비록 그 수준은 원본에 비해 떨어질지언정, 자신이 가진 능력을 동료들에게 전파시키는 힘.
“내가 거신왕의 황금룬을 가지고 있으면 너희들도 이 룬의 힘을 쓸 수 있다.”
부하들의 스펙이 강화되는 건 어디까지나 부가효과.
단순히 성진이 너무 강해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했다.
“물론 룬 마술을 배운 적 없는 너희들은 자격요건이 갖춰졌다고 그냥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다만 혹시 모를 일들을 생각하면 방법 정도는 알아두는 게 도움이 될 거다.”
총알이 없는 총이라도 총 쏘는 법 정도는 알아두는 편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룬 마술은 그 특성상 어쩌면 그냥 쓸 수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무르무르는 남태수가 사령술을 내버려 두고 또 다른 걸 배운다는 소리에 황급히 견제를 넣었다.
-사령술도 제대로 못 다루는 마스터가 룬 마술까지 쓸 수 있겠습니까?
“사령술은 영혼에 대한 이해와 통찰, 그리고 마법적인 소양이 필요하지. 정령술은 무엇보다도 정령, 티타니아와의 교감과 관계성이 중요하고. 반면 룬 마술은 다르다.”
룬 마술은 신성존재의 기술 중에서도 가장 습득이 쉬운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원래는 거인족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너희는 이미 내 카르마 효과로 자격을 갖추었다. 사용방법만 알면 돼.”
“사령술도 그 방법을 배우는 게 어려워서 이러고 있는 건데…….”
“싸움밖에 모르는 저 거인들도 쓸 수 있는 기술이다. 그 방법이 어려울 리 없잖나.”
룬 마술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필요한 건 강력한 의지다.”
“의지요?”
“영혼의 이해, 섬세한 마력조작 그런 건 다 필요 없다. 룬 마술에 필요한 건 정확한 이해보다는 강력한 의지다.”
투쟁을 원하는 전사들을 위한 기술.
룬 마술은 끝없이 싸우고 싶다는 거인들의 열망으로 만들어진 기술이었다.
“그게 뭐야…….”
남태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거인의 영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기도 처음 들었다는 듯이 멍하니 성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거였어?
-싸움을 누가 생각하면서 해. 그냥 하는 거지.
“대부분의 거인들은 그냥 생각이 없을 거다. 하지만 룬 마술에 한해선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지. 딴생각 없이 오로지 싸움만을 원한다면 그만큼 싸움을 바라는 의지도 커질 테니까.”
바보라도 쓸 수 있는.
오히려 바보라서 더 강력할 수도 있는 기술.
자세한 원리 따윈 필요 없이 피상적인 이해만으로도 사용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아이젠그라드 너도 자신이 모자란 놈이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강해질 수 있는 건 너도 마찬가지이니.”
-……!
성진의 말에 아이젠그라드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말만으로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던 기억을 전부 잊을 순 없겠지만 이것이 계기가 된다면 그도 더 나아갈 수 있으리라.
“뭔가…… 되게 거인답네요.”
“……?”
이미 거인족이란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제대로 맛본 남태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다나로서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방법을 알아두는 걸로 충분하다. 특성상 죽을 위기에 처하든가 하면 알아서 써질 테니.”
인간의 의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하면 역시 생존본능이었다.
아이가 차에 깔리면 엄마가 차를 들어 올리고, 화재현장에서 괴력이 발휘되듯 ‘수틀리면 어떻게든 되는’ 기술이 바로 룬 마술이었으니까.
-거인족은 죽였다 싶으면 더 강해져서 되살아나는 전투종족. 그게 다 룬 마술이 그런 방식이었던 덕이었군요.
거인족 내에서도 구체적인 이유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무르무르도 룬 마술의 작동방식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뭔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특성이네.”
-반대로 그 정도는 되어야 순수 전사종족이 8대 종족의 반열에 드는 거겠지요.
성진은 베르나데트가 올 때까지 두 사람에게 룬 마술을 체감시켜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 질문이다. 현재 룬 마술로 강화된 건 내 오른손일까? 왼손일까? 잘 골라서 피해 봐라.”
“오, 오른손?”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바라보았으나 룬 마술은 마력 대신 카르마를 쓰는 기술이라 육감으로는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럼 왼손?”
형태의 거대화라도 한다면 구분이 가능하겠지만, 위력의 극대화만을 사용한 룬 마술은 시각적으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결국 남태수가 할 수 있는 건 ‘눈치껏 알아서 잘’ 찍어보는 것뿐.
“설마 양손 다?”
“정답이다.”
따악!
룬 마술로 강화된 성진의 딱밤이 허공을 때리자 남태수는 풍압만으로 튕겨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룬 마술은 마력이 아닌 카르마를 이용한 기술이다. 이걸 빠르게 익힐 방법은 역시 직접 당해가면서 익히는 수밖에 없지.”
남태수가 열심히 얻어맞는 것에 비해 다나는 틀려도 피지컬로 피하면서 어떻게든 버텼다.
“아니 피하는 게 어디 있어!”
“피할 수 있는데 맞을 필요도 없잖아요. 혹시…… 태수 아재는 못 피하세요? 에이 설마, 사룡왕의 사도가 그렇게 허접일 리 없잖아요.”
“맞는 말이다. 피하는 것도 능력이지.”
억울하면 너도 피하든가.
안타깝게도 남태수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억울해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눈물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스! 말씀하신 대로 거인층 내에 숨어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을 적발했습니다! 이제 이 안에 남아 있는 건 우리 측 플레이어뿐이니 언제든지 클리어 하셔도 됩니다!”
베르나데트는 어쩐지 눈에 익은 한 경비행기를 ‘징발’하여 하늘을 날아왔다.
“그 비행기는?”
“남태수의 이름으로 빌렸습니다.”
“거기서 내 이름이 왜 나와?”
“이름만 나와도 벌벌 떨던데요?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아니 그러면 뺏긴 사람이 나가서 내 이름을 댈 거 아냐?”
-비행기 하이재킹이라. 그것도 테러리스트의 소양 중 하나라 할 수 있지요.
“왜 나만???”
이젠 빼도 박도 못할 테러리스트가 되어 버린 남태수였다.
* * *
한편 성진이 76층으로 향할 준비를 끝냈을 즈음.
서울, 은평구 어딘가.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태수가 살던 집은 이미 세계정부의 수사관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탑에 들어간다고 월세 빼고 나간다기에 보증금까지 돌려준 게 한참 전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아아, 남태수 씨가 탑 내에서 불법 PK를 보인 정황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이고. 탑에 들어간다기에 사도님들처럼 좋은 일 하는 줄 알았더니 어쩐다야.”
“저희가 체포해서 죗값을 치르게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수사관들은 적당한 말로 집주인을 안심시키는 한편, 남태수가 떠난 지 한참인 집구석까지 샅샅이 뒤졌다.
“나야 수사관님들 믿지. 세계정부가 들어선 뒤로 범죄자란 범죄자들은 싹 다 잡아들였잖어.”
사도들이 지구를 장악한 후, 레벨에 의한 계급제가 시작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크지 않았다.
각종 부패와 범죄를 척결하고, 탑의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성장까지.
일반인들이 보기에 세계정부는 인류 평화의 상징이자, 일 잘하는 행정부였다.
“아침부터 이게 웬 고생들이야 커피라도 타줄 테니 마시고들 해요.”
물론 그 바탕에는 세뇌와 선동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아낸 자는 모두 안보국에 의해 처리되었으므로 시민들은 사도와 세계정부를 칭송했다.
비록 사도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는 과정이었을지언정, 수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얼음 동동 띄운 믹스커피를 받아든 수사반장은 말없이 수사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계정부.
그것도 사도를 상대로 테러를 일으킨 범죄자가 살았던 곳이라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곳이었다.
‘추살대가 투입되었는데도 잡지 못했다.’
탑 바깥의 대중에게는 주성진이나 남태수에 대한 정보가 통제되어 있었지만, 사건을 담당한 그는 사건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데드 백만 대군이니, 주먹으로 스타디움을 날렸느니. 뭐 제대로 된 이야기가 있어야지.’
온갖 가짜뉴스가 판을 치니 안쪽 상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추살대가 당한 건 사실.
‘어디 놈들이지?’
세계정부가 아무리 손을 써도 모든 인간이 그들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성좌에 의해 박살난 기존 종교조직이 음지화한 경우.
외계의 존재를 배척하자는 순수인류주의 단체와 같은 경우 등, 물밑에서 움직이는 반정부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12명뿐인 사도가 수십억 인류를 전부 일일이 세뇌하고 다닐 순 없었으니까.
사상도 방침도 제각각인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도의 힘에 대항할 수 없어 다들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번 사건은 세계정부가 무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예시가 되어주었다.
‘어느 조직에서 일을 벌인 건진 몰라도 이번 일로 쥐 죽은 듯 숨어 지내던 온갖 반정부조직들이 일제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세계정부 또한 이것을 느꼈는지 사건을 덮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뿌리를 뽑자는 기조로 돌아서는 분위기였다.
이 상황에서 양측이 원하는 것은 똑같았다.
‘세계정부도, 반정부조직도 모두가 상대보다 먼저 주성진과 남태수를 확보하고 싶어 한다.’
그들만이 이 사태의 키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태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알아봐야 하는 건 남태수가 아니다. 주성진이다.’
현세에 다시 나타난 30년 전의 망령.
30년 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30년간 어디서 뭘 하다 이제 나타났는지.
30년 만에 돌아와서 뭘 하려는 건지.
세계정부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거기 잠깐만요.”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하늘하늘한 여름 드레스 차림에 기자 신분증을 찬 여성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날씨에?’
저렇게 얇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에는 아직 쌀쌀한 날씨.
하물며 ID가 없는 걸 보면 플레이어도 아니니 추위를 안 타는 것도 아니었다.
“바벨 타임즈에서 나왔는데 잠시 시간 좀 되실까요?”
“거 이름만 들어도 탑 반대주의 신문사 같은데 공무원 인터뷰 허가는 받고 오셨습니까?”
“네 물론이죠.”
기자는 목에 걸고 있던 신분증을 흔들어댔다.
자세히 보니 최고 등급의 기밀 취급 인가가 나와 있는 신분증이었다.
“이런 건 선전부 종군기자한테도 잘 안 나올 텐데 어떻게?”
“아하하, 제가 좀 열심히 살았죠. 그보다 가슴팍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 좀 부끄러운데요…….”
그제야 상대가 가슴이 푹 파인 드레스 차림임을 깨달은 수사반장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뺐다.
“현장에 이런 거 입고 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규정상 저희한테 허락된 복장 중 이게 그나마 일상복에 가까운 거라서요.”
“예? 아 네…….”
기자한테 무슨 복장규정인가 싶었으나 그녀에게선 뭔가 일일이 따져 묻기 힘든 분위기가 풍겼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한효승 씨죠? 저는 바벨 타임즈의 산달폰이라고 합니다!”
천사의 이름을 가진 기자는 활짝 웃으며 활기차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