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공격대가 다시 찾아왔을 때, 다나는 이제 그들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길이 하나밖에 없었을 뿐, 75층은 다나 혼자서 커버하기에는 너무 넓었다.
대협곡을 넘지 못하게 막아주던 화살 세례가 사라진 지금이라면 그녀가 없는 곳으로 돌아 들어오는 상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나가 택한 방법은 바로.
“읏차.”
“포기한 건가?”
“아니? 싸우러 온 거야.”
74층으로 내려와 적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망할.’
카심은 당당히 걸어오는 다나를 보며 내심 쌍욕을 날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주성진에게 75층을 빼앗긴 데 더불어, 다나에게는 길을 막혔고, 남태수에게는 퇴로를 막혔다.
그의 공격대는 어디까지나 75층이라는 이권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이들.
딱히 충성도 의리도 없는 파티였으므로 공략이 요원해지자 벌써 22명이 이탈했다.
게다가 남은 50여 명도 카심을 믿어서 남은 게 아니었다.
‘뭔가 일어나는 것 같으니 대충 다수파에 붙어서 상황을 지켜보려는 놈이 태반.’
그 말은 즉, 위험할 것 같으면 즉시 발을 뺄 놈들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 싸워야 된다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남태수는 그들에게 탑에서 나가라고 못 박았으니까.
나갈 게 아니라면 결국 싸워야 할 뿐.
탈주한 이들은 그들이 싸우는 동안 이 넓은 스테이지 어딘가에 숨어 보스가 잡히기만을 기다리리라.
‘그놈들 좋은 일을 해주긴 싫지만 나까지 공격대를 해산하고 도망치면 그땐 저놈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일단 한 번 해산하면 다시 사람을 모으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기껏 모인 공격대마저 해산해버리면 성진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못해도 보스를 잡을 수 있는 숫자는 남겨야 해.’
성진 본인을 이기진 못해도 보스를 이길 전력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진이 75층을 벗어나 스테이지를 활보하려고 하면 공격대가 75층으로 들어가 보스를 잡고 스테이지를 끝내버릴 수라도 있으니까.
본인이랑 싸우지 않아도 스테이지만 끝내면 되는 것.
그리하여 여전히 레이드 공격대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카심이었으나, 눈앞의 다나는 그들을 혼자 상대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혹시 너희들은 성좌의 예비사도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개개인이 그만한 힘을 가진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성좌의 예비사도?”
다나는 카심의 물음에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좌랑은 관계없어. 이건 인간의 가능성이야.”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에 심판의 검을 생성해냈다.
카심은 그 모습을 보며 새삼 어이가 없어졌다.
심판의 검은 검을 생성하는 데 재사용 대기시간이 있는 스킬이었다.
지속시간이 대기시간보다 길어 여러 자루를 쓸 수 있는 건 맞지만, 저렇게 동시에 여러 개씩 뽑아내려면 100레벨 패시브를 찍어야만 했다.
“총 쏘는 데스나이트도 그렇고. 이놈들은 뭐 이리 당연하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을 해대는지.”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꼭 다나를 쓰러뜨려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점.
저지를 뚫고 주 전력이 75층으로 진입할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카심의 손에 그의 검이 쥐어졌다.
“그놈의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게 뭔지 어디 한번 보여 봐라.”
스킬을 이용한 제자리에서의 순간가속.
카심은 전조동작 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1열은 나를 서포트해서 저년을 붙잡는다! 나머지는 산개해서 75층으로 들어가! 들어가서 75레벨 스킬을 찍고 시작한다!”
공대장이자 최상위 탱커로서 자신이 다나를 마크한다.
그럴 생각으로 달려든 카심이었으나, 다나의 눈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한눈을 파는 거냐!”
“전부 보고 있어.”
기감에 의한 마력감지.
다나는 카심에 대항해 방어자세를 잡는 대신, 추가적인 심판의 검을 소환해 아무런 동작 없이 그를 막아섰다.
한 자루는 적의 찌르기 궤도를 비틀고,
한 자루는 얼굴을 노려 시야를 가리고,
나머지는 회피범위를 제한하는 위치에서 다음 수를 제압한다.
카심이 아무리 대단한 탱커라도 시각에 의존하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빛이 아니라 마력을 보는 거야.’
다나는 눈을 감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력감지는 기존의 오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육감이었다.
단순히 형태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걸 넘어서, 마력에 실린 사념 자체를 읽어낸다.
마력에 실린 살기를,
살기에 실린 감정을,
감정을 바탕으로 의도를.
그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예지에 가까운 미래예측.
육감이 닿는 범위,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영역 내의 미래가 다나의 눈이 비쳤다.
그리고 다나가 행동을 시작한 순간.
“어엇!”
“뭐야 이건!”
심판의 검 32자루가 49명의 움직임을 제압했다.
‘단순히 강한 힘을 받아서 쓸 뿐인 플레이어와는 달라.’
성진이 다나만큼의 힘으로도 아이젠그라드를 막아설 수 있었던 이유.
상대의 움직임이나 의도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수행할 완벽한 통제력.
마력감지의 본질은 인간이 인간을 초월하여 초인이 될 수 있게 하는 데 있었다.
“이게 인간의 가능성.”
다나의 몸이 순식간에 튀어나가 눈앞에 있는 검을 잡고 휘둘렀다.
이어서 다음 검이 있는 곳으로 대시하여 떨어지던 검을 잡고 찌르기.
거기서 검을 놓고 또 다음 검으로.
아직까지 마력의 컨트롤이 떨어지는 다나는 육체의 움직임보다 심판의 검을 생성하는 게 더 느렸다.
‘내가 움직일 경로에 미리 생성해놓고 써먹는다.’
기술과 경험의 부족함을 천재성으로 덮는다.
“태수 아재가 올 때까진 여기서 나랑 놀아줘야겠어.”
혼자선 공격대 전체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다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 * *
다나의 저지선이 뚫린 것은 그로부터 22시간 뒤.
그녀는 보름달이 떠오르자 폭주하는 웨어울프 인자와 싸우다 제압되었다.
즉, 자멸했다.
“허억, 허억. 뭔데 도대체! 그렇게 죽일 듯이 싸우다가 왜 지 혼자 부르르 떨다 쓰러지고 난린데?”
보름달에 의해 폭주할 경우 웨어울프는 이성을 잃고 인간의 생간을 탐하게 된다.
그러한 피의 저주를 억지로 틀어막은 결과, 다나는 폭주할 힘조차 남기지 않고 쓰러졌다.
“젠장.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75층이 먼저다. 뒤에 오는 언데드 거인이랑 또 싸우기 싫으면 빨리 뛰어!”
보스를 잡고 76층으로 튀면 한동안 저 망할 테러리스트들과 얼굴 볼 일 없으리라.
“얘는 어쩔까요? 보아하니 얘도 테러리스트 일원인 것 같은데.”
“버리고 가! 어차피 세계정부에 넘기려면 탑에서 나가야 되는데 여기서 나가고 싶은 놈 없잖아?”
공격대는 지친 와중에도 대협곡을 건넜다.
그리고 마침내 75층의 성벽 위에 섰을 때.
“이건 또 뭐야.”
텅 빈 폐허가 그들을 반겼다.
“보스는 어디 갔어?”
75층의 보스 아틀라스는 벽 가까이로 몰리면 71층에서도 보일 정도의 거체를 자랑했다.
그런데 이 평탄한 폐허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거인은 없었다.
“보스는 75층 밖으로 못 나갈 텐데? 죽었으면 클리어가 되어야…….”
그때 저 멀리 땅이 푹 파인 곳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주성진?”
흐릿하게나마 얼굴과 ID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
카심은 성진의 입모양을 읽어냈다.
“항복해라? 여기까지 와서도 그 소리인가?”
탑은 인생이고 레벨은 미래였다.
여기까지 와서 75레벨로 만족하고 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엿이나 처먹어!”
카심의 외침에 성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거인의 대궁을 집어 들었다.
“당장 방어 대형을…… 응?”
성진이 노리는 곳은 그들이 아닌 하늘 위.
‘아무리 활이 곡사무기라도 저렇게 고각으로 쏘면 떨어지기 전에 다 피할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성진은 하늘을 향해 화살을 쐈고,
쏘아올린 화살은 재앙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졌다.
* * *
“역시 말로는 안 되나. 그렇다면 보여줄 수밖에 없겠군.”
마침 성진은 거신왕의 황금룬을 손에 넣은 직후였다.
“오랜만에 써먹는 거니 나도 녹슬진 않았는지 시험해봐야겠지.”
성진이 아틀라스와 뒹구는 과정에서 75층에 있던 거인들도 싸움의 여파에 휘말려 몰살당했다.
덕분에 폐허 곳곳에는 아이템이 굴러다니는 상황.
성진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거인의 대궁을 차올려 손에 쥐었다.
거인의 몸집에 맞게 만들어진 거궁은 성진이 손에 쥐자 아이템으로 인식되어 성진의 사이즈에 맞게 변했다.
마찬가지로 바닥에서 주워 시위에 건 화살은 한 발을 쏘면 여러 발로 갈라져 날아가는 확산시.
성진은 그 확산시를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그걸 여기서 쓰시려고요?
“어차피 주변은 다 폐허니 상관없겠지.”
거인은 룬 마술을 통해 자신의 몸을 거대화하여 강력한 힘을 끌어낸다.
하지만 거대화라고 해서 꼭 자신의 몸에만 걸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룬 마술에는 제한이 없다. 이론상 마음을, 의지를, 기량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성진은 자신이 처음 거신왕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아닌, 무기의 성능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그 말은 곧…….”
무기의 크기를 거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커져라.”
그와 동시에 드넓은 하늘 위로 솟아오른 작은 화살 하나가 여의봉처럼 끝없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확산.”
정점에 도달한 거대한 화살이 갈라지며 무수한 숫자의 화살비가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확산된 화살들은 떨어지면서도 계속해서 커졌다.
이미 화살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빌딩의 비.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무차별 폭격.
화살 한 발로 세상을 평정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런 카르마로도 이만한 위력이라니 성능 확실하군. 거신왕 놈은 이런 걸 성좌들에게 빼앗겨놓고도 그렇게 고개가 뻣뻣했나.”
-거인들은 전사의 명예랍시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은 종족이니까요.
티타니아는 합리적인 요정족답게 동맹의 왕이라도 거침없이 씹어댔다.
처음부터 이게 있었다면 전선을 유지하는 게 2배는 편했으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덟 종족은 대부분 처맞기 전까진 혼자서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성진과 사룡왕이 합류할 수 있었던 건 보통 본진이 털린 뒤였으니까.
“자, 그럼 아까 항복할 걸 하고 후회하고 있을 놈들에게 당장 탑에서 나가겠다는 확답을 받아내러 간다.”
성진은 75층 공격대가 전부 화살비에 깔려죽기 전에 하나씩 잡아다가 다시금 항복을 권유했다.
눈앞에 빌딩보다 큰 화살비가 떨어지는 와중에 죽을래? 살래? 윽박지르는 데다 대고 죽겠다고 드러눕는 놈은 없었다.
그리하여 카심을 포함한 전원을 포기시키고 탑 밖으로 내보내고 나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늦었다.”
뒤늦게 도착한 남태수는 아주 그냥 벌집이 되어 버린 75층의 상태를 훑어보곤 입을 떡 벌렸다.
“맞아요. 앞으론 빨리빨리 다니세요.”
“넌 또 왜 그러는데?”
다나는 아예 드럼통에 포션을 채워 탕치를 즐기며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태수 아재가 하도 안 와서 저 혼자 고생했잖아요. 어우 죽겠다.”
남태수가 저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자 그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어제 보름달이었잖나.”
“아.”
75층 공격대가 아무리 세도 다나를 저렇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남태수 자신만 해도 도망치는 정도는 간단한데 설마 다나가 그걸 못하겠는가?
“설마 폭주해서 공격대 사람들을 잡아먹을까 봐 자폭한 거야?”
다나는 부끄러운지 남태수의 입에서 딴소리가 나오기 전에 말을 돌렸다.
“아~ 누가 빨리 와줬으면 나 혼자 이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었는데. 누구 때문에 몸 상태가 엉망이라 밥이랑 설거지도 못 하겠네.”
“응?”
“양심이 있으면 늦은 사람이 대신 당번해야…….”
“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성진은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 했다.
“생각보다 둘이 사이가 좋군?”
거센 반발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