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다나와 남태수 사이에 낀 공격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거인들에게서 도망쳐 다녀야 했다.
이 사실을 커뮤니티를 통해 확인한 다나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태수 아재도 가끔은 쓸모가 있네.”
75층 공격대는 아직 랭커가 아닐지언정 랭커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이들이었다.
똑같이 몸을 쓰는 일이라 해서 축구선수가 농구도 잘하는 건 아니듯, 저레벨 전투와 고레벨 전투는 다르다.
‘명예의 전당은 본격적인 고레벨 전투의 연습이기도 한데, 그걸 통과한 이들을 물리쳤다는 건…….’
남태수도 ‘할 수 있는 쪽’이었다는 뜻.
물론 사령술사의 직업특성일지도 모르나 이유야 어떻든 남태수는 해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대협곡을 해자 삼아 펼쳐진 벽.
한참 전부터 그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음과 진동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상할 수 있게 했다.
“슬슬 화살도 거의 안 날아오고. 이제는 진짜 몸으로 막아야겠네.”
몬스터를 대신해 이곳에서 입구를 틀어막고 버틴다.
공격대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때야말로 다나가 밥값을 해야 할 때였다.
* * *
아틀라스를 두들겨 팬다고 그가 갑자기 거신왕의 룬이 숨겨진 곳을 말해주거나 할 리는 없었다.
보스 몬스터라고 해도 어차피 성좌에게 붙잡힌 포로.
성좌가 숨겨놓은 물건의 위치를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군.”
성진은 눈앞에 쓰러진 아틀라스를 바라보았다.
던져질 때마다 회복을 위해 힘을 소모한 아틀라스는 마침내 9살이라는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완전히 뻗어 버린 아틀라스는 성진을 보고도 달려드는 대신 빌빌거릴 뿐이었다.
-은인, 사실 악마?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피터팬 역할을 자처하던 아이젠그라드는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으나 성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보다 귀여운 모습이군.”
-이, 이게요……?
옆에서 지켜보던 티타니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령화한 그녀는 수십 수만 개로 자아를 나누어도 멀쩡했기 때문에 수색을 진행하면서도 성진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성진을 구경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걸로 보스가 혼자 멋대로 돌아다니다 토벌당해 버리는 일은 없겠군.”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아틀라스를 들쳐멨다.
직접 들고 다니는 것보다 안전한 방법은 없으리라.
“수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아직까지 특별한 건…… 아, 지금 뭔가 발견한 것 같아요.
“뭔가?”
-네, 이 스테이지의 배경인 원본 세계에 있던 것 같은 차원문 정거장인데, 어쩌면 이거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거인들이 마법사가 될 수 없다고 해서 마도공학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공간이동이 가능한 차원문은 어떤 문화권에 갖다 놔도 치트키나 다름없는 물건.
이만한 크기의 도시라면 차원문 정거장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폐허에 용케 그런 게 남아 있었군?”
-지하에 위치해 있어서 부서지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실제 세계가 아니라 성좌들의 기술로 구현된 스테이지 내부잖나. 차원문이 작동은 하나?”
-물론 이걸로 탑의 안팎을 오간다거나,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건 안 될 거예요. 층간이동은 시스템이 담당하는 부분이니까요. 하지만 스테이지 내부에서의 이동은 얼마든지 가능할 거예요.
“75층 내에서의 이동이 의미가 있나?”
-네. 이게 있다면 벽을 뚫고 일반적으로 플레이어가 접근할 수 없는 공간으로도 갈 수 있을 거예요.
옛날에 만들어진 게임을 하다 보면 모서리를 비비고 들어가 벽을 뚫고 맵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있었다.
게임에 따라선 가끔 그러한 ‘플레이어가 접할 일 없는 공간’에서 몬스터 리젠이나, 이벤트 컷신 같은 트리거가 돌아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현실의 탑도 마찬가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지요. 따라서 탑에서는 어딘가 몬스터를 미리 준비해놓고 공간이동으로 불러오거나 하는 방식을 사용해요.
“그렇다면 어딘가 STAFF ONLY라 적힌 공간이 숨겨져 있을 거란 이야기군.”
-네. 만약 성좌가 중요한 걸 숨겨뒀다면 당연히 플레이어들이 오가는 오픈된 공간이 아니라 잠가둔 곳에 넣어뒀을 거예요.
차원문을 조작한다면 일반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플레이어들은 주어진 스킬만 쓸 뿐 마법을 모르지. 덕분에 놈들도 차원문을 누가 고쳐서 쓸 거란 생각은 못 해 봤나 보군.”
할 일이 결정된 이상 행동은 빨랐다.
성진은 티타니아가 말해준 위치로 가 땅을 파냈다.
폭격에 가까운 발길질을 몇 번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성진은 간단히 지하시설을 지상으로 끌어냈다.
티타니아는 이리저리 차원문을 만져대더니 금방 재가동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걸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도대체 어디로 이동하면 될지……?
“그거라면 우린 이미 좌표를 가지고 있지.”
성진은 기절한 아틀라스를 차원문에 집어던졌다.
“NPC라면 리젠을 위해 당연히 시스템 공간에 연결되어 있겠지?”
이어서 성진 또한 차원문에 발을 들여놓았다.
[□■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합니다.]
[Lv.75 > Lv.-75]
“이게 스테이지의 뒤편인가.”
플레이어의 진입을 상정하지 않았는지 들어오자마자 노골적인 오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진은 곧장 메시지를 치워 버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계태세를 갖추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무도 없군.”
그들이 도착한 공간은 별이 반짝이는 불 꺼진 전시관이었다.
“플라네타리움인가? 온통 새까매서 원근감이 이상하지만 실제 하늘은 아닌 것 같은데.”
텅 빈 전시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전시관이라 부르긴 했지만 여긴 스테이지의 뒤편.
딱히 전시용으로 꾸며놨을 리는 없었다.
“75층의 뒤편만 이런 건지, 원래 다 이런 건진 모르겠지만 악취미로군.”
그들이 도착한 위치에는 극장용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명백하게 누군가가 여기서 별들을 구경하곤 했다는 뜻.
-관리자가 이렇게 꾸며놓은 걸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별을 저렇게 그려놨을 리가 없으니.
성진은 딱히 천문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이곳의 별자리를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지구의 밤하늘이다. 아마 탑이 있는 태평양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을 재현한 것 같군. 아니, 재현이라기보다는…….”
성진은 말을 고쳤다.
“이게 지금 지구의 상공에 투사되고 있는 영상의 원본이겠지.”
지구의 하늘을 재현하여 이곳에 전시해둔 게 아니다.
여기서 보이는 풍경을 전 지구의 하늘에 띄워놓고 있는 것이다.
-저야 여기 잡혀 온 이후의 일은 모르지만, 바깥에 저렇게 많은 별들이 남아 있을 리가 없죠.
이미 성진은 지구로 돌아온 첫날부터 하늘의 풍경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챈 상태였다.
하늘에 펼쳐진 마법을 꿰뚫어 봤다거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가 바깥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았던 하늘은 이미 대부분의 별이 져버린 상태였다.
지구에서 본 하늘에 저렇게 많은 별들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지난 30년간 지구상에도 거대한 트루먼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침략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확인하곤 세계정부 대신 바로 탑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럼 여기서 별들을 조작하면 지구인들이 보는 하늘도 바뀔까요?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마 가능할 것 같다만 그랬다간 우리의 존재도 들키겠지. 당장은 쓸 곳도 없으니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군.”
여기서 계속 기다리면 언젠가 이곳에서 별을 구경하던 천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거신왕의 룬이 먼저였다.
“그래도 이걸 보니 하나는 확실해졌다.”
-네?
“여기 관리자는 지구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야.”
스테이지의 뒤편에는 관리자로서 탑 안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탑 바깥을 살펴보고 있던 흔적들이 보였다.
성진은 가만히 서서 이곳에 꾸며진 별들을 바라보았다.
“다나나 남태수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군.”
이미 이 우주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별들은 성좌에게 잡아먹혔으며, 지구상에서 관측되는 별들은 성좌들이 꾸며놓은 가짜에 불과하다.
이 우주적 사기극을 밝힌다고 해서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고 성좌와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니겠지.”
기대를 걸기엔 이미 성진은 너무도 많은 ‘포기해 버린 세계’를 봐왔다.
딱히 그들을 탓하지는 않았다.
성좌 같은 걸 보면 오히려 놈들과 싸우겠다고 드는 놈이 이상한 놈이니까.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쪽은 그리 많지 않다.”
탑 이전의 인류는 외계의 종족과 만난 적 없는 외로움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며 거기에 있을 가능성들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으로 온 우주에 나 하나뿐이라는 절망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게 가짜라면?
밤하늘의 별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고, 지구상에서 보이는 별빛은 모두 성좌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이미 성좌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남은 건 그들뿐이라면?
종말로 향하는 모래시계를 두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모래가 떨어지는 걸 구경하는 것밖에 없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냥 포기해 버리겠지.”
물론 성진은 모든 게 성좌의 생각대로 돌아가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겠다.”
분노 속에서도 성진의 정신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선생님, 뭔가를 발견했어요.
티타니아의 부름에 성진은 아틀라스를 들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온갖 좌표가 덕지덕지 발린 이곳은 코앞에 있는 공간에 가기 위해서도 꼬인 길을 빙빙 돌아가야 했다.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거신왕의 묘비인가. 이놈들, 룬을 회수할 방법이 없으니 아예 통째로 뜯어왔군.”
혹시라도 추가적인 봉인이 되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이러면 다행히도 손쉽게 회수할 수 있을 듯했다.
성진은 묘비 위에 룬 문자로 거신왕의 진명을 적었다.
왕의 진명을 알고, 룬 마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누구나 회수할 수 있게 만들어진 구조.
그러나 룬 마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영혼의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고로 이 비석은 지혜와 자격을 둘 다 갖춘 인물만이 룬을 이어받을 수 있게 만들어둔 셈.
파아앗!
비석에서 솟아난 금빛 신성광휘가 성진을 휘감고 돌다 그에게로 흡수되었다.
“회수는 이것으로 끝이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는 굳이 복잡한 절차를 요구하지 않는 게 거신왕다웠다.
“춘식이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니 여기서 관리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기약이 없을 테지. 아직 시스템을 건드리는 건 위험하니 바로 돌아간다.”
성진은 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75층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75층은 들어갈 때와 달리 밤이 되어 있었다.
“시간도 상당히 어긋나 있었던 모양이군.”
현실에서도 블랙홀처럼 공간이 어긋난 곳은 시간도 어긋나기 마련이었다.
이는 마법으로 공간을 뒤틀었을 때도 똑같았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저 안에 있었나 본데.”
저 멀리 75층의 성벽 위.
성진은 그 위에 서 있던 카심과 눈이 마주쳤다.
공격대는 이미 협곡을 건넌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