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화살을 날려대는 거인들이 멀쩡히 남아 있는 이상 공격대가 대협곡을 건너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돌진기를 전부 꼬라박으며 어떻게든 건너겠다 발버둥 쳐 봐야 반쯤 건너면 초대형 심판의 검이 그들을 막아섰다.
디스펠과 MP흡수가 장착된 이 이단심문관의 스킬은 그냥 거기 떠 있는 것만으로도 공격대를 막아섰다.
“아니 우리 인원이 몇인데 저거 하나를 못 뚫어?”
“저 다나라는 녀석은 지금 75층에 서 있잖아! 75레벨 달고 심판의 검에 디스펠 특성까지 찍어서 닿기만 해도 스킬이 해제된다고!”
“총잡이나 궁수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물리딜로 저걸 부숴야 지나갈 거 아냐?”
“우리한테 그럴 화력이 있었으면 애초에 아이젠그라드 밀고 들어갔겠지 멍청아!”
공격대가 75층 입구에서 존버한 게 며칠째던가.
언젠가 입구를 뚫고 75층 보상을 싹쓸이할 그 날만을 고대하며 버티던 그들은 눈뜨고 코 베인 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란을 피웠다.
“뒤에서는 테러리스트 남태수가 거인들을 이끌고 올라오고 있답니다!”
“남태수는 주성진의 동료라고 하니 결국 놈들이 우리를 쌈 싸먹을 생각인 게 아니겠습니까?”
“공대장님!”
앞은 대협곡과 다나에게 막혔고, 뒤에서는 남태수와 거인들이 시시각각 밀려오고 있는 상황.
‘얌전히 거인 궁수가 줄어들기만을 기다리다간 그 전에 공격대가 해산될 거야.’
카심은 탈퇴자가 나오기 전에 공대장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74층에서 내려간다.”
“후퇴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대협곡을 뚫으려면 시간이 필요해. 그렇다면 기다리는 시간 동안 후방에서 오는 문제부터 해결한다.”
리더는 항상 목표를 제시해야 하는 법.
75층에 가자고 모아놓은 인원들에게 당장은 못 갈 것 같으니 이따가 다시 모이자고 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될 때까지 하고 있을 다른 일을 제시해주면 된다.
“후퇴가 아니다. 후방을 향한 돌격이다.”
곧 죽어도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전통적인 변명과 함께, 75층 공격대는 75층과는 정반대를 향해 이동했다.
한번 뚫었던 구간을 더 높은 스펙으로 역행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지!”
카심은 언덕 위에 서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대지가 거인으로 뒤덮여 있었다.
“…… 돌겠군. 도대체 거인이 얼마나 되는 거지?”
“하나하나가 차지하는 공간이 커서 그렇지 그렇게 많은 건 아닙니다. 항공정찰 결과는 대략 1만 정도?”
“1만의 거인이면 스테이지를 완전히 평탄화시키고 우릴 전부 톰과 제리에 나오는 것처럼 납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이는데.”
“에이 그래도 저 인간은 테러리스트 아닙니까?”
부관이 주장하는 바는 이랬다.
“남태수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입니다. 즉,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는 또라이가 아니라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이 통할 겁니다. 우리가 탑을 공략하는 이상 앞으로도 저놈들과 엇비슷한 층을 진행하게 될 텐데,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말이나 들어보죠.”
세계정부의 지침에 따르자면 테러리스트와의 접촉 및 협상은 범죄행위이며, 탑에서 나온 뒤에 처벌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렇지만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공격대를 설득하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저 거인군단을 보고도 테러범과는 협상할 수 없다고 할 미친놈은 없으니까요.”
여기서 저 거인들과 싸울래? 아니면 테러리스트와 협상할래? 물어보면 대답은 모두 똑같으리라.
왜냐고?
딴소리하는 놈이 있으면 옆에 있는 놈들이 죄다 달려들어서 두들겨 팰 테니까.
“잠깐. 그럼 내가 테러리스트와 협상해야 한다는 거잖아.”
“당신이 공대장이니까요.”
“어쩐지 시키지도 않은 설득을 하겠다더니. 진짜 위험한 건 나한테 떠넘기려고 그랬구나!”
카심이 공대장이라고 무슨 강철의 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이나, 배짱 하나는 두둑한 정치인인 건 아니었다.
플레이어라고 해서 사람을 왕창 죽였다는 테러리스트가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테러리스트도 플레이어니까.
“공대장님만 믿습니다.”
그렇게 카심은 사악한 부관의 함정에 빠져 남태수와 대화를 요청했다.
남태수는 거인의 머리 위에서 갈까마귀 소환수를 내려보내 대답했다.
“그렇다면 혼자 오시오.”
“혼자? 나 혼자 저 거인들 한복판에 기어들어 가라고?”
“나도 혼자, 당신도 혼자. 충분히 공평한 것 같은데.”
까마귀가 부리를 딱딱대자 그 안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령술사 스킬에 이런 것도 있었나 싶었으나 대부분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안 그래도 사령술사는 비주류인 직업.
거기서 분화되는 수많은 2차 전직 스킬까지 다 알려져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 좋다. 하지만 설마 거인의 머리 위에서 만나자는 건 아니겠지?”
“지금 바로 자리를 마련하지.”
“허?”
순간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은 카심이 멍청한 소리를 내었으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쿠구구구구구!!!
남태수의 손짓을 따라 거인들은 순식간에 땅을 다지고 흙을 쌓아 순식간에 무대를 만들어냈다.
카심이 그곳에 올라섰을 때, 남태수는 이미 거인들을 물려놓고 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걸 뒤로 물린 거라고 봐도 되나? 눈에 다 들어오는데.’
남태수의 뒤로 수많은 거인들이 그대로 보였다.
온통 평야뿐인 이곳 지형에서는 아무리 거인들이 물러나 봐야 빤히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언데드 거인들을 병풍처럼 두른 남태수는 마치 방금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군단장처럼 보였다.
“당신이 남태수?”
‘누가 사령술사 아니랄까 봐 뭔 두개골을 투구로…….’
“앉지.”
그 말과 함께 남태수의 주변에서 뼈로 이루어진 의자와 테이블이 솟아났다.
본 아머의 응용.
스킬이 아닌 마법으로 구현한 그 응용법에 카심은 움찔하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살벌하게도 생겼네. 저 눈동자는 도대체……?’
두개골의 눈구멍 속으로 비치는 푸른 안광은 보기만 해도 손발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기분만이 아니라 남태수의 마력이 그의 몸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었으나, 카심이 알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기에 저렇게 군대를 끌고 온 거지?”
“예? 예? 아니 군대를 끌고 온 건 당신이잖습니까?”
“사령술사가 자신의 소환수를 끌고 다니는 게 뭐가 이상하지? 반면 당신은 여기까지 플레이어 공격대를 끌고 오지 않았나.”
어느새 남태수의 손에는 거대한 대낫이 들려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바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대답하도록.”
‘시발.’
카심은 생각했다.
‘X됐다.’
살인마보단 낫니 뭐니 해도 테러리스트는 테러리스트였다.
* * *
카심의 똥줄이 불타오르는 동안 정작 급한 건 남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못 잡네.
-아~ 사령술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내가 해도 그것보단 잘하겠다.
“당연히 리치인 네가 더 잘하겠지. 비겁하게 팩트 쓰지 말고 차라리 설득을 하라고…….”
무르무르는 도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드립을 쳐대며 남태수의 성질을 박박 긁어댔다.
그러나 남태수는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싸우면 내가 이길 순 있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남태수는 명예의 전당을 구르며 혼자서도 자기 몫을 해낼 수 있게 되는 한편,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가진 영혼을 활용해서 굴러도 내 몸이 하나뿐인 이상 쓸 수 있는 마력의 한계가 명확해.’
같은 구간의 플레이어.
그중에서도 75층을 공략하겠다고 나선 이들이라면 최정예.
손발을 맞추는 연습까지 다 끝낸 인원인 데다, 50명을 넘어가니 당연히 직업들도 밸런스 좋게 잘 갖춰져 있었다.
‘이런 놈들을 상대로 나 혼자 싸운다? 아무리 언데드 거인을 미리 소환해둔 상태라도 답이 없는데?’
애초에 남태수는 저들이 왜 갑자기 75층을 뒤로하고 이쪽으로 오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남태수로서는 대비를 해야 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술 마신 놈이 차를 몰고 와서 치어 버리면 교통사고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해.’
남태수는 싸우기 싫었지만 저들이 덤비면 결국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머릿수의 불리함을 뒤집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준비를 해둬야 했다.
“일단 항상 여유 있는 척하고 허세를 부리는 건 기본이고, 미리 폭탄 같은 걸 묻어놓고 전투가 벌어지면 그쪽으로 퇴각하며 유인한다든가, 아예 대화를 빌미로 공대장을 홀로 끌어들여 인질극도…….”
-이젠 정말 어딜 내놔도 손색없는 테러리스트가 다 되셨군요.
“이쯤 되면 온 우주가 나를 테러리스트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은 이러고 싶지 않았다. 진짜로.
하지만 세상이 그를 이렇게 만드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내 인생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생각해보니 억울했다.
-그럼 폐하께 말씀드리고 정식 사도가 되어 권력을 누려보시는 건?
“아냐.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내가 잘못했네. 정식 사도가 되는 것보단 낫지.”
잘 생각해보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고, 남태수는 개같이 똥밭을 굴러 마침내 75층 공격대를 맞이했다.
“당신이 남태수?”
남태수는 최대한 약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앉지.”
중동 출신의 공대장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실은 그냥 저 멀리 보이는 거인들과 눈앞의 남태수가 내뿜는 마력에 짓눌린 탓이었으나, 정작 남태수도 자신이 그 정도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래서.”
약하게 보여선 안 되는 남태수는 그럴수록 더더욱 강하게 나가야 했다.
“신중하게 대답하도록.”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는 두 남자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서로의 속마음을 알 방법은 없었다.
“우린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다. 치안을 지켜야 하는 건 세계정부지 일반 시민인 우리가 아니니까.”
세계정부의 추살대도 박살 났는데 그들까지 머리를 들이밀 필요는 없었다.
이는 남태수로서도 환영이었지만, 남태수도 마냥 ‘그럼 싸우지 말자’ 하고 지나갈 순 없는 입장이었다.
-물론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마스터.
‘그래 인마.’
과연 이 말을 하면 눈앞의 저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줄까?
아닐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탑의 도전을 중단하고 바깥으로 나가라.”
“뭣이?”
단순히 서로 싸우지 말자를 넘어선 퇴거요청.
성진은 남태수를 홀로 두고 가면서 그에게 못을 박았다.
‘앞으로 모든 플레이어를 탑에서 내보내야 한다.’
‘우리에게 협조하는 이들은 언제든지 내보낼 수 있으니 일반 플레이어들을 내보내는 게 먼저다.’
성진의 목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훗날 그가 탑을 무너뜨릴 때, 탑 안에 사람이 남아 있으면 함께 휩쓸려 버릴 테니까.
비교적 낮은 층인 30층을 틀어막았으니 새로 들어오는 이들은 충분히 막고 내보낼 수 있었다.
반면 이미 탑을 진행 중인 이들은?
‘전부 만나서 설득하고 내보내는 건 불가능.’
그러니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최대한 바깥으로 내쫓아야 한다.
“그런 요구는 받아들을 수 없다!”
물론 기껏 탑에 들어온 이들이 고작 말 한마디에 탑을 나갈 리가 없었다.
“그럼 힘으로라도 강제로 내쫓는 수밖에.”
결국 남은 건 무력행사.
남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고,
-안아줘요!
콰아아아앙!
날아든 거인의 몸이 카심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