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가서 성진 님이 바라시는 것을 찾아오렴.
티타니아가 사방에 정령을 뿌리는 동안 성진은 할 일이 없었다.
“남는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성진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천사의 영혼이 매달려 있었다.
영혼이 쌓일 때마다 꼬박꼬박 남태수에게 넘긴 성진이었으나, 천사의 영혼만큼은 계속 그가 관리하고 있었다.
-히익! 오지 마! 이쪽으로 오지 마라!
튜토리얼을 관리하던 에제키엘은 성진이 눈만 마주쳐도 발작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고,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놈이 아무리 날뛰어봐야 대천사님을 마주하면……!
20층에서 붙잡은 레베키엘은 아직도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대천사라면 이걸 말하는 건가?”
툭!
성진은 온몸이 기괴하게 꺾여 별 모양으로 압착된 나타니엘의 영혼을 집어던졌다.
-네 이놈!!!
성진에게 붙잡힌 뒤 자신들이 괴롭혔던 영혼들에게 똑같이 복수당한 에제키엘과 달리, 레베키엘은 성진이 영혼을 남태수에게 넘긴 뒤에 붙잡았다.
덕분에 사실상 아무런 고문도 당하지 않고 방치되었던 레베키엘은 여전히 건방진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나타니엘 님! 정신 차리십시오! 네놈! 나타니엘 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성좌가 내려주는 힘만 받아먹으며 사는 놈들에게는 노력이나 재능이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보다 성좌가 얼마나 힘을 많이 내려줬는지가 더 중요한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천사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처세술뿐이었다.
때문에 레베키엘은 붙잡힌 몸으로도 숨 쉬듯 자연스레 저딴 소리를 해댔으나, 정작 나타니엘은 달랐다.
-마, 만지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나타니엘 님……?
성진은 발작하는 나타니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로 추정되는 별의 모서리-에 팔을 둘렀다.
“흑요정은 당시 요정향 내에서도 고위층에 해당하는 이들이었으며, 요정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 그런 주제에 왜 배신했나?”
흑요정은 요정족 중에서도 요정향의 좌표를 성좌에게 팔아넘기고 지위를 약속받은 매국노들이었다.
“아, 말해줘도 나는 이해할 수 없겠군. 매국노 마인드를 이해할 수 있으면 그게 이완용이지. 안 그런가?”
나타니엘은 이완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흑요정들의 배신으로 그간 차원좌표를 옮겨 다니며 성좌를 피해오던 요정향은 대대적인 침공을 받았다.
그 결과 요정왕은 죽었으며 티타니아는 그 뒷감당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잘게 찢어 정령화하기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티타니아는 나타니엘을 잡은 직후 그 처분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 부탁했다.
성진은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한동안은 대천사의 힘을 흡수하는 게 먼저라 아직 그가 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신 성진은 티타니아의 마음을 헤아려 좀 더 철저하게 나타니엘을 쥐어짰다.
구체적으론 대천사인 나타니엘이 성진과 눈만 마주쳐도 지릴 정도로.
“돌아왔으면 한때 자신이 모셨던 공주님한테 인사부터 올려야 할 텐데. 안 그런가?”
-으, 으어어어……!
나타니엘은 성진의 말에 배신자인 자신이 요정공주 앞에 던져지면 어떻게 될지 떠올리고는 격렬하게 몸서리쳤다.
레베키엘은 그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나타니엘 님!
“나타니엘? 웃기지도 않는군. 네 이름은 이제부터 춘식이다.”
성진은 일말의 자비를 발휘하여 깜둥이라는 이름을 피했다.
“네게는 참 다행인 게 나는 너를 고문할 생각이 없다.”
-아, 안 해……?
그 말에 춘식이의 눈동자에 약간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그래. 그건 나중에 티타니아가 직접 해야지.”
-아, 아악……!
다시 사라졌다.
“각설하고, 네가 아는 걸 다 불어라.”
-알려주면 나를 놔줄 건가?
“아니. 알려주면 너를 티타니아에게 넘길 거다.”
-그러면 고문당할 게 아닌가! 내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 무슨 소리인가!
“아무런 이득이 없다니. 잘 생각해봐라.”
성진은 춘식이의 바보 같은 소리에도 실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사룡왕이 아니라 요정공주한테 넘기겠다는 거다. 정말로 이게 이득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설득은 간단했다.
사룡왕은 성좌조차 잊어버린 고대부터 살아온 존재.
죽은 자들의 여왕인 그녀에게 붙잡힌다면 설사 성좌들이 승리하더라도 그의 영혼은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사룡왕은 질 것 같으면 대충 고문의 영구기관을 만들어서 아무도 찾지 못할 차원좌표에 그들을 버려놓을 수 있는 존재니까.
“성좌들이 고작 천사 하나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온 우주를 뒤지는 수고를 할까?”
이건 춘식이가 아니라 춘식이 할아버지가 와도 고개를 저을 소리였다.
물론 흑요정이 되어 버린 춘식이의 부모는 성좌였고, 성좌는 부모가 없었으므로 춘식이는 할아버지도 없는 후레자식이었지만 말이다.
-마, 말하겠다!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할 테니 나를 공주님에게 보내다오!
“그래. 그래야지.”
성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레베키엘 앞에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흑요정’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사룡왕이 나을지 요정공주가 나을지 성진도 확신할 수 없었다.
‘틀려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틀렸다는 게 증명될 즈음에는 항의할 피해자도 없어질 테니까.
‘나는 티타니아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
아님 말고.
아무튼 설득이 되고 나니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거신왕의 룬이라면 나도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어 있는지 모른다.
성진은 말없이 춘식을 노려보았다.
-진짜다! 이 탑에 묶어둔 것들을 생각하면 일개 천사라도 독식 후 새로운 성좌로 거듭날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그걸 욕심 많은 성좌들이 설명해줬겠나?
그건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아니지. 사례도 있었군.”
생각해보면 그가 청동망치를 손에 넣은 것도 성좌들끼리 그 배분을 놓고 싸우다 어부지리로 넘겨준 것에 가까웠다.
“그럼 다른 관리자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리 그래도 네 상관에 대한 것쯤은 알고 있겠지?”
춘식은 원래 50층에서 플레이어들을 직접 마주하던 천사였기에 유명했으나, 기본적으로 탑의 관리자들은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제는 이놈들이 지들 부하한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점이었는데, 각자 자기 직속상관까지 밖에 모르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튜토리얼 관리자인 에제키엘은 30층 관리자인 레베키엘까지만 알고,
30층 관리자인 레베키엘은 50층 관리자인 춘식이까지만 알고…….
“지들이 관리하는 탑에 뭘 처박아 둔 건지는커녕 누구랑 있는 건지도 안 가르쳐주다니. 늘 새로운 개새끼들이야.”
성좌들이 천사를 체스 말 따위로 여기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장 그것 때문에 귀찮아지니 짜증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 짜증은 춘식의 대답으로 두 배가 되었다.
-모른다.
성진은 말없이 별모양 춘식을 반으로 접어 버렸다.
-지, 진짜 모른단 말이다!
“그걸 왜 몰라.”
-만나본 적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단 말이다. 보고는 꼬박꼬박 올리는데 답변이 온 적은 없다!
“죽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중간에 한 놈이 죽었으면 진작 위에서 알아챘을 테니까.
성진이 지금까지 관리자를 잡으면서 와도 괜찮았던 것은 밑에서부터 연달아 족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마 탑의 바깥에 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흐음?”
-플레이어가 탑에 들어올 수 있는 건 한 번뿐이라도 천사는 얼마든지 들락날락 할 수 있으니까.
“천사가 지구로 나가서 뭘 한단 말이지?”
-낸들 알겠…… 으아아 더 접지 마라! 이러다 공이 되어 버린다!
이건 꽤나 중요해 보이는 이야기였다.
* * *
성진이 75층을 뒤지는 동안, 남태수는 천천히 전 맵을 돌며 자신도 75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남태수는 영혼을 해방시키고 남은 거인의 시체로 만든 언데드들을 이끌고 스테이지를 밀어 버렸다.
어느새 늘어난 언데드 거인군단은 이미 1000이 넘는 숫자를 자랑했다.
군단의 선두에 위치한 거인의 머리 위에 올라타 세상을 내려다보면, 마치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물론 그런 남태수를 바라보는 일반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는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으악! 미친 라따뚜이가 거인을 조종해서 우릴 다 죽이려고 한다!”
“라따뚜이는 무슨 라따뚜이야!”
거인 머리 위에 올라서 있으려니 좀 쫄려서 머리칼을 잡고 있긴 했지만, 조종은 사념파를 통해 하고 있었지 머리카락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저놈들이 멀쩡한 사람을 쥐새끼로 만들잖아!”
-하긴 그렇군요. 마스터는 쥐보단 고양이가 어울리는 남자죠.
“으악! 아아악!”
무르무르의 말에 남태수는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스터께서 그리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군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듯합니다.
“응?”
-저길 보십시오.
무르무르가 가리킨 곳에는 지금까지 마주친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강한 두 자릿수의 인원을 자랑하는 파티가 그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75층 공격대.
지금 당장은 대협곡을 넘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카심이 이끄는 공격대는 남태수를 노리고 회군했다.
-으악 플레이어다!
-숨거나 도망쳐도 끝까지 쫓아와서 우릴 다 잡아죽이던 악마!
-저놈들은 절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맞서 싸워야 해!
-죽기 전에 죽여라!
-플레이어를 모두 죽여라!
먼저 반응한 것은 거인들이었다.
타고난 전사종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린애들만 모아놓고 30년간 학살을 반복한 탓일까.
어린 거인들은 플레이어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공포의 대상을 제거하기를 원했다.
-죽여라!
-찢어라!
-마셔라!
“얘들아? 저, 저기 얘들아?”
남태수는 당황했고,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죽음을 꿈꾸다니. 탑 안에도 아직 희망은 자라는가……!
무르무르는 뿌듯해했다.
“아니 뿌듯해하지 마! 뿌듯해하지 말라고!”
-죽입시다, 마스터. 임시라도 사룡왕의 사도되는 몸으로서 그들의 바람에 응해야지요!
-죽여라! 죽여라!
“세계정부 관계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그럼 애들한테 30년간 밀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주는 셈 치고.
-선물은 적들의 목이 좋아요!
“거인족은 크리스마스 없잖아!”
-에잇 어른이 쪼잔하게.
-우우우우!!!
결국 참다못한 남태수가 째려보자 한마디씩 덧붙이던 거인들도 조용해졌다.
50층 이후 계속 방법을 바꿔가며 남태수를 꼬시던 무르무르는 또다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전략을 수정했다.
-이 아이들이 배부름을 알까요? 이젠 육체도 없으니 채울 수 있는 건 마음뿐이 아닐까요? 지금 바로 아이들의 꿈을 이뤄주세요!
“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