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56화 (56/170)

<56>

이어진 상황들에 멍해져 있던 카심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당신 지금 뭐하는 짓이야!”

성진은 자신을 뒤따라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다나가 착지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놈들을 건드리면 어떡하자는 거요! 기껏 공격전까지 조용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벌집을 들쑤셔놨으니 경계가 삼엄해질 게 아닌가!”

“보아하니 저놈에게 막혀 있는 모양이군.”

“뭐?”

성진은 카심의 항의를 무시하고 자기가 할 말만을 전했다.

“내가 저놈을 잡아주지. 그러면 문제없겠지?”

그 말에 카심은 할 말을 잃고 성진을 바라보았다.

방금 성진이 보여준 신위는 분명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같은 74레벨이 아닌가?

저 외길을 틀어막고 있는 중간 보스는 100레벨짜리.

그것도 대규모 레이드 보스에 해당하는 괴물이었다.

‘인원제한도 없는 이런 스테이지에 튀어나오는 레이드 보스를 자기가 혼자서 잡겠다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오는 소리였다.

그게 가능하면 자신은 왜 여기서 필사적으로 사람을 모으고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 말 덕분에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잠깐…… 주성진?”

저 아래층에서 난리를 부려 이곳에 인원난이 생기게 만든 주범.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카심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 인간은 살인도 저지른 테러리스트잖아. 여기서 시비를 걸었다가 싸움이라도 나면?’

인원이 인원이니만큼 그의 공격대가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일 클랜 공격대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사람을 그러모은 공격대에서 사상자라도 난다면?

공격대장인 카심은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데다, 당장 75층 공략을 위해 힘들게 모은 인원들이 뿔뿔이 흩어질 위험도 있었다.

“당신이 저놈을 잡아주겠다고?”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까.”

카심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자기가 알아서 싸우러 가겠다는데 그냥 내버려 두면 되잖아?’

저 대규모 레이드 보스를 성진이 혼자서 잡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진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에게는 손해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골칫거리인 성진이 무모하게 돌격하다 알아서 죽어주면 카심은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격이었다.

‘잘하면 세계정부가 걸어놓은 현상금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굳이 이 남자를 막을 필요는 없다.’

“당신이 저놈을 치워준다면 우리 작전이 어그러진 것쯤은 넘어가 줄 수 있지. 정말로 당신이 저놈을 잡을 수 있다면 말이오.”

“그럼 됐다. 거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성진은 그렇게 말하곤 숲을 벗어나 외길 앞에 펼쳐진 평원으로 나섰다.

어느새 쫓아온 다나는 그 뒤를 따랐다.

“아서는?”

“제가 뛰어내릴 때까지도 계속 비명을 질러대고 있긴 했는데. 괜찮겠죠 뭐.”

공격대에 합류할 것처럼 굴며 비행기를 얻어 탄 두 사람은 75층에 가까워지자 조종간을 탈취하고 그대로 75층으로 넘어가려 했다.

당연히 비행기를 타고 75층에 접근했다간 거인들의 저격에 당할 게 뻔했기에 아서는 울며불며 난동을 피웠지만 두 사람에게는 저항할 수 없었다.

“비행기에 손상은 안 갔으니 알아서 착륙할 거예요.”

“미안하게 됐군. 그래도 저놈을 잡아주면 비행기값 정도는 되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막으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길을 열어주시게요?”

성진은 대답 없이 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뭔데요 이게?”

다나는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성진의 제스처에 고민하다가 자신의 턱을 살포시 얹었다.

다나는 자신이 하고서도 이게 맞나 싶어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 성진을 올려다봤다.

그에 반해 성진은 남태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턱 말고. 손.”

“앗! 아앗! 아하하핫! 그, 그렇죠. 손이죠 손. 턱일 리가 없죠…….”

다나는 새된 소리를 내며 어색하게 물러나 손을 얹었다.

성진은 그런 다나의 손을 붙잡고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뭐, 뭔가요 갑자기이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나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올라갔지만, 성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충 이 정도인가.”

“뭔데요 도대체!”

“지금부터 시범을 보이도록 하마. 검을 다오.”

“네?”

다나는 그간 거래할 일이 없어 인벤토리에 쌓아뒀던 아이템 중, 적당한 장검 하나를 꺼내주었다.

“네 재능이라면 네게 딱 맞는 검술을 스스로 만들어 익힐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보단 샘플이 있는 편이 낫겠지.”

다나의 재능은 성진이 일일이 가르치는 것보다 정보만 주고 알아서 깨우치게 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지금부터 성진이 하려는 것은 다나가 스스로 연구할 수 있도록 완성된 검술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

“딱 네 스펙에 맞춰 네 몸으로 재현 가능한 검술만 사용하도록 하마.”

성진은 다나의 손을 잡고 그녀의 신체능력을 확인했다.

이어서 자신 또한 다나의 수준에 맞춰 스스로의 힘을 제한했다.

“잘 보고 기억해둬라.”

성진은 그렇게 말하곤 검 한 자루를 달랑 든 채 외길 위로 나아갔다.

그에 따라 아이젠그라드가 반응하여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원거리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홀로 외길 위에 선 상대를 존중하여 거인들도 일대일을 지켜보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카심과 공격대 멤버들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런 패턴도 있었어? 처음 보는데?”

“그간 저 괴물이랑 일대일을 하려던 사람이 없었으니 알려질 일이 있나.”

갑자기 나타난 성진이 혼자 중간 보스를 잡겠다고 나선 이야기는 순식간에 공격대 전체에 퍼졌다.

“근데 저거 일대일로 잡을 순 있나?”

“말이 되겠냐? 레이드 보슨데.”

100미터가 넘는 거인.

마법도 튕겨내는 특수금속으로 만들어진 전신갑옷과 방패.

그 무게만 해도 거대괴수와 싸우는 거대로봇 뺨치는 수준.

거기에 저 거인은 그런 몸뚱이를 하고서도 올림픽 체조선수쯤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재빠른 움직임이 가능했다.

플레이어 못지않게 민첩한 거인을 상대로 근접전을 펼치는 것은 자살행위.

“우리 인원수 보고 쫄아서 차라리 저거랑 싸우겠다고 말 돌린 거 아냐?”

“아니면 싸우는 척하다가 튈 수도 있지. 혼자 가면 원거리 공격이 안 날아온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든가? 뭔가 방법이 있어서 저러는 걸지도?”

공격대 플레이어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성진은 외길의 중앙에 도착했다.

수많은 거인과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

성진은 검을 뽑아 들었다.

우웅!

검을 뽑음과 동시에 검신 위를 덮은 검기.

“무기를 들어라.”

성진의 말에 아이젠그라드는 방패를 내려놓고 방패의 뒷면에 결속되어 있던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검이라 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야말로 빌딩을 들고 휘두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크기.

그러한 크기의 대검 위에, 검기가 씌워졌다.

“애들만 가득한 곳에 그래도 제대로 된 무예를 배운 놈도 있군.”

아이젠그라드는 거인의 신체와 달인의 검술을 한 데 가진 존재였다.

“그럼 한 수 부탁하지.”

직후, 두 검사의 검이 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빌딩만 한 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둘러졌음에도 성진은 그 공격을 받아냈다.

아이젠그라드 또한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연달아 검기를 흩뿌렸다.

쿠구구구구구궁!!!

한 번 한 번의 격돌마다 굉음이 터지고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대지가 울렸다.

아이젠그라드는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거검을 1초에도 네댓 번씩 휘둘러댔다.

충격파만으로도 산천초목이 뒤집어지며 주변의 대지가 터져 나갔다.

“윽! 흙먼지가!”

“미친 저게 사람이야?”

공격대 플레이어들은 멀찍이 그들이 서 있는 숲속까지 밀어닥치는 풍압에 기겁했다.

플레이어의 스탯으로 지진과도 같은 진동을 버텨내고 서 있을 순 있었으나, 풍압에 튕겨오는 돌멩이나 흙먼지는 거의 총알과도 같은 위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멀찍이 떨어진 플레이어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와중에도 다나는 누구보다 가까운 위치에 흔들림 없이 우뚝 서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몸집을 이용해 파고들어 입체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땅에 몸을 붙이고 전진하고 있어.’

성진은 충격을 완벽하게 발아래로 흘려내면서 아이젠그라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발판이 없는 공중에서 격돌하면 힘이 동급이라고 해도 몸이 가벼운 성진은 뒤로 튕겨나고 만다.

성진은 완벽한 힘의 컨트롤로 모든 충격을 흘려내기 위해 바닥에 딱 붙어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것.

놀랍게도 아이젠그라드는 자신의 공격을 모두 받아내며 전진하는 성진에게 밀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도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모두가 격돌하는 힘의 크기에 놀라고 있었지만 다나 만큼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런 거검을 휘두르면서도 힘으로 미는 게 아니야. 쾌와 환의 묘리가 섞인, 오히려 기교가 넘치는 검술이야.”

거인의 검술은 놀랍게도 요정기사인 마티아스 못지않은 기교를 자랑했다.

한 번 휘두르는 공격에도 네 번의 검로 변화가 섞여 4지선다를 강요하는 모습.

심지어 검기의 표면을 비늘처럼 만들어, 충돌한 순간 비늘 같은 검기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 칼날처럼 날려 보내기까지 했다.

검을 막아도 검기 조각들이 뿌려져 추가타를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기술.

“지구상에 있는 어떠한 랭커보다도 지금 저기 있는 100레벨짜리 거인의 검술이 더 뛰어나다는 건가…….”

스킬로 검술을 익혀서는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진짜 고수들의 공방.

다나 만큼의 힘으로도 거인의 공격을 모두 받아내는 성진도, 그걸 상대하면서도 거리조절을 하고 있는 거인도 보통이 아니었다.

“단순히 힘이 세서 위대한 전사종족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어.”

그러던 중, 성진의 전진이 멈췄다.

뚝!

성진의 전진에 따라 조금씩 물러나던 아이젠그라드는 외길 끝에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듯이 발의 위치를 재정비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 순간 폭풍처럼 몰아치던 공방이 멈췄고.

“참철(斬鐵).”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성진의 일격에 아이젠그라드의 갑옷이 조각나 떨어졌다.

“이겼어?”

“이겼다고?”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에 공격대 플레이어들은 홀린 듯이 숲에서 나왔다.

외길 너머의 거인들은 아직 멀쩡히 살아 있었지만 몬스터인 그들조차 성진의 승리에 놀란 듯이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성진은 그 속에서 다나를 불렀다.

“이론상 지금의 너라도 재현할 수 있는 검술이었다.”

“…… 노력해볼게요.”

“걱정 마라. 나도 당장 이만큼 하라고 하진 않으니까. 그럼 시범은 이쯤하고.”

성진은 슬금슬금 숲에서 기어 나오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네가 언젠간 도달해야 할 최종목표를 보여주마.”

성진은 아이젠그라드를 대신하듯, 75층에서 등을 돌려 외길 위에서 플레이어들을 맞이했다.

“말한 대로 중간 보스는 쓰러뜨렸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하도록 하지.”

“무슨 소리지?”

성진은 설명 대신 검을 들어 올렸다.

“잘 봐둬라 다나. 지금부터 내가 보여주는 건 검의 극의에 도달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기의 완성형이다.”

성진의 검 위에 맺힌 검기가 실타래가 풀어지듯 연기처럼 풀어졌다.

그러면서도 광채를 잃지 않은 검기는 신비롭게 빛나며 이내 다나가 본 적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신성광휘……?”

격이 떨어지는 영혼은 꿰뚫어 볼 수 없는 신성존재의 후광.

“아냐, 신성광휘가 아니라 그와 닮은 무언가야.”

“제대로 봤다.”

만류귀종.

검의 끝을 본 자들은 어느 차원, 어느 종족이든 똑같이 신성광휘와 닮은 검기를 발현했다.

신격에 걸쳐서 그런 모습이 된 건지, 아니면 신성광휘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원리라서 비슷해지는 건지.

정확한 이유는 누구도 알지 못했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이 경지에 다다른 검기는 신성존재의 영혼조차 상처 입힐 수 있게 된다는 것.

“평범한 검기와는 격이 다르다 하여 특별히 이름 붙이길 검기성강(劍氣成罡).”

성진은 그것을 75층으로 이어진 외길에 휘둘렀다.

그에 따라 성진과 아이젠그라드의 전투에도 멀쩡하던 거인의 길이 빛으로 화했다.

“이것이 바로 검강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