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55화 (55/170)

<55>

“와 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진짜로 죽을 뻔했네요.”

“중간에 뛰어내렸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이 비행기가 얼마짜린데요. 이거 날려 먹었으면 살아도 자살 마려웠을 걸요?”

아서는 성진이 받아낸 비행기의 동체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70레벨 플레이어라면 제트기도 아니고 일반 경비행기의 추락 따윈 충분히 뛰어내려 탈출할 수 있었다.

끝까지 조종간을 잡고 있었던 건 비행기를 살리기 위함이었던 것.

“탑 안에서 이런 물건을 사려면 바깥의 100배는 드니까요.”

“네가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진 않는데.”

“아, 이건 본대에서 받은 겁니다.”

“본대?”

“네. 75층 공격대요. 제가 이걸 타고 돌아다니면서 정찰 겸, 공격대 인원모집을 하고 있지요.”

아서는 그러더니 문득 성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성진? 아무튼 성진 씨도 공격대에 참여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보니까 상당한 실력자시던데.”

다나는 그 모습을 보며 성진에게 속삭였다.

‘저희에 대해 모르는 것 같은데요?’

‘그럴 만도 하지.’

30층을 차단하고 센트럴 시티에서 날뛰는 동안 성진의 이름이 언급될 일은 없었다.

즉, 커뮤니티에 퍼진 성진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30층에서의 이야기가 마지막이라는 뜻.

75층을 노리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보다 한참 아래인 30층의 사건까지 항상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당장 자기네 공략에 바쁜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공격대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 중에는 나나 남태수의 이름을 기억하는 놈들도 있겠지.’

“이놈의 스테이지는 아무나 보스를 잡으면 놀고 있던 인원까지 전부 클리어가 되니 원. 다들 버스만 타려고 해서 공격대 인원을 모으는 것도 일입니다.”

드넓은 이곳 스테이지에는 숨겨진 던전이나 이벤트 등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꼭 기여도 보상을 얻지 않아도 일반 플레이어들이 얻어 갈 건 한가득이라는 뜻.

오히려 보스 처치 보상은 대부분 공격대 주요 멤버들에게 돌아가니 일반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선 보스는 알아서 잡게 내버려두고 자기들은 다른 곳을 도는 게 이득이었다.

“지금 공격대가 몇 명까지 모였는데?”

“72명입니다. 웬만하면 100명은 채우고 75층에 도전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80명 정도 채우면 일단 시도해볼 것 같아요. 요즘 51층 신입 플레이어가 엄청 줄었거든요.”

아서는 그러면서 밑에 무슨 일 있냐고 물었으나 성진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베르나데트의 커뮤니티 여론조작이 잘 이뤄지고 있는 모양이군.’

베르나데트의 명령에 따라 센트럴 시티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들은 커뮤니티에서 아무런 일도 없는 척하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한 짓이지만 이걸로 몇 주씩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 있으세요? 합류하실 거면 비행기로 태워다드릴 수 있는데.”

“잘 됐군. 우리도 그쪽으로 직행하는 중이었거든.”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말에 아서는 성진의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아무래도 스카우터가 모집에 성공하면 나름의 혜택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70명이 넘는 인원을 관리하려면 나름의 시스템을 갖춰야겠지.’

기여도 보상을 거의 챙기지 못할 인원에게도 나름의 보상을 약속하지 않으면 그들이 협조할 리가 없었다.

“식사하세요.”

“오오, 비행기를 구해주신 데 모자라 밥까지……!”

아서는 성진의 교육 아래 겉모습만은 멀쩡해진 다나의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맛이 어떠세요?”

“컥! 컥!”

마카롱보다 더 단 빵에 누텔라를 한가득 뿌린 샌드위치는 당뇨병 환자를 한순간에 보내버릴 흉기나 다름없었다.

“마, 맛이 되게 미국식이네요. 그, 뭔가 혈당치가 폭발하는 느낌?”

“칭찬 감사합니다.”

아무리 봐도 칭찬은 아니었으나 다나는 만족한 모양이었다.

아서는 당황한 듯 성진을 바라보았으나, 성진은 무심하게 먼 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샌드위치를 먹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걸 아무렇지도 않게……?’

성진의 샌드위치는 그가 따로 만들어둔 것.

누텔라 대신 렌치소스가 들어간 평범한 녀석이었다.

“오늘도 맛이 좋군.”

‘히익!’

“고향의 맛이야.”

‘히이익!!’

고향이라고 해봐야 어릴 때 먹었던 동네 분식점 맛이었지만, 새삼 지구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나서 좋았다.

“설탕 좀 더 칠까요?”

“아, 아니요. 충분합니다…….”

식사를 하던 아서는 중간부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음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그의 미각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은 3일 뒤의 일이었다.

* * *

“이 인원수로는 화력이 부족한데 저걸 어떻게 뚫을지가 문제로군.”

75층 공격대의 대장 카심은 눈 앞에 펼쳐진 협곡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75층과 74층을 가르는 스테이지의 경계.

그것은 거인이라도 쉽사리 넘을 수 없는 거대한 협곡이었다.

“거인한테는 저게 성벽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인간도 성벽 주위에 해자를 파고는 했으니 이해는 갑니다.”

“이해만 하지 말고 방법도 좀 생각해보라고.”

카심은 평범한 민간 클랜 소속의 플레이어였다.

물론 민간 클랜이라곤 해도 세계정부와 엮여 있지 않을 뿐, 중동에서 상당한 투자금을 받아 움직이는 대형 클랜이긴 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75층을 통과했어야 하는데.”

“밑에서 그런 난리가 날 줄 어떻게 예상했겠습니까. 덕분에 51층으로 들어오는 플레이어도 팍 줄어서 인원이 없어요 인원이.”

원래 카심의 계획대로라면 못해도 지금쯤 1,201회차로 들어온 세계정부 극동군구의 플레이어들이 75층을 깨줬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리 메이양과 극동군구 플레이어들은 주성진이라는 플레이어와 만나 전멸하였으며, 심지어 그 뒤로 들어온 추살대조차 그 남자에게 깨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려면 주성진 그놈이 올라오기 전에 빨리 75층을 깨고 개별 스테이지 구간으로 튀어야 하는데.”

“어쩔 수 있겠습니까. 일단 되는 대로 해봐야지요.”

75층을 빙 두르며 펼쳐진 대협곡.

거인조차 뛰어넘을 수 없는 그 협곡을 통과하는 것은 정면으로 이어진 유일한 외길을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그곳을 막고 있는 적의 중간 보스.

풀 플레이트 메일과 대방패로 중무장한 100미터급 거인을 뚫는 것이었다.

“정면에서 들어가면 중간 보스에게 막히고, 다른 쪽에서 날아서 건너려면 건너는 동안 요격당하고. 협곡 아래로 내려가면 독 저항을 떡칠해도 버티기 힘든 독의 강인가.”

거인들의 싸움에서 성벽은 무의미한 것.

때문에 거인들은 성벽 대신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깊이의 해자를 팠다.

이것이 바로 75층을 두른 대협곡의 정체였다.

“이걸 뛰어넘으려면 대형 거인이라도 최소한 도움닫기가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거인들이 도움닫기를 하려면 그만큼 많은 공간이 필요할 테고요.”

“수비하는 쪽에선 해자를 파놓고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가서 요격만 하면 된다는 건가.”

“예. 말 그대로 거인과 거인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장애물입니다.”

75층의 정석적인 공략법은 외길 위의 거인을 원거리 플레이어들의 화력으로 밀어내고, 그 공백에 근접 플레이어들이 뛰어들어 상륙하는 것.

원거리 공격만으로 중간 보스를 죽일 순 없어도 최소한 밀려나게 하는 건 가능하기에 만들어진 공략법이었다.

“정석적인 공략에는 충분한 화력을 갖추기 위해 대인원이 필요해. 지금 숫자로는 정원의 반도 안 되는군.”

원거리 플레이어들이 중간보스를 밀어내지 않은 채 근접 플레이어들이 진입한다?

그랬다간 저 살아 움직이는 성벽이나 다름없는 중간 보스에게 깡그리 협곡 밑으로 쓸려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저놈을 싸워서 잡을 순 없나?”

“빌딩만한 거인이 쇳덩이로 중무장하고 플레이어 못지않게 민첩하게 움직이는데 어떡하겠습니까. 보통은 얻어맞은 시점에 협곡 아래로 떨어질 것도 없이 공중에서 터져 죽습니다.”

저놈의 갑옷은 그냥 강철이 아닌지 마법의 위력까지 반감시켰다.

게다가 어떻게 외길 위에서 전투에 들어간다고 해도 싸우는 동안 75층 안쪽에서 날아오는 거인들의 원거리 공격 또한 문제였다.

거인들의 화살은 말이 화살이지 사실상 대포나 다름없는 수준에, 돌무더기라도 날아오면 융단폭격 그 자체였으니까.

“길이 하나뿐이라 공격이 집중되니 저 위에서 싸우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괜히 일단 밀어내고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시가전을 하는 게 아니죠.”

“으으 주성진 그놈만 아니었어도! 썩어도 준치라고 극동군구 놈들이 있었으면 세계정부의 지원 빨로 그냥 밀어 버렸을 텐데.”

보통은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군인 플레이어들이 밀어 버리던 구간.

카심은 극심한 전력공백에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정부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

가장 뛰어난 이들은 언제나 군 소속으로 탑에 들어오기 마련이었고, 군인 플레이어가 없다는 건 그들이 반쪽짜리 공격대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보조에 불과한 여기 NPC들을 믿을 수도 없고. 어디 하늘에서 우리 대신 중간 보스 좀 날려 버릴 플레이어 하나 안 떨어지나.”

“그런 게 왜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거인도 날려 버릴 정도의 괴물이면 하늘도 날 수 있지 않겠어?”

그러던 중 털털거리는 고물 비행기 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아서인가? 벌써 돌아온 걸 보니 뭔가 건수를 물어왔나 보군.”

카심은 거인들의 저격을 피하기 위해숲속에 펼친 막사에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라? 저놈 왜 착륙장 쪽으로 안 가고 75층 쪽으로 가냐?”

“저거 저 이상 다가가면 거인들의 저격 사정거리에 들어갈 텐데……!”

걱정과는 달리 비행기는 사정거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위치에서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선회했다.

“뭐야? 뭘 떨어뜨린 거야?”

대답은 시야 보조 스킬을 가진 총잡이 플레이어에게서 들려왔다.

“사람입니다! ID를 읽기는 힘들지만 플레이어인 것 같은데요?”

“뭐?”

카심의 공격대에 속한 아서가 멀쩡한 플레이어를 잡아다 죽으라고 사지에 던진 거라면 카심도 책임을 피하기 힘들었다.

“저놈이 미쳤나!”

저 하늘의 점은 75층을 향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착지할 방법이 있다고 쳐도 저기는……!”

그리고 이내 카심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파앙!

대포를 쏘는 듯한 굉음.

이어서 푸른 선 하나가 창공을 가로질렀다.

대궁(大弓)을 이용한 거인의 저격.

100층에 가까워지며 슬슬 현대 병기를 따라잡기 시작한 거인의 저격은 벙커버스터 뺨치는 위력을 자랑했다.

인간이 직격으로 맞으면 인간이었던 것조차 남지 않을 수준.

그러나 직후에 일어난 일은 카심의 두 눈을 의심하게 했다.

타앙!

“뭐?”

거인의 화살은 하늘의 점과 닿는 순간 예각으로 꺾이며 지면으로 튕겨나갔다.

화살이 튕겨나간 방향은 놀랍게도 정확하게 중간 보스 아이젠그라드가 서 있는 장소.

콰아앙!

중간 보스인 아이젠그라드는 일반 거인 궁수의 저격 따윈 문제될 거 없다는 듯이 제자리에서 안정적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중간 보스야 그렇다 쳐도 플레이어는 저걸 어떻게 튕겨냈단 말인가?

심지어 정확하게 아이젠그라드를 노리고 튕겨냈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 플레이어는?”

공중에서 화살을 튕겨낸 플레이어는 그대로 튕겨나 공격대 진지 쪽으로 떨어졌다.

툭.

“발판이 없으니 튕겨 나와 버렸군. 그냥 피할 걸 그랬나.”

성진은 착지하며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일어섰다.

카심은 바라던 대로 하늘에서 플레이어가 뚝 떨어진 상황에 웃을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