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나저나 거신왕의 룬이라. 티타니아의 영혼도 그렇고. 수많은 탑 중에 이 탑에 중요한 것들을 몰아놨군.”
“설마 함정인가요?”
“그랬다면 이미 지구 상공에 성좌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었겠지.”
남태수에게 뒤를 맡겨둔 성진은 다나와 함께 중앙부를 향해 일직선으로 이동했다.
다만 거인의 나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땅도 거대했기에 이동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추측할 수 있는 이유로는, 분배의 마찰인가?”
요정공주의 영혼, 거신왕의 룬처럼 큰 전리품이 손에 들어오자 성좌들끼리 분쟁이 생겼을 가능성.
“누가 가져가야 할지 분쟁이 생겼으니 한곳에 몰아놓고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관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가진 정보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럼 그 외에도 도움이 될만한 보물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대신 놈들이 주기적으로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있어 곧 우리의 존재를 들킬 수도 있지.”
장점이 더 클지, 단점이 더 클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하던 중 다나의 후각이 거인의 접근을 포착했다.
“방향을 보아하니 곧 마주치겠네요. 제가 정리하고 올게요.”
다나는 날아가는 공을 발견한 강아지마냥 성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뛰어나갔다.
거인의 나라는 대규모 진행 스테이지인 만큼 등장하는 적들도 강력.
이곳에서 등장하는 거인들은 하나하나가 적정 레벨 플레이어들이 파티를 이뤄 잡아야 하는 몬스터였으나, 다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우어어어!”
거인의 거검이 다나가 서 있던 곳을 내려찍자 지진과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거인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을 때, 다나는 거기에 없었다.
휘릭!
검을 타고 올라선 다나는 그대로 검신 위를 달려 팔을 타고 올라 거인의 목을 베어냈다.
“누우우운!”
베어낸 목에서 튄 피가 옆에 있던 다른 거인의 눈을 가렸다.
다나는 눈을 감싼 거인에게 옮겨 타 또다시 일격에 목을 베었다.
고정되지 않은 상대의 몸을 발판으로 삼으면서도 자유로운 움직임.
전사 4명으로 이루어진 거인 스쿼드가 전멸하기까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나는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쓰러진 거인들을 뒤로하고 성진에게 돌아왔다.
“그럼 영혼의 회수를.”
성진은 쓰러진 거인들에게서 영혼을 회수했다.
이번에도 모두 어린아이의 영혼이었다.
“슬슬 무장한 거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거인 전사라고 해도 몸집만 크지 별거 아니네요.”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거인들을 얕보지 마라. 진짜 거인 전사의 힘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니까.”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현시점에서의 근력을 확인했다.
“내가 사용하는 괴력도 거인들의 룬 마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저씨의 힘도요?”
NPC의 영혼을 회수하거나, 천사를 잡고 얻은 마력과는 별개로 성진은 처음부터 괴력을 발휘했다.
다나도 성진의 끝을 알 수 없는 괴력에 대해서는 잘 알았기에 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룬 마술은 마력을 소모하는 게 아니라 신체에 새겨지는 것. 덕분에 가진 힘을 모두 버리는 와중에도 이것만은 남겨둘 수 있었지. 이조차도 카르마를 버리면서 약화된 거지만.”
만일 여기서 거신왕의 룬을 얻는다면 근력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만한 괴력이라면 8대 종족 소리를 듣는 것도 이해는 가는데, 굳이 거대화를 할 필요가 있나요? 딱히 싸움에 유리할 것 같진 않은데.”
“틀린 말은 아니지.”
다나도 근접전에 있어 리치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검기와 마법이 난무하는 전투에서 몸집이 큰 건 득보다는 실이 많은 일이었다.
“단, 어설프게 크다면 말이다.”
“네?”
“마법사의 150레벨 스킬이 메테오라지? 그것처럼 운석이, 아니 아예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네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어쩔 거냐?”
“아무리 검기가 길어도 달을 가를 수는 없을 테니 죽겠죠? 달의 크기를 생각하면 도망치지도 못할 텐데.”
“거신왕의 주먹은 그 이상이다.”
“……!”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압도적인 물리력.
거신왕까지 갈 것도 없이 대장군급만 되어도 거인들은 걸어 다니는 재앙이었다.
“마법적 소양이 전무한 종족이 8대 종족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압도적인 물리력 때문이지.”
지구의 신화 속 거인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을 때, 현실의 거인족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거신왕의 룬을 손에 넣어야 한다.”
거신왕의 룬을 손에 넣으면 성진이 가진 카르마 효과로 그와 함께하는 모두가 영향을 받을 테니까.
“해도 저물어가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도록 하지.”
“그럼 제가 잠자리의 준비를.”
다나는 인벤토리에서 갖가지 캠핑 도구를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탑의 상점에는 장비나 포션 등의 소모품 외에도 모험에 필요한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었다.
성진은 시스템 상점을 이용할 수 없으니 다나가 이를 챙기고 있는 것.
남태수가 봤으면 이것 때문에 다나를 데려간 거였냐고 외칠 일이었으나, 여기선 아무도 따질 사람이 없었다.
성진은 그동안 지도를 펼쳤다.
“사룡왕은 75층에 거신왕의 룬이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보스가 들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대놓고 들고 있다면 진작 플레이어들이 챙겨갔으리라.
따라서 성진이 해야 할 일은 돌격해서 자기가 먼저 75층을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들을 막아서고 룬을 찾는 것이었다.
“현시점에서 75층에 가장 가까운 파티는 74층에 있는 이놈들인가.”
베르나데트가 챙겨준 지도에는 거인의 나라를 진행하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정보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75층 공성전을 위해 인원을 모으고 있는 파티라. 일단 이놈들부터 막아놔야겠군.”
75층에 등장하는 거인들을 잡아 그 안에 든 영혼들에게 물어보면 황금룬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최악의 경우 75층 전 맵을 뒤져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은 이놈들을 앞질러서 길을 틀어막고 시간을 벌어야겠군.”
앞으로의 일을 점검하던 성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 다나를 바라보았다.
다나는 어느새 모닥불에 웍을 얹어놓고 식재료를 잡히는 대로 때려 박고 있었다.
“…… 뭘 하고 있는 거냐?”
“부대찌개를 만들고 있어요!”
“부대찌개?”
“네. 태수 아재한테 들은 음식이지만 아저씨도 동향 사람이라면서요? 그렇다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고.”
“내가 이계를 돌아다니는 동안 음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론 부대찌개에 초콜릿은 안 들어갔었는데.”
아무리 성진이라도 초콜릿이 들어가 새까맣고 걸쭉해진 찌개가 부글거리는 모습을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부대찌개는 아미 스튜잖아요? 군 보급품으로 나온 것들을 이것저것 넣어 끓이는 거니까 초콜릿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군대 스튜라니까 초콜릿도 보급품이니 괜찮겠지 하며 쑤셔 박았단 소리.
남태수도 안 할 기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모습에 성진은 진지하게 혼자 올 걸 그랬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번 드셔보세요! 분명 맛있을 거예요! 자, 아……!”
다나는 과도한 의욕으로 성진의 입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성진은 입안에 들어온 그것을 우물거리다 이내 꿀떡 삼켰다.
“어, 어떤가요?”
“초코 맛이군.”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비주얼 그대로의 맛.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맛이었다.
“앞으로 밥은 내가 하도록 하지.”
“그럴 수가…….”
성진이 이런 걸 만들어놓은 주제에 잘도 실망한다는 눈으로 다나를 바라보자 다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하지만 아저씨한테 요리까지 시킬 수는 없는걸요. 싸우는 거라면 저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시니까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초코찌개를 만들 필요 없다. 밥이 필요한 거였으면 애초에 요리사를 데려왔을 테니.”
성진은 그렇게 말하곤 다나에게서 숟가락을 넘겨받아 부대찌개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맛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계를 넘나들며 별걸 다 먹어야 했던 성진으로서는 못 먹을 것도 아니었다.
“내일을 위해선 너도 먹어두…….”
성진은 다나에게도 밥을 먹으라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왜 그러세요?”
“웨어울프가 초콜릿을 먹어도 되는 건가?”
“웨어울프는 강아지가 아니거든요?!”
“늑대도 개과 아닌가?”
다나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자신의 숟가락을 꺼내 초콜릿 부대찌개를 한가득 퍼먹었다.
“보세요! 완전 멀쩡하죠?”
“그런 걸 먹고 멀쩡할 수 있는 게 더 신기한데.”
“아무튼 앞으로 밥은 제게 맡겨주세요! 제대로 연습할 테니까요!”
성진은 그 말에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나가 영국 출신이라는 점을.
이날 이후 성진이 먹는 모든 음식의 설탕량이 25배 상승했다.
“달군.”
“이것도.”
“라면까지…….”
탑 내부에서는 외부의 식재료가 귀하다.
베르나데트에게서 기껏 받아온 한국 라면까지 설탕조림면이 되어 버리자 아무리 성진이라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 나이 먹고 열심히 하려는 애한테 밥투정을 할 순 없다는 생각만이 성진을 붙잡고 있었다.
“괜찮죠? 라면에는 원래 설탕을 넣기도 한다고 커뮤니티의 레시피에서 찾아보고 넣은 거니까 이번 건 진짜 괜찮을 거예요!”
“그 레시피에 양은 안 적혀 있었나?”
“좀 더 넣긴 했지만 설탕은 많이 넣으면 많이 넣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발언이었다.
“당분이 들어오면 뇌도 활성화되고, 기분도 좋아지고, 심지어 맛도 좋아지는데!”
놀랍게도 다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죄악의 결과물을 잘만 해치웠다.
“심연의 초코찌개는 그저 전조에 불과했던 건가…….”
단 걸 사랑하는 여고생(중퇴)의 집념은 성진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떻게 웨어울프가 되었으면서도 이걸 좋아할 수 있는 거지? 분명 신체능력이 향상되며 미각도 엄청나게 예민해졌을 텐데?”
성진의 괴력은 룬 마술에 의한 것.
그러니 조절도 가능하다.
허나 다나의 신체능력은 종족변화에 따른 영구적인 향상이 아닌가?
분명 예민해진 미각이 상시 적용될 텐데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단맛을 선호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베르나데트가 이 꼴을 봤다면 기절했겠군.”
요리에 진심이었던 베르나데트는 식량을 챙겨주며 조미료 하나하나 소분, 개별 포장하여 밀키트로 만들어주는 정성까지 보였다.
술집을 연 것도 어떻게든 요리를 낼 수 있는 가게를 하고 싶었다는 모양.
프랑스인의 혼을 이어받은 그녀가 이런 꼴을 보면 혼절하리라.
“그래 딱 저런 표정을 짓겠지.”
도시화되지 않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한적한 시골 같은 풍경.
마력을 아끼기 위해 도보로 이동하는 배낭여행 같은 분위기.
그리고 하늘 위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경비행기 하나.
“비행기?”
다나의 의문 뒤에 비명 섞인 외침이 이어졌다.
“추락한다!!! 거기 두 사람 피해욧!!!!!! 구석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떨어진 경비행기는 지면에 처박히기 직전 성진이 잘 받아 땅 위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