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이런 썅……!”
거인의 나라 외곽 삼림지대.
거인과 평야에서 맞붙는 것은 위험.
때문에 플레이어들의 정석적인 공략법은 삼림지대를 통해 거인을 피해 55층 영역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숲속에 거인이 왜 튀어나오냐고!”
거인의 기습에 몇 없는 탱커가 당해 버리자 플레이어들은 사분오열되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어의 대다수는 원거리 딜러.
나무가 방해되는 짙은 숲속에선 화력의 집중도, 적의 색적도 반감된다.
“아무리 그래도 거인이 그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닥치고 달리기나 해! 거인의 시선이 다른 놈들한테 쏠렸을 때 여길 벗어나야 돼!”
위로 올라가는 기존의 스테이지와 달리 거인의 나라는 수평적으로 펼쳐진 스테이지.
중심을 향해 스테이지의 경계를 넘어서면 다음 스테이지로 진행한 것으로 처리되어 쫓아오는 적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경계다!”
“여기만 넘어서면……!”
두 사람이 경계를 향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콰직!
갑자기 나타난 거인의 손이 사람을 파리처럼 내려쳤다.
“료!!!”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도 거인이 나타나 남아 있던 류를 잡아챘다.
“뭐, 뭐야? 거인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고……?”
탑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지성을 잃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이곳에 나타난 거인들은 조직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명령이라도 받는 것처럼…….’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기 전에 잡았나. 잘했다.”
산양의 두개골을 뒤집어쓰고 거대한 대낫을 든 남자.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그는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감싸 피부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두개골 안에 있는 게 과연 사람인지조차 의심되는 모습.
숲의 그림자와 이어진 로브는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허억……!’
새까만 동공 속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
공포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한 노력 끝에 류는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ID들 발견할 수 있었다.
“프, 플레이어? 플레이어가 어떻게 거인들을?”
남태수의 ID를 보고 놀란 류였으나 호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용히.”
그 한마디에 류는 입을 다물었다.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일반 플레이어라도 마력의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니다.
사룡왕과 계약하며 그 피를 받은 남태수는 영혼을 파고드는 마력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산 자라면 누구나 남태수의 근처에 있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판단력과 신체능력이 저하되었으나, 일반 플레이언 류가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다.
“ID가 류 라니. 일본인이라면 보통 성으로 불리니 ID도 성씨가 등록될 텐데.”
남태수는 붙잡은 두 플레이어의 ID를 보며 말했다.
“일부러 탑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이름으로 살며 ID를 조작했군. 본명을 숨기려 하는 걸 보면 야쿠자 출신인가?”
“그, 그게 어쨌다는 건데!”
“물론 별 상관없는 일이긴 해.”
남태수의 손이 류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당신은 여기서 잠들 테니까.”
두개골의 텅 빈 눈구멍 안쪽으로 보이는 창백한 안광.
그것이 류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 * *
“휴우.”
졸음 저주로 두 플레이어를 잠재운 남태수는 무르무르의 두개골을 벗고 땀을 닦아냈다.
“작업 중에 갑자기 나타나고 난리야. 깜짝 놀라서 다 때려눕혀 버렸네.”
남태수는 붙잡은 플레이어의 숫자를 세어보고 한 명도 놓치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이리오렴.”
그 말에 거인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언데드가 아닌 탑의 몬스터NPC들.
원래라면 플레이어를 공격해야 할 거인들이 마치 남태수의 소환수마냥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서 꺼내줄 테니 잠시 고개를 숙여주겠니?”
그러자 수많은 거인들이 그를 받들듯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명예의 전당에 잡혀 있던 마녀, 바바 야가의 주술은 지성이 떨어져 있는 거인들을 매혹시켜 그의 부하로 만들어놓았다.
남태수는 그 앞으로 걸어가 사신의 대낫으로 거인들의 목을 베었다.
-자, 자유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탑에서 나갈 때까진 다 끝난 게 아니니 일단 이 안으로 들어와 있으렴.”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무르무르의 영혼석에 NPC의 영혼들을 담았다.
영혼의 해방.
사령술사라 해도 시스템에 얽매인 영혼들을 볼 수 없었던 남태수는 사룡왕과의 계약으로 그들에게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NPC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기에 성진과는 따로 행동하며 영혼들을 해방시키고 있던 것.
‘혼자 움직이자니 여전히 쫄리긴 해. 그렇지만 이건…….’
51층 이후로 남태수가 해방시킨 영혼들은 모두 어린아이의 영혼.
탑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실상 어린아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10살도 안 되는 완전 어린애들이었다.
그 말은 1,201회차에 달하는 시간 동안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어린아이를 죽이고 다녔다는 뜻.
“개 같은.”
-네?
“아, 아냐. 혼잣말이야.”
남태수는 어린 영혼들의 반응에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처음 51층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었다.
* * *
51층에 진입한 성진은 곧바로 주변의 NPC들을 피아구분 없이 모두 ‘해방’시키고 막사를 점거했다.
“조용해졌으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탑의 51층에서 75층까지는 거인들의 나라를 공략해 들어가는 전쟁 스테이지였다.
플레이어는 인간 나라의 일원으로서 거인을 쓰러뜨리기 위한 용사가 되어 전쟁에 참여하여 거인과 싸워야 했다.
51층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이 각각의 스타팅 포인트에서 중심부로 공격해 들어가는 구조.
층별로 스테이지가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상 양궁 과녁처럼 중앙과의 거리별로 스테이지가 나뉘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당연하게도 중심부로 가는 루트도 매우 다양하여 어느 경로를 택할지는 플레이어의 자유.
센트럴 시티 못지않게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진행하는 스테이지였다.
“물론 여기는 타일 맵처럼 공간이 분리되어 있으니 같은 진행도의 플레이어만 만나겠지.”
드넓은 맵.
그리고 30층의 차단으로 추살대 같은 건 걱정할 필요 없는 상황.
“그러니 남태수와 나는 따로 나뉘어서 움직인다.”
“엥? 또 따로 움직여요?”
“그래. 이 스테이지에서 우리가 가장 걱정해야 하는 건 다른 플레이어들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것이니까.”
거인의 나라는 수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스테이지였다.
75층에서 거인왕이 쓰러진 순간, 51층부터 75층 사이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76층으로 이동한다.
즉, 거인의 나라를 공략하고 있는 플레이어 용사 중 아무나 왕을 쓰러뜨리면 되는 것.
대천사도 먹었겠다 평상시라면 성진도 몇 스테이지 정도 스킵하는 건 상관없겠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사룡왕의 말에 따르면 75층에는 거신왕의 룬이 있다. 그걸 먹기 전까지 이번 회차의 공략전이 성공하면 안 돼.”
요는 이랬다.
“나와 다나는 최단거리로 중앙부로 향해 다른 플레이어들의 클리어를 막고, 룬을 찾는다. 남태수 너는 천천히 외곽부터 모든 맵을 돌며 NPC들의 영혼을 회수해오도록.”
“아니 성진 씨가 가는 건 그렇다 쳐도 다나까지 데려가신다고요?”
“이 녀석은 영혼을 해방하는 작업에 딱히 할 일도 없지 않나.”
“저 혼자 다니다 위험할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 말에 성진과 다나는 물론 무르무르까지 튀어나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남태수를 바라보았다.
“위험? 사룡왕의 사도가? 51층에서?”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민하는 성진의 모습을 보며 남태수도 말하고 보니 꼴이 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에 이곳을 진행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이미 앞서나가서 만날 일이 적겠지. 막 51층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은 전부 우리 쪽에 협력하고 있는 센트럴 시티 플레이어고. 문제가 생길 이유가 있나?”
“…… 갑자기 천사가 튀어나온다거나?”
“여기라면 대놓고 영혼을 회수하고 있어도 괜찮다. 25개의 층이 회차별로 묶여서 돌아가기 때문에 몬스터의 리젠도 회차가 끝나야 이뤄지니까.”
즉, 누군가 75층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영혼의 정산도 없다.
영혼이 빈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75층이 클리어 되어 모두가 76층으로 넘어간 뒤라는 뜻.
“그러니 잘 부탁한다.”
성진은 그 말만 남기고 다나와 함께 떠나 버렸다.
남겨진 남태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 하기 싫다고 여기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원.”
멍하니 성진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났다.
-좋은 마음가짐이십니다, 마스터. 정식 사도를 향해 힘내야지요.
“아니 그, 어, 응, 그래…….”
-그나저나 요정족 스테이지를 지났다 싶으니 바로 거인족 스테이로군요. 성좌놈들의 속셈을 아는 입장에선 참으로 노골적인 스테이지 배치입니다.
“맞아, 거인족도 8대 종족 중 하나랬지?”
신성존재인 성좌들의 침략은 사실상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다.
그런 성좌들과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게 가능했던 8개의 종족과 여덟 왕들.
성진의 후원자이기도 한 여덟 왕 중에는 거인족 왕인 거신왕도 있었다.
-거인족은 타고난 전사종족입니다. 폐하의 사령술이나 요정왕의 정령술처럼 거인들은 룬 마술로 신체를 강화하지요. 거대화도 그 효과입니다.
“거대화라니 잠깐. 그럼 원래 큰 종족이 아니라는 거야?”
-지구인보다는 큽니다만 크다고 해봐야 3미터 언저리입니다. 싸울 때나 거대화하는 것이지요.
“탑에 등장하는 거인들이 작아졌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는데?”
-그야 몬스터로 쓰고 있으니 항상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계약자님이 거인들의 모습만 보고도 전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도 이러한 점 때문입니다.
“응? 마력량을 보고 알아본 거 아니야?”
-룬 마술로 강화한 몸이 거대해지는 것이기에 강력한 거인일수록 전투 시 몸이 더 커집니다. 10미터 20미터 정도는 거인 중에서도 완전히 어린애 수준이지요.
“…… 탑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보스몹 빼고 전부 20미터 미만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전부 애들만 몬스터로 내보내고 있는 모양이군요. 탑 안에 네버랜드를 만들어놓다니 성좌들도 의외로 유머감각이 있군요.
“안 웃기거든?”
어쩐지 성진이 스타팅 지점에서 잡은 거인들에 어린애 영혼만 들어있긴 했다.
그러나 아예 이곳에서 몬스터로 나오는 게 전부 어린애들이었다니.
“지구에 탑이 나타난 지 30년이나 되었다고. 그럼 애들이 여기서 도대체 얼마나 죽어 나갔다는 거야.”
아무리 남태수라도 이 점에는 등골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족의 힘을 생각하면 스테이지의 난이도를 맞추기 위해선 어린애들을 쓰는 게 딱 맞으니까요.
50레벨을 달성한 플레이어는 당당한 초인으로 인정받지만, 8대 종족인 거인족의 시선에서는 어린애 수준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거인들을 투입하면 스테이지를 깰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테니 아예 어린애들로 채워놨다는 뜻.
-탑은 애초에 성좌들이 병사를 길러내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좌의 병사가 어디에 투입되겠습니까?
“8대 종족을 상대하는 전장에 투입되겠지.”
-탑의 스테이지에 8대 종족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인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언젠가 있을 실전을 위한 훈련장이었다.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이성을 잃고 사실상 짐승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로도 강력해서 플레이어들도 다수 죽어 나가는 구간이지요. 따라서 거인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혐오와 원망도 상당합니다.
무르무르는 남태수와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사룡왕의 사도직을 얻은 이상 마스터께선 단순히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된 것만이 아니라, 성좌들의 적이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NPC들의 편인 셈이지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계약자님과 마스터의 행동은 NPC의 편을 들며 동족인 플레이어들과 싸우는 일이 될 겁니다.
성좌들이 만들어놓은 이 네버랜드에서 그들은 같은 인간들을 막아서야 했다.
-헌데 마스터께서는 살인을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무르무르는 그간 남태수가 외면하고 있던 문제를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