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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론 탑의 시스템에게 부여받은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싸워야겠지만, 어떤 직업을 고르느냐에 따라 그 능력을 쌓는 과정을 편하게 만들어줄 순 있다.”
다나는 검술, 남태수는 사령술을 직접 배우고 있었으나 시스템이 제공하는 힘을 그냥 버릴 필요는 없었다.
“스킬은 마력의 흐름과 신체의 움직임을 자동으로 조절해준다. 그 경험을 이용하면 연습에도 도움이 되지.”
시스템의 힘에 기대는 대신,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실력을 연마하는 것.
그런 뜻에서 전직은 두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다나, 너는 이단심문관을 선택해라.”
“마법사 카운터 직업을요?”
“순수한 검술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직업보다 네 재능을 믿는 게 나을 거다. 그렇다면 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대응력을 기르는 것이 좋겠지.”
이단심문관은 상대의 주문을 캔슬시키거나 카운터하는 스킬이 많았다.
“특수한 마력의 흐름을 배우고, 상대의 마력을 흡수하는 스킬로 네 검기를 유지해라. 이단심문관을 택한다면 전투 내내 검기를 유지할 수도 있겠지.”
다나의 재능을 생각하면 검술에 간섭하는 것보단 보조 기술을 챙기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남태수 너는 히든 클래스다.”
“히든 클래스요? 그거 쓰레기잖아요?”
탑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직할 수 있는 직업 외에도 조건이 맞아야만 등장하는 히든 클래스들이 존재했다.
문제는 숨겨져 있다고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현실에선 히든 클래스라고 특별한 게 아니잖아요. 희귀하다는 건 그만큼 비주류라는 건데. 일반 클래스야말로 대중적이며 효율적인 거 아니에요?”
뿐만 아니라 히든 클래스는 공략이나 정보도 적어서 기껏 택해봐야 제대로 된 효율을 뽑아내기도 힘들었다.
특히 탑은 성좌들이 병사를 육성하기 위해 만든 것.
히든 클래스는 적성이 너무 개성적이라 일반 클래스가 어울리지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이거라도 하라고 던져주는 직업에 가까웠다.
“하지만 너는 이미 평범한 사람들과는 조건이 다르다. 그렇지 않나 무르무르?”
그 말에 내내 침묵하고 있던 무르무르가 영체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이라면 이미 그 녀석과 연락이 닿았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뻔하지. 청동망치를 부른 이상 그 녀석이 얌전히 구경만 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
남태수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멍청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널 자신의 사도로 삼으려고 하는 녀석의 이야기.”
“예???”
신성존재라면 성좌가 아니라도 사도를 둘 수 있다.
당장 요정들이 정령술을 사용하는 방식만 해도 종족 전체를 요정왕의 예비사도로 지정하여 축복을 내리는 방식이었으니까.
“저 같은 걸 사도로 삼으려 한다니 도대체 누가요?”
“사령술사를 사도로 삼으려는 놈이 달리 누가 있겠나.”
사령술사들의 신이자 사령술의 시조.
“사룡왕 엘드리치다.”
* * *
며칠 전.
남태수가 한창 바바 야가의 주술로 개구리가 되어 늪지대를 도망쳐 다닐 때.
무르무르의 정신은 아득한 별의 저편, 시원의 영역을 마주하고 있었다.
사령술의 시조이자 모든 언데드의 창조주나 다름없는 존재.
사룡왕 엘드리치는 인간 소녀의 모습으로 용의 뼈 위에 앉아 그를 맞이했다.
무르무르는 정신체의 모습으로 그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어머니 죽음을 뵙습니다!”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모든 필멸자들의 운명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러한 죽음을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으로 만들어낸 존재.
성좌를 비롯한 신성존재들이 죽음 이후를 약속할 때, 사룡왕은 확실한 죽음과 그 죽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힘을 약속했다.
사령술사들에게 사룡왕이란 모든 필멸자가 받들어 마땅한 유일무이한 신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들라.”
사룡왕은 다리를 꼬고 앉아 눈앞의 리치를 내려다보았다.
무르무르와 사룡왕의 사이에는 8,000에 달하는 사룡군단의 언데드 드래곤들이 두 줄로 사열해 있었다.
한때 수많은 성계를 다스리던 용들은 죽어서도 그들의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여가 어찌하여 그대를 불렀는지 알겠는가?”
“왕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고자 하는데 어찌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허나 감히 예견해보건대 당신의 계약자에 관한 일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머저리는 아니로구나.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마. 여는 사령술사 남태수를 계약자와의 단말로 삼을 것이다. 그대는 이에 협조하라.”
“명을 내려주십시오.”
“50층에서 그를 묘지기로 전직시켜라.”
묘지기.
그것은 탑의 시스템에서 사령술사의 히든 클래스로 등장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히든 클래스라곤 해도 비교적 특별할 것 없는 사령술사의 상위직 중 하나였으나, 사룡왕이 직접 개입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었다.
“그를 용의 무덤지기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러하다.”
용의 무덤지기는 사룡왕 직속의 사룡군단을 직접 소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사령술사를 뜻했다.
이는 말하자면 남태수를 자신의 사도로 삼겠다는 뜻.
“여가 그대가 아닌 남태수를 택한 것이 의문인가?”
“…… 솔직히 그렇습니다.”
무르무르는 사룡왕의 물음에 솔직하게 답했다.
어차피 그녀의 눈앞에 선 이상 그의 영혼은 발가벗겨진 것과 같았으니 거짓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남태수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룡왕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한 행동에 따라 몸에 적당히 걸쳐둔 롱 슬립이 흘러내리며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으나, 어린 소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사룡왕이라는 자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 놀랐느냐? 이 몸은 여의 계약자에게 계약의 대가로 맡아둔 것. 본디 여의 몸이 아니니라.”
“계약의 대가라 하심은?”
“간단한 약속이니라. 여는 이 인간 계집의 몸을 맡아주고, 계약자는 천상의 성좌들을 절멸시키는 계약이지.”
사룡왕의 모습은 타인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이기에 행동과 외양이 어울리지 않았던 것.
그러나 그보다 더 의문인 것은 이해하기 힘든 거래조건이었다.
“고작 그런 것을 대가로 성좌들과 싸운단 말입니까? 평범한 인간 하나, 그것도 이미 죽은 자를 위해?”
“인간은 가끔 한 사람을 위해 온 우주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지.”
사룡왕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스럽지 않느냐? 여의 계약자는 이것 때문에 천상의 성좌들을 도륙하고 있느니라.”
그녀는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몸을 선보이듯 빙글 돌며 춤추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지고한 별을 자처하는 천상의 성좌들은 고작 평범한 인간 하나를 죽인 대가로 멸망하는 것이다.”
우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혼의 특이점.
성진의 영혼을 처음 마주한 순간, 사룡왕은 여태까지 본 적 없는 강렬한 영혼의 빛깔에 매료되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좋으리라.
성진의 영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듣자 하니 이 몸의 주인은 처음 계약자가 이계에 떨어졌을 때, 죽어가는 그를 발견하고 구해준 아이라고 하더군.”
사룡왕은 신이 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설명하는 아이처럼 떠들었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거 아는가? 놀랍게도 두 사람이 함께한 것은 고작해야 일주일밖에 안 된다네.”
유대의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
“특별히 이 인간을 아껴서 그런 게 아냐. 특이점은 그저 천상의 성좌들조차 평범한 인간과 같은 값으로 보고 있는 것뿐.”
“성좌들이 이 아이의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았으니, 성좌들에게서도 그들에게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겠다는 뜻이니라.”
“놀랍지 않나? 고작 이런 일로 복수를 택하고, 또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온 우주를 불태울 막대한 카르마를 쌓아올린 것이?”
“그러한 존재가 나만을 바라본다면 어떻겠는가?”
“여는 주성진이라는 남자가 가지고 싶어 참을 수 없느니라.”
그것은 소유욕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영혼조차 신성존재의 영혼과 동등하게 여길 수 있는 인물.
그러한 인물이 자신만을 특별히 여긴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르마를 가진 영혼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위한다면.
사룡왕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충족되는 것을 느꼈다.
죽어 버린 육신을 대신해 영혼이 느끼는 행복.
탐욕스러운 드래곤에게 이것은 지고의 쾌락이나 다름없었다.
“왕께서 원하신다면.”
무르무르는 그러한 사룡왕의 모습을 보며 담담히 충성을 표시했다.
사룡왕은 죽은 동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언데드로 만들어 곁에 둔 인물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것에 보이는 끝없는 집착과 소유욕은 이미 유명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무르무르는 사룡왕의 명령을 받아 남태수를 묘지기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센트럴 시티.
무르무르는 사룡왕의 계획을 지적한 성진에게 되물었다.
-허면 계약자님께서는 마스터가 사도가 되는 것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라 하심은?
“선택은 당사자인 남태수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남태수를 속여서 사도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성진은 그러고선 남태수를 향해 말했다.
“엘드리치가 너를 자신의 사도로 삼으려 한다면 너는 말할 것도 없이 강대한 힘을 얻을 것이다. 재능 없이도 사용하기 편하도록 아예 자신의 권능을 스킬처럼 만들어줄 수도 있겠지.”
멀리 갈 것도 없이 무르무르처럼 자기 휘하의 용들을 옆에 붙여놓기만 해도 신성존재조차 남태수를 가벼이 여기지 못하리라.
사룡군단의 용들은 하나하나가 과거 자신만의 행성을 가지고 그것을 다스리던 존재였으니까.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
“엘드리치와 함께한다는 건 죽음이 끝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지.”
용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왕을 섬기고 있었다.
“강력한 힘이 주어지면 재미있게 즐기며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100년? 200년? 용들은 이미 일만 년 이상 엘드리치를 섬겨왔다.”
사룡왕과의 계약은 되돌릴 수 없다.
그녀의 집착과 소유욕은 누구보다도 강력했으니까.
“고작해야 30년을 남짓 살아온 네가 천년, 만년 뒤의 자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할 수 있나?”
이것은 진심이 담긴 충고였다.
“그녀와 한 번 계약하면 네 손으로는 되돌릴 수 없다. 이 사실을 모르고 보상에 눈이 멀어 계약을 받아들이면 남는 건 끝나지 않을 후회뿐일 거다.”
남태수는 성진의 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그는 당연하게도 불멸자가 된 인간들이 끝없는 고독 속에 고통스러워하거나, 죽지 못해 괴로워하는 내용의 창작물을 접해본 바 있었다.
만일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
솔직히 말해 백이면 백 후회할 것 같았다.
성진은 무르무르에게 이 점을 지적했다.
“이런대도 남태수가 사도가 되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무르무르의 답변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예외 없이 맞이하게 될 죽음. 그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필멸자들은 무수히 많은 종교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지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룡왕 폐하께서는 유일하게 이 문제에 대한 유의미한 답을 제시하신 분입니다. 성좌들이 약속하는 낙원 따위는 논할 가치도 없겠지요.
“이미 되살아난 자의 관점이로군.”
-저는 이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도 합치한다고 봅니다.
성진과 무르무르는 동시에 남태수를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할 말 없다. 알아야 할 것을 짚어주었으니 선택은 네 몫이다.”
남태수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자, 잠깐만요. 앞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제 인생이 어떻게 될지 결정하라니. 중대한 결정을 이렇게 갑자기 할 수는 없다고요!”
“그러나 우리에겐 너 하나 기다려줄 시간이 없다.”
사도를 건드린 이상 30층을 틀어막았다고 해도 벌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50층에서 결정하고 올라와라. 나는 5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