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42화 (42/170)

<42>

다나는 장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욕실에 들어섰다.

“넓네.”

탑의 장비는 인벤토리에 넣었다 꺼내면 기본적인 세척이 다 된 상태로 나왔다.

장비의 내구도를 회복시켜주진 않지만 플레이어들이 빨래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만든 편의요소.

다만 아이템은 그렇게 빨 수 있어도 몸은 직접 씻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건 어떡하지. 물에 들어가도 되나?”

다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엉덩이 위로 살랑거리고 있는 꼬리를 붙잡았다.

‘변신을 억지로 참아서 그런가 왜 꼬리만…….’

진짜 보름달이 아닌 스킬로 야수화 효과를 받은 것도 처음, 마력을 조절해 야수화를 저항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덕분에 이런 상황은 다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으음, 폭신폭신…….”

야수화를 하면 이성도 날아가기에 맨정신으로 자신의 꼬리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헛!”

무심코 꼬리를 만지작대던 다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꼬리에 느껴지는 마력의 상태로 보아 한두 시간 안에는 자연스럽게 들어갈 것 같았다.

“귀도 아니고 꼬리니까 씻는 건 상관없겠지.”

따뜻하게 데워진 물에 몸을 담그니 전투의 흥분이 가시며 심신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싸우다 말고 목욕하고 있자니 뭔가 어색한 기분이지만…….”

어색함과는 별개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내준 것은 그녀로서 고마운 일이었다.

“티타니아.”

-네. 여기 있어요.

“그래서, 카르마라는 게 도대체 뭔데?”

그녀는 이참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카르마는 그 이름대로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 영혼에 쌓이는 힘이랍니다.

“어떠한 행동이라는 건?”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동이요. 숨만 쉬어도 카르마가 쌓인답니다. 물론 그런 걸로 쌓은 업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보통 업이라 하면 위업이라 이룰만한 큼직한 것들을 이야기해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영혼에는 카르마라는 힘이 쌓인단 말이었다.

-이루기 힘든 일을 이루어냈을 때 카르마가 더 많이 쌓인답니다. 그리고 이 기준은 사람마다 달라요.

“왜?”

-코끼리가 개미 100마리를 밟아 죽이는 것과 개미 하나가 다른 개미 100마리를 쓰러뜨리는 건 난이도가 다르니까요.

위업이라는 건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요소를 따져서 판정한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쌓아올린 카르마는 영혼을 강화하며, 운명을 개변하는 힘을 부여한답니다.

살인귀의 업을 쌓은 자에겐 살기를, 성자의 업을 쌓은 자에겐 후광을.

이는 단순히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다.

-카르마는 단순히 마력 같은 자원으로 사용되는 것 외에도, 그 내용에 따라 보유자에게 영구불변의 보정효과를 발휘해요.

“게임에서 스탯을 올려주는 칭호처럼?”

-네 맞아요. 게임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칭호를 따면 그에 달린 스탯이나 버프를 얻는 것처럼 영혼 자체가 변화하죠.

10살에 곰을 때려잡은 아이에게는 강인한 힘을.

빵집 노예에게는 이동속도를.

씨앗 찾아 헤매는 모험가에게는 기분 좋은 향기를.

-이건 소소한 수준이에요. 정말로 위업이라 할 만한 업적을 세우면 그만큼 더 큰 카르마로 돌아온답니다.

업적의 격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도 가능했다.

-또한 그것이 극한에 이르면 모든 생명에게 부여된 윤회의 굴레마저 벗어던지고 신성존재로 거듭날 수 있어요.

그리하여 필멸자로 태어난 운명마저 넘어서면, 신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네 맞아요. 인간도 성좌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죠.

이것이 바로 성좌가 온갖 차원을 침략하는 이유였다.

-신성존재로 거듭나고 나면 추가적인 위업을 쌓기가 어려워지지요. 때문에 성좌들은 쉬운 방법을 찾아 나선 거예요.

‘쉬운 방법?’

-투기장에서 무패의 전설을 쓴 검투사와 같은 카르마를 얻고 싶다면, 똑같이 오랜 세월 연승을 달성하는 것보다 바로 그 무패의 검투사를 쓰러뜨리는 편이 빠르니까요.

무패의 검투사보다는 무패의 검투사를 쓰러뜨린 자가 훨씬 얻기 쉽다.

스스로 명성을 쌓는 대신 남의 명성에 기대는 이들처럼 타인의 업에 기대어 자신의 업을 불리는 것.

그러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의 영혼을 빨아먹는 것이었다.

-더 많은 카르마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닦는 대신, 다른 영혼을 잡아먹길 택하고 짐승으로 영락한 자들.

힘을 추구하며 서로를 잡아먹다 지성과 위엄을 잃고 힘만 강한 짐승이 되어 버린 신들.

자신들의 이름마저 잊어버려 불과 광채, 침묵과 광기 등 서로가 추구하는 영역을 대신 댈 뿐인 괴물들.

-그것이 바로 성좌의 정체입니다.

* * *

성진이 가진 카르마는 크게 세 종류였다.

여덟 종족에게서 이어받은 카르마.

지금까지 싸워오며 본인이 스스로 쌓아올린 전사로서의 카르마.

그리고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사람들을 이끌며 쌓은 카르마.

성진이 이룬 위업은 셀 수 없이 많아 이미 각각의 영역이 전부 신격에 이르러있었다.

“인간적인 요소라곤 쥐뿔도 안 남았군.”

필요한 힘이지만 마음에 드는 힘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건 세상을 바꿀 힘이 아니라, 이런 힘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었으니까.

“카르마를 모두 버리고 나니 나름대로 개운한 맛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다시 돌아왔군.”

일부나마 돌아온 그의 카르마는 또다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료인 다나와 남태수의 잠재력과 성장한계를 해방하고, 요정이 아닌 인간임에도 정령술을 다룰 수 있게 했다.

이 힘을 물려받은 이상, 그는 의무를 다해야 했다.

“그럼 술은 이쯤 하도록 하고.”

베르나데트의 기척을 감지한 성진은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다시 일하러 가보실까.”

* * *

“뭐야? 클랜전 신청? 이 새끼들이 미쳤나?”

베르나데트의 클랜전 신청을 받은 정의구현 클랜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베르나데트의 클럽은 자신들에게 설설 기며 포인트나 갖다 바쳐야 할 지갑에 불과했다.

지갑이 감히 자신들에게 이빨을 드러낸 셈이니 괘씸함에 분노부터 올라온 것.

같은 플레이어라도 동등한 존재로 보질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이놈들이 대가리 좀 굵어지더니 바로 기어오른다 야. 내가 이걸 어떡해야 되겠냐?”

“미친 새끼들 아닙니까 이거? 이참에 본보기를 세우시죠. 저쪽에서 먼저 걸어온 클랜전이니 운영하는 사업체를 통째로 내놓으라 해도 뭐라 할 수 없을 겁니다.”

클랜장의 말에 부관이 곧장 알랑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군인 출신인 클랜장의 개인 인맥으로 돌아가는 중소 클랜.

클랜장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양아치 수준에 불과했으며, 클랜장 또한 직원을 뽑을 때 유능함보다는 다른 쪽에 중점을 두었다.

어차피 사업은 자기 인맥으로 굴릴 거 아닌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일 잘하는 인재가 아니라 자기 뒤 잘 닦아주는 똘마니였다.

격동의 시대에 싸움 좀 잘하는 걸로 군인이 되어 인생을 날로 먹은 케이스인 것.

그래도 아예 멍청이는 아니었다.

“거 그래도 이놈들이 진짜로 정신 나가서 싸움을 거는 건 아닐 테고. 뭐가 있긴 하겠지. 절차대로 동맹 클랜에 협조요청 넣고, 용병 받아와라.”

“예, 보스.”

무슨 생각으로 이들이 클랜전을 신청했는지 모르겠으나, 일개 클랜이 센트럴 시티를 좌지우지하는 동맹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며칠 뒤.

클럽 알파카와 정의구현 클랜 간의 클랜전이 성사되었다.

* * *

클랜전 당일.

베르나데트는 알파카의 전투원 14명과 함께 클랜전 지정장소로 나왔다.

총 15명의 인원으로 나타난 그들을 맞이한 것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대인원.

정의구현 클랜원과 동맹에서 보내온 용병 전투원 총합 220명.

이전까지의 클랜전으로 대충 폐허가 된 그곳에서, 220명의 플레이어들이 철새처럼 건물 위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누님, 이건…….”

“쫄지마. 우리 뒤에 누가 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베르나데트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쫄아 있었다.

‘보스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

클랜전 신청 이후, 성진은 가끔 클럽을 확인하러 올 뿐 매번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래도 오늘은 일찌감치 와 줄 거라 생각했더니. 시간이 다 되도록 안 오잖아?’

성진만 믿고 클랜전을 질렀던 그녀로서는 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줄을 잘못 탔다든가?’

사도의 변덕에 모가지가 날아간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놈들은 물리적인 모가지든, 사회적인 모가지든 가리지 않는다.

애초에 물러날 곳 없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지른 줄타기였다.

심사숙고해서 판단해도 모자랄 판에 협박에 굴하여 내린 결정이라면, 틀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역시 잘못된 줄을 탄 건가? 지금이라도 저놈들한테 머리를 박고 사과해야 하나? 그보다 사과를 하면 받아주긴 하나?’

베르나데트는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정의구현 클랜의 클랜장을 바라보았다.

“히야, 우리 알파카도 많이 컸다? 물장사 하면서 클랜전도 다 하고.”

클랜전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약속이었다.

이권은 이권싸움으로 끝낸다.

보복은 없다.

이를 어기면 모든 플레이어들이 응징한다.

‘그런데 용병으로만 200명을 동원할 수 있는 놈들을 누가 응징하지?’

올라갈 놈은 올라가고 남을 놈만 남은 센트럴 시티의 특성상, 전투 플레이어의 비율은 낮았다.

전투원 200명이면 사실상 센트럴 시티 세력의 과반에 해당하는 인원.

저들이 규칙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나?

“그나저나 진짜로 왔네? 솔직히 위층으로 튈 거라고 생각해서 명예의 전당에 애들을 대기시켜뒀는데.”

정의구현의 클랜장, 민홍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베르나데트는 확신했다.

저 새끼들이 얌전히 클랜전 보상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다는 것을.

‘주성진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십새끼.’

베르나데트는 속으로 자신들을 버린 주성진을 씹어대며 민홍기를 상대하러 나섰다.

‘튀어야 해. 일단 명예의 전당까지만 도망치면 레벨 업으로 50층으로 달아날 수 있어.’

그러려면 220명의 추적을 뿌리쳐야 한다.

당연히 그딴 건 불가능.

‘하지만 민홍기를 인질로 잡으면 가능할지도 몰라.’

악수라도 청하는 척하면서 목줄을 잡아채자.

동맹원이 인질로 잡히면 아무리 저놈들이라도 무작정 공격하진 못할 거다.

그러나 걸어오던 민홍기는 베르나데트의 얼굴을 보더니 문득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이에 딱히 나눌 말도 없었지. 바로 클랜전이나 시작하자고.”

‘썅!’

그야말로 완벽하게 수틀려 버린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느 때와 똑같은 개 같지만 평화로운 상황이었는데…….’

민홍기의 말에 참관인들 사이에서 한 명이 대표자 자격으로 나섰다.

“규칙은 늘 하던 대로겠지요? 양측 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우리야 보다시피.”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성좌님…….’

민홍기의 대답에 베르나데트의 시선이 지금부터 핥을 신발을 향해 내려가려는 찰나.

-준비는 이미 다 해뒀으니 잠자코 시작해라.

‘…… 다 꺼져! 우리 보스 최고!’

어디선가 들려온 성진의 텔레파시에 베르나데트의 멘탈이 개같이 부활했다.

은신상태로 숨어 있던 성진은 그런 베르나데트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어이가 없어졌으나, 애초에 그런 성격 때문에 그녀를 끌어들인 것이기에 굳이 그 점을 뭐라 하진 않았다.

‘그래도 표정에 다 드러나는 건 좀 참아줬으면 좋겠군.’

타앙!

그러는 사이 클랜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고.

철컥!

“뭐?”

동맹에서 보내온 200명의 용병이 일제히 민홍기와 정의구현 클랜을 향해 총을 겨눴다.

“민홍기, 불과 광채의 이름으로 널 체포한다.”

“뭐?”

성진의 사칭이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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