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21세기 초, 사람들이 울부짖던 남녀평등은 탑의 등장과 함께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탑에서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힘은 선천적인 그 어떤 능력보다도 뛰어났다.
종족조차 바꿀 수 있는 시대에 성별은 무의미했다.
그러나 남녀가 평등해졌다고 해서 세상이 평등해진 건 아니었다.
레벨의 존재는 그 어떤 신분제보다도 강력한 차별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가치는 이제 숫자로 표현되었으며, 그 숫자는 단순히 사회적인 영향력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을 부여했다.
살아 있는 신들이 부여한 이 질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성진을 제외하면 말이다.
“여기군.”
빌딩숲 한가운데 미술관마냥 혼자만 그리스 신전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명예의 전당.
50레벨.
2차 전직이 이뤄지는 그때까지 31레벨 이상의 모든 플레이어는 센트럴 시티에 머물면서 명예의 전당을 클리어해야 했다.
즉, 이 구간의 플레이어들은 모두들 이곳 명예의 전당으로 출퇴근한다는 소리였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오가는 그곳에서 성진은 은신상태를 유지한 채 당당히 안으로 들어섰다.
“은신 효과는 확실하군.”
-정령술로 기척을 숨기고 있으니 플레이어는 물론 천사라도 선생님을 감지할 순 없을 거예요.
플레이어들은 시스템 효과로 누구나 머리 위에 ID가 뜨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템이나 스킬 등으로 은신 효과를 받을 때는 ID도 가려졌는데, 이를 이용하면 수배자라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제 가호는 대천사라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마법이지만, 아무리 은신마법이 걸려 있어도 대놓고 부딪히면 들킬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평상시라면 가만히 서 있어도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가겠지만, 은신상태일 때는 자기가 피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존재를 모르는 행인들이 걷다가 들이받기 일쑤였다.
성진은 그러한 플레이어들을 피해 명예의 전당 안쪽으로 들어섰다.
명예의 전당.
31층에 입성한 31레벨 플레이어는 50레벨이 되어 2차 전직을 하러 갈 때까지 계속 이 스테이지에 머무르게 된다.
이곳은 전당 내에 존재하는 챔피언 NPC를 이길 때마다 레벨 업을 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보스러쉬와도 같은 구간이었다.
88명의 챔피언 중, 상성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상대만 19명을 이기면 되는 스테이지.
문제는 챔피언과의 전투는 모두 1인용 인스턴트 스테이지에서 치러진다는 것이었다.
즉, 여기서는 스테이지 돌파에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남태수 그놈이 스테이지를 깰 순 있을지 의문이군.”
-그런 거라면 그냥 버리고 가셔도 될 텐데요.
“그 녀석은 아직 할 일이 있다.”
무르무르가 있으니 어지간해서 남태수가 스테이지 공략을 어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관리자가 멀쩡히 남아있는 스테이지에선 대놓고 무르무르의 힘을 쓸 수 없다는 점.
무르무르의 도움 없이 남태수 혼자서 얼마나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설마 그 인간 때문에 관리자를 잡으려고 하시는 건 아니죠?
“힘을 회복하기 위해선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31층부터 50층을 담당하는 천사 나타니엘은 일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평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른 천사들과 달리, 나타니엘은 50층에 상주하며 명예의 전당을 돌파한 플레이어들에게 직접 2차 직업을 골라주었다.
5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만나서 대화하게 되니 유명할 수밖에 없는 것.
“알려진 내용대로라면 충분히 놈을 끌어내릴 수 있다.”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명예의 전당 챔피언의 목록이 적힌 거대 비석 앞에 섰다.
이곳의 챔피언들은 챔피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같이 강력한 네임드 NPC였기에 유리한 상성을 찾아 공략순서를 잘 지키는 게 중요했다.
상성에 맞는 ‘교복’을 준비해서 챔피언을 잡고, 중고로 팔아 그 돈으로 다음 챔피언을 잡기 위한 교복을 구하는 식.
덕분에 명예의 전당 주변에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좌판을 열고 중고 교복을 파는 이들이나, 챔피언 목록을 확인하며 자신만의 공략계획을 준비하는 이들.
성진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비석의 명단을 확인했다.
[챔피언 목록]
홍염의 마도사 이지필드
어스름 수녀회 타격대장 밀리아
강철 부족 족장 타가락
깊은 곳의 예언자 샤 시스라
시궁쥐 군단장 이치 미치
숲의 마녀 바바 야가
흡혈기사 아인
달콤한 연금술사 타르트
…….
처음 보는 이름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도 있었다.
종족도, 살아간 시간대도 다른 영웅들.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성좌와 싸우다 전사한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지금은 이들을 해방시켜줄 수 없었다.
아직 이 구간의 관리자가 멀쩡히 살아 있기 때문.
이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50층에 머무르고 있는 천사를 잡아 족칠 필요가 있었다.
‘자, 그럼.’
성진의 시선은 비석에 이어 주변의 플레이어들로 향했다.
‘이 층의 모든 플레이어들은 결국 스테이지 도전을 위해 이곳을 들린다. 그 말은 여기서 기다리면 스테이지 현황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는 뜻.’
성진은 거미줄을 치듯 명예의 전당에 그물을 펼쳤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반응은 금방 왔다.
‘저놈.’
성진의 눈이 퀭한 모습의 서양인 플레이어 하나를 잡아냈다.
초췌한 몰골에 시선이 산만하며 손끝이 떨리는 모습은 성진이 아니라도 상태가 안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마약이군.’
마약은 사람을 옭아매는데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는 플레이어라도 마찬가지.
은혜를 베풀어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약으로 인생을 망쳐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탑에 마약을 풀어 플레이어들을 중독 시키면 손쉽게 그들을 휘두를 수 있게 되는 것.
‘마약 카르텔의 플레이어들이 들어와 있다면 당연히 마약에 중독된 플레이어들도 있겠지.’
일반 플레이어들이 마약을 하든 말든 그건 자기 맘이다.
그러나 클랜이나 기업 등이 큰돈을 들여 육성한 플레이어들이 약에 절어 병신이 되어버린다면?
마약 카르텔은 그 특성상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놈들이 대놓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뒷배가 있다는 뜻.
즉, 사도의 끄나풀이라는 뜻이었다.
“찾았다.”
성진은 뱅자맹의 뒤를 쫓았다.
마약중독자가 명예의 전당에 포인트를 벌러 왔으면, 당연히 그다음은 벌어 모은 포인트를 쓰러 갈 터.
성진은 금세 스테이지 구석에 위치한 지하 클럽을 찾을 수 있었다.
<클럽 알파카>
“장기간 머무르는 플레이어들이 많으니 장사의 규모 자체가 다르군.”
현실 못지않게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클럽은, 플레이어들에게 술을 파는 주점이었다.
“지상층은 양조장인가. 하기야 밖에서 술을 들여오는 것보단 직접 만드는 편이 싸겠지.”
탑의 상점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물건을 판다.
거기서 완성품을 사는 것보단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드는 것이 싼 게 당연지사.
목숨이 걸린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술과 담배가 생각나기 마련이었으니, 탑에서 술장사가 망할 일은 없었다.
성진은 뱅자맹을 내버려 두고 은신상태를 유지하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는 조명이 최소한도로 켜져 있어 상당히 어두웠다.
‘설비는 다 되어 있어도 전기를 끌어오는 건 또 다른 문제인가.’
손님이 오가는 곳 외에는 거의 불이 꺼져 있다시피 할 정도.
덕분에 성진은 어둠에 묻힌 복도에서 자연스럽게 종업원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읍! 읍!”
“쉿.”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튀어나온 성진에게 붙잡힌 종업원은 식겁하여 가슴을 부여잡았다.
‘플레이어 치고는 담력이 떨어지는군.’
실제 능력과 별개로 전투에 대한 감이 떨어져 있는 모습.
이 스테이지에 눌러앉아 전투와 멀어진 지 꽤 된 모양이었다.
“사장한테 안내해라.”
거부권은 없었다.
입이 막힌 종업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한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협박을 당한 주제에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
‘이런 경우에 이미 대비가 되어 있나.’
이 스테이지는 31레벨부터 49레벨까지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같이 쓰는 스테이지였다.
당연하게도 자기가 49레벨이 아닌 이상 다른 플레이어와 싸우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겁먹은 척하고 몰래 시스템 창을 조작하고 있군.’
성진은 시선의 움직임을 통해 종업원이 탑의 커뮤니티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간파했다.
이대로 놈의 안내를 따라가면 곧 놈의 클랜원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되리라.
바라는 바였다.
‘직접 찾아다닐 수고를 덜었다.’
종업원을 따라 들어간 방에서 성진은 중무장한 20명의 플레이어를 마주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침입자. 그놈 뒤에 숨어 있다고 공격하지 않을 거란 기대는 버리고 말이야.”
플레이어들을 대표해 나선 여성은 이 스테이지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레벨인 49레벨이었다.
그녀의 뒤로 늘어선 부하들도 전원 49레벨.
작정하고 이 층에서 장사를 하는 놈들이란 뜻이었다.
성진은 그녀의 말대로 잠자코 은신을 풀었다.
“31레벨? 이런 애송이가…… 잠깐. 너 추살대를 쓰러뜨렸다는 그놈이군?”
베르나데트는 순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요염하게 웃었다.
그녀는 성진의 이름을 보고도 겁먹지 않았다.
‘세계정부의 인간사냥꾼들을 이겼다고 해도 그건 동일한 레벨일 경우의 이야기. 레벨 차이가 이렇게 나는 상황이라면 위험할 거 없어.’
실력에 자신이라도 있는 건지 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성진이 레벨도 올리지 않고 그들을 찾아온 것은 실수였다.
‘아무리 재능이 넘쳐도 레벨을 올리기 전에는 무서울 거 없지.’
성진을 잡아두면 세계정부에 현상금을 받고 넘기든, 세뇌교육 후 신분세탁을 거쳐 칼잡이로 부리든 뭐든 할 수 있었다.
레벨만 높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시대.
재능 있는 플레이어의 가치는 컸다.
‘레벨이 낮을 때 목줄을 걸어두면 랭커라도 개처럼 부릴 수 있는 법.’
추살대를 전멸시켰다는 소문이 반만 사실이어도 성진은 어지간한 랭커들 뺨을 후려치는 괴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31레벨에 굴복시켜둘 수 있다?
‘이건 기회다.’
“네가 사장인가?”
“그래. 나를 보러 온 거야? 잘됐네. 나도 당신에 대해서 궁금해졌거든. 우리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까?”
성진은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을 슥 훑어보고는 무심하게 내뱉었다.
“사도의 끄나풀은 아닌가. 그래도 무력시위를 하러 모여 있는 꼴을 보니 잘 됐군.”
“뭐?”
“청소하기 편하겠어.”
직후, 베르나데트의 머리가 땅바닥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