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다나는 남태수와 떨어져 평범하게 31층에 처음 올라온 플레이어처럼 도시를 돌아보았다.
“무슨 탑 밖으로 나온 것 같네. 탑 안에서 빌딩 숲이라니…….”
31층의 건물들은 대부분 플레이어들이 구매해서 배치해둔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일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기에 플레이어들은 지구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건물들을 통째로 베껴놓았다.
“스테이지 범위 내에 건물을 최대한 우겨넣다보니 고층빌딩이 되었다고 했던가. 땅값이 비싼 건 여기도 똑같네.”
이렇듯 탑 내에선 포인트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거래도 가능하므로 포인트가 화폐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문제는 그들이 가진 포인트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우리 셋이 포인트를 잘 버는 편이라고 해도 31층까지 오며 벌 수 있었던 포인트는 너무 적어.’
자본이란 늘 그렇듯 직접 번 것보다 시간을 들여 쌓아놓은 것이 훨씬 큰 법이었다.
1,201회차까지 오며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기업화하면서 대물림한 포인트와 비교하면 그들 셋이 번 액수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이는 다른 일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라 보통 센트럴 시티에 처음 진입한 플레이어들은 대형 클랜에 돈을 빌려 그들에게 금전적으로 목줄 잡힌 신세가 되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아예 대형 클랜 소속이라 자기 클랜이나 스폰서들에게 지원을 받든가.’
본인이 아무리 잘났어도 뒷배가 없다면 개인이 조직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가장 강력한 개인인 사도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가장 큰 조직을 꾸리고 있는 이상에야.
지난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체제인 자본주의는 돈보다 강력한 레벨 앞에 무릎 꿇었다.
가장 높은 레벨을 지닌 자들이 세계를 지배했고, 높은 레벨을 가진 자들이 우대되었다.
레벨만 높으면 다른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
정치도, 경제도, 종교도 모두 사도들의 손에 의해 레벨로 통합되었다.
‘언니.’
다나의 언니인 신시아는 단순히 가문의 부흥을 위해 범죄에 손댄 것이 아니라, 아예 성좌에게 지구를 팔아넘기려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다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범죄만 해도 어떻게든 그만두게 만들려 했던 다나였다.
그런데 아예 전 인류의 영혼을 악신의 먹이로 바치겠다니?
‘내가 막아야 해.’
이 문제는 이제 스펜서 가문 내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좌를 막지 못한다면 세상이 끝장난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이상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좌와 싸우고 있던 건 성진 단 한 사람뿐.
그는 테러리스트로 몰리면서까지 그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고 홀로 옳은 일을 하고 있었다.
한번 실패했다고 도망치려던 자신과는 달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나는 거기서 자신이 포기했던 가능성을 발견했다.
“내가 그놈들보다 더 위대한가 보지.”
인간은 신들의 하위존재가 아니다.
‘아저씨 엄청 멋있었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나가 사춘기 소녀마냥 양 볼을 붙잡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자 참다못한 티타니아가 태클을 걸었다.
-뭘 그리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건가요 당신은?
성진이 정령으로 소환한 티타니아는 주먹만 한 사이즈의 영체로 다나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요정족의 정령술은 티타니아의 힘을 빌려오는 신성마법.
정령을 소환하면 티타니아의 힘이 깃들어 소환자를 돕는 방식의 마법이었다.
개중에서도 성진은 티타니아와 직접 계약하여 힘만이 아니라 본인의 의식까지도 불러올 수 있었는데, 성진은 이를 이용해 따로 움직이는 동안 그녀에게 다나의 보호와 감시를 맡겼다.
“앗, 미안…….”
-좀 더 집중하세요! 선생님과 함께하는 이상 당신의 손에 무수한 사람들의 생사가 걸려있다고요!
티타니아는 SD캐릭터 같은 모습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잔소리를 해댔다.
다나는 문득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으나, 표정에 그것이 드러나기 전에 황급히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웠다.
-뭔가요. 갑자기 고개를 흔들어대고.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거 아니에요?
“아냐, 아냐.”
생긴 건 귀여워도 이 자그마한 정령에게 담긴 힘은 상당했다.
“지금 이게 최하급인 미니언급 정령으로 소환된 상태라고 했었지?”
-네, 마스터급으로 소환되면 제 전력을 100% 발휘할 수도 있지요. 물론 지금은 탑에 묶여 전력 자체가 약해진 상태지만, 그래도 당신 하나 지키는 건 문제없죠.
티타니아는 ‘전 당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중요 인물이라구요!’ 같은 풍으로 대답하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왜 은근슬쩍 말을 놓으시는 건가요. 심지어 그 사룡왕의 하수인에게조차 존대를 하시면서.
“태수 아재는 30대잖아.”
-저도 당신보단 연상이거든요?
다나는 지구에 탑이 나타난 뒤에 태어난 세대였고, 티타니아 또한 요정왕의 업을 이었을 뿐 태어난 시기는 오래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사실 나이대만 따지면 아저씨 둘보단 이쪽이 더 가까운 것.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티타니아는 다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부하로 여기기에는 너무 멀고, 막 대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은가?
다나가 미친 척하고 제 언니에게 성진을 팔아넘기면 모두 끝장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에게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반면 다나는 비교적 속 편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치만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이쪽이 더 좋은걸.”
언니에게 부담을 느끼는 다나로서는 티타니아를 동생으로 여기는 쪽이 더 편했다.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데.”
-사라므 보룰 만대로 자바당기지 마셰여……!
다나가 볼을 조물락 거리자 티타니아는 영체답게 쭉쭉 늘어났다.
어차피 정령의 외관은 티타니아의 자기인식일 뿐, 물리적 실체는 없었기에 망정이지.
30층에서 저랬다면 바로 벼락이 내리쳤으리라.
-그만 하세요! 보는 눈이 있어요.
“어?”
-다른 사람은 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해뒀으니 혼잣말을 한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러니 계속 모르는 척하고 저쪽의 마력을 감지해보세요.
그 말에 다나는 집중해서 평상시보다 감지 범위를 넓혀보았다.
그러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당신이 대출을 알아보러 다닌 게 저쪽 귀에 들어간 모양이네요.
기척의 정체는 웨어울프였다.
* * *
시에라는 마약카르텔의 후원을 받는 플레이어였다.
세계정부가 들어선 이후 마피아나 야쿠자, 마약카르텔 등의 범죄조직들은 자신들도 플레이어 전력을 갖출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탑에 입장하는 인원은 세계정부에 의해서 선별되고 있었다.
단순한 뇌물만으로는 뚫기 힘든 벽.
늘 그렇듯, 범죄조직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자선사업이었다.
불법 조직이 자선사업이라니 웃기는 소리 같았지만, 이는 충분히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카르텔은 분쟁지역이나 오지의 마을을 골라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카르텔의 후원을 받고 자란 마을 아이들은 깨끗한 신분으로 탑의 플레이어가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직에 합류한다.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은혜를 입혀서 조직에 충성하게 만드는 것.
만약 아이들이 플레이어가 되지 못해도 조직을 위해 일할 구석은 얼마든지 있었다.
가족과 친구를 비롯해 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이 모두 조직에 친화적이니 본인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이러한 순환고리 상에서 탑에 들어와 플레이어로서 레벨을 올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시에라가 속한 카르텔은 방대한 유통망을 가지고 있어 장기밀매도 가능했으며,
그에 따라 스펜서 가문의 산하에서 비밀리에 웨어울프를 위한 생간 수급을 담당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카르텔은 사실상 스펜서 가문의 하부 조직인 셈.
당연하게도 그러한 카르텔의 간부인 시에라 또한 웨어울프였다.
“본가의 아가씨께서 소문의 테러리스트들에게 붙잡혀 계신다고?”
센트럴 시티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지나가는 탑의 요충지.
대형 클랜이라면 49레벨에서 진행을 멈추고 이 스테이지에 상주하는 인원을 만들어두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공략하는 인원이 있다면 지원하는 인원도 있어야 하는 것.
올라갈 이들을 지원하고 탑 밖으로 내보낼 아이템을 확보하는 인원.
말하자면 생산직들의 도시였으니까.
“젠장, 아가씨의 신상정보는 기밀 아니었나? 그걸 놈들이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거야? 잘못된 정보 아냐?”
“그럴 리 없습니다. 이번에 본가에서 내려온 명령서에는 가주의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까요.”
“사도께서 직접?”
“동생분이 연루된 일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지요.”
시에라는 부하의 보고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침묵과 광기의 사도께선 읽고 쓰기도 못하던 우리들에게 먹을 것과 일거리를 준 은인이시다. 그분의 혈육이 위험에 빠졌다면 절대로 가만둘 수 없어.”
시에라는 명령서에 동봉된 주성진과 남태수의 사진을 확인했다.
남태수의 경우에는 청약 정보를 바탕으로 조사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반면 주성진의 경우에는 처음 등장했던 30주년 기념식에서의 사진과. 커뮤니티 내의 증언을 종합한 것이 전부.
정보의 신뢰도를 생각하면 사실상 사진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이놈들이 바로…….”
신시아는 탑 내에 있는 모든 웨어울프들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의도적으로 성진이 사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뺐다.
부하라고 해도 성좌의 진실을 알리는 건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아무리 사도끼리 경쟁 관계라지만 아예 성좌들의 침략 자체를 방해할 수 있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사도의 진실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성진과 남태수가 멀쩡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은혜를 갚을 시간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놈들을 잡고 아가씨를 구해낸다!”
“아오오오!!!”
그 말에 모여 있던 카르텔의 웨어울프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늑대의 하울링과도 같은 행동.
피를 나눈 웨어울프 클랜의 단결력은 가족 이상.
유대감이 높아지면 신경망으로 생각이나 감정까지 공유할 수 있었으니 사실상 하나의 몸이나 다름없었다.
스펜서 가문이 그만큼 웨어울프의 숫자를 늘리면서도 모두를 관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종족특성 때문.
“명예의 전당에 들어오는 모든 31레벨 플레이어를 뒤져서라도 아가씨를 찾아내!”
시에라의 명령에 스테이지에 상주하는 모든 웨어울프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틀 뒤.
검기를 발현하는 데 성공한 다나는 성진, 남태수와 함께 31층으로 올라왔다.
진작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웨어울프들은 순식간에 그 사실을 포착했다.
“그런데 주성진이라는 쪽은 안 보입니다.”
“은신 상태로 근처에서 지켜보는 게 아닌가?”
“그거야 탑에서 확신은 엄금이라지만…… 아무런 ‘냄새’도 안 났답니다.”
웨어울프의 후각은 그 자체로 추적스킬이나 다름없었다.
31레벨에 불과한 플레이어가 그들의 코를 피할 수 있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설마 아가씨가 스스로 해결하신 건가?”
그렇다면 잘된 일이긴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확인해서 보고를 해야 하는 사항이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녀석을 몰래 접근시켜 확인해봐라. 다른 클랜 녀석들에게 아가씨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놈들이 근처에 있다면 어떡할까요?”
“묻어버려.”
본가의 명령서에는 딱히 일처리 방식을 지정해주지 않았다.
“카르텔의 방식대로 아가씨를 모셔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