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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34화 (34/170)

<34>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성진은 티타니아와 함께 봉인한 사도의 몸에서 마력을 뽑아내는 터널을 구성하는 데 집중했다.

천사라면 그냥 영혼을 뽑아 쥐어짜면 된다.

그러나 사도는 성좌와 연결되어있는 존재.

마구잡이로 쥐어짜면 기껏 눈을 부숴 무력화시켜둔 불과 광채의 성좌가 그 틈을 파고들 수도 있었다.

“이거라면 뉴욕에 있는 사도의 본체에게서 지속적으로 마력을 뽑아올 수 있을 거예요.”

“잘했다.”

성진의 말에 티타니아는 으쓱이면서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성진은 티타니아의 행동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터널을 시험해볼 뿐이었다.

“…… 옛날에는 매번 제대로 칭찬해주셨으면서.”

당시 성진이 온갖 육아서적을 독파하며 티타니아를 업어 키운 것은 일종의 투자였다.

백지 상태의 반신격 요정을 믿음직한 아군으로 키워냈으니, 리턴은 확실한 투자였다 할 수 있으리라.

성진으로서는 다 키웠으니 이젠 그럴 필요 없다 여길 뿐이지만, 성진을 가족처럼 여기는 티타니아로서는 갑자기 쌀쌀맞아진 그 태도에 울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티타니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진은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잘 됐군. 그럼 이제 이 터널을 네게 연결해라.”

“예? 선생님이 아니라요?”

“어차피 이거 하나 연결해봐야 나로서는 청동망치를 몇 초 더 쓸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 네가 힘을 회복하면 나도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정령술은 요정왕의 힘을 빌려오는 요정족의 신성마법이었다.

요정왕 사후에는 요정공주인 티타니아가 정령화하여 그 뒤를 이어받았다.

덕분에 이제는 티타니아의 힘을 빌려오는 마법이기도 했다.

티타니아를 30층에 두고 가야하는 성진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회복할 경우, 정령술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그녀의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마법적 소양이 떨어지니까. 힘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을 거다.”

“마법적 소양이 떨어진다고요? 누가요?? 선생님이요……???”

티타니아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이 바로 성진이었다.

그런 성진이 저런 소리라니?

티타니아는 어이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성진은 진심이었다.

“나는 사룡왕처럼 다양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마왕처럼 하나에 특화된 것도 아니니까.”

그 말에 티타니아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룡왕은 아예 사령술처럼 새로운 마법계통을 창조해낼 정도의 괴물이고, 진마왕은 아예 종족 자체가 마법생명체 아닌가?

100년도 안 산 인간이 수만 년간 마법에만 매진한 용왕과 비교되는 것부터 이상한 것이었다.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사룡왕은 성좌보다 마법실력이 뛰어난 신성존재가 아닌가.

그것보다 마법을 잘 쓰면 그게 마법의 신이지 인간인가?

‘마법을 잘 쓴다의 기준이 너무 높으시잖아요!’

“또 너는 이곳에서 차원문을 만들어야 하니까. 이 힘은 네가 쓰는 게 맞다.”

그 말에 티타니아도 성진의 의도를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을 손에 넣은 뒤, 바로 싸움이 벌어질 거라 보시는군요.”

“그래. 내가 탑의 꼭대기에 오르는 순간 성좌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지구에 개입할 수 있는 카르마를 얻을 거다. 즉시 전투가 벌어지겠지.”

탑을 오른다고 끝이 아니었다.

성진이 보고 있는 것은 그 다음.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지구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될 거다. 따라서 우리는 천상의 좌표를 손에 넣는 즉시 하늘을 열고 그대로 밀고 들어간다.”

성좌에게 고통 받은 것은 고작 여덟 종족이 다가 아니었다.

또한 종의 카르마가 무너지고 종족이 멸망한 이들 중에도 생존자가 남아 여전히 천상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모인 것이 바로 연합군.

그리고 성진은, 연합군의 대장이었다.

“이곳에 군대를 불러오기 위한 통로를 뚫는다.”

성진이 홀로 모든 성좌들을 막아선다고 해도, 성좌들이 부리는 천사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 천사와 싸워줄 군대의 존재는 천상과의 전쟁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반격의 날을 준비해라.”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군을 이끄는 사령관으로서의 시야.

성진은 철저히 성좌를 쓰러뜨리기 위한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 * *

부웅!

내지른 검이 대기를 찢었다.

아직 마력이 외부로 분출되어 형태를 이룰 정도는 아니었으나, 다나의 검에는 확실하게 마력이 담겨있었다.

무르무르의 보조를 받고서도 마력을 인지하는데 한참 걸렸던 남태수와 달리 다나는 혼자서도 빠르게 마력을 깨우쳤다.

“좋군요. 전투를 치르면서 그 상태를 유지하십시오.”

스켈레톤의 몸으로 소환된 마티아스는 평범한 철검을 들고 그런 다나를 상대했다.

일반 스켈레톤의 몸으로는 힘도 떨어지고 검기도 사용할 수 없었으나 마티아스는 다나를 어린아이 가지고 놀듯 농락했다.

그는 다나의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검의 옆면으로 그녀를 두들기며 교정하고, 주의를 주었다.

자신보다 약한 스켈레톤의 몸으로 대련하고 있음에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

다나는 고수에게 온갖 수단으로 당해보며 빠르게 경험을 쌓고 있었다.

팅!

억지로 힘을 주어 검을 튕겨낸 다나는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마티아스와의 거리가 멀어지자 도중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이 옅어졌다.

그것으로 다나는 확신했다.

“……접촉할 때마다 제 몸에 흐르는 마력을 조종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통제력에 이만한 차이가 있으면 상대의 몸속에 있는 마력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요.”

상대의 내부를 파괴하는 내가중수법이나 점혈과도 같은 방식.

그걸 사칙연산과 로켓공학의 차이만큼 발전시키면 적의 움직임조차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검을 자신의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신검합일. 신검합일을 이루면 검에도 마력을 흘려 넣어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지요.”

“검기…….”

검기는 성진이 내건 조건이자, 다나가 당장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경지였다.

“결국 검기도, 이처럼 상대의 마력을 조종하는 것도 모두 대상을 자신의 몸처럼 느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몸 안의 마력은 움직일 수 있다.

검을 내 몸처럼 생각한다.

그렇다면 검의 마력도 다룰 수 있다.

말장난 같은 방식이었지만 이는 실제로 도움이 됐다.

“연금술에선 전체는 하나, 하나는 전체라고도 표현하지요. 마력을 이용하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이는 무공에도 통용됩니다.”

검을 내 몸처럼 여긴다.

그게 안 된다면 내 몸을 검처럼 여기기라도 해라.

선문답에 가까운 소리.

그러나 다나의 빛나는 재능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광폭화.”

광전사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는 스킬이 발동되며 다나의 전신에 힘이 끓어올랐다.

“스킬로 마력을 움직여 부족한 숙련도를 메울 생각입니까? 힘이 다는 아닙니다. 무작정 힘을 끌어올린다고 몸 안의 마력이 검으로 넘쳐흐르진 않습니다.”

“힘이 다는 아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나는 힘을 얻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말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

다나는 광폭화의 효과에 몸을 맡기지 않고, 날뛰는 마력을 제어하며 이성을 유지했다.

아직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뤄 스킬 없이도 기술을 사용할 순 없었다.

그러나 스킬로 발동한 기술을 직접 제어하는 것은 가능했다.

‘광폭화는 지속시간이 짧으니 오래는 못 가.’

다나는 제한시간 내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타앗!

광폭화한 그녀의 육체는 땅을 박차고 뛰는 것이 아니라 파내며 뛰었다.

초인의 각력을 온전히 전진하는데 쏟아 붓는 움직임.

마티아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검을 뻗었다.

둘의 검이 맞닿은 순간,

충돌음은 없었다.

마티아스는 힘과 힘으로 맞붙는 대신 다나의 검에 자신의 검을 얽었다.

옆으로 밀어내는 움직임.

다나는 자신의 검이 관절을 타고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흘러나감을 느꼈다.

그녀는 거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진각을 밟으며 반대편 손으로 마티아스의 명치에 정권을 내질렀다.

스켈레톤도 명치가 급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일반적인 스켈레톤이라면 척추가 통째로 터져버릴 위력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다나가 검의 통제를 포기하자 자신도 검을 놓아버리고 양손으로 다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다나의 정권을 피했다.

“……!?”

“플레이어에게 스킬이 무기이듯, 언데드에게는 육체의 특성이 무기임을 기억하십시오.”

이어서 마티아스는 뼈의 날카로운 부분을 단검처럼 다나의 목에 가져다댔다.

“끝났군요.”

“아니.”

“……?”

“끝이라는 건 그 뼈다귀로 내 목을 날려버릴 수 있었을 때의 이야기겠지? 해봐!”

광기 서린 외침과 함께 다나의 눈이 짐승의 안광을 발했다.

웨어울프 피의 발현.

위기인식으로 피어난 혈족의 힘과, 광폭화 스킬의 시너지로 폭주가 시작되었다.

“이런!”

마티아스는 황급히 붙잡은 팔을 풀고 물러났다.

폭주한 그녀의 힘은 최하급 언데드인 스켈레톤 따윈 으깨버릴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스켈레톤의 몸으로는 마티아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련의 중단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보이는군.”

잠자코 보고 있던 성진의 말에 마티아스는 그 자리에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폭주하여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다나는 어느새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이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다나는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전신에 힘을 꽉 주며 버티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나 자신의 힘도 다스리지 못해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튀어 나가려는 본능과 참아내려는 이성이 맞부딪히며 근육이 뒤틀리고 고통이 아우성쳤다.

그 상황에서도 다나는 두 다리를 땅바닥에 못 박아두고 폭주하는 마력의 고삐를 붙잡았다.

까득!

이빨이 깨지고 혈관이 터져나갔다.

피부 아래서 혈관이 터지자 전신 곳곳에 피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다나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마력의 통제에 몰두했다.

‘폭주하는 힘을 육체가 버티지 못한다면 더 단단한 곳으로 옮겨 담아!’

고삐를 틀어 날뛰는 마력의 흐름을 오른손의 검으로 이끈다.

그러나 마력은 검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손아귀에 멈춰 역류하기 시작했다.

푸슉!

역류의 반동을 버티지 못하고 피부가 찢어지며 피가 뿜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나는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이라도 좋다.

여기서 멈추면 자신은 그냥 도망자일 뿐이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검은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몸일지니.

신검합일.

손아귀에 머물러있던 대량의 마력이 검으로 쏟아지며 검신 위로 빛이 솟아올랐다.

맞닿는 모든 것을 베어내는 빛의 칼날.

“이틀 안에 성공했군. 덤으로 피의 속박도 이겨냈나.”

검기의 발현이었다.

“……위험한 방법이로군요. 검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아니라 책임감과 강박으로 검기를 발현시키다니.”

“하지만 효과적이지.”

성진은 마티아스의 지적을 일축했다.

“정신적 수양과 깨달음은 살아있어야만 유효한 것이다. 성좌가 활보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장의 힘이 더 중요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마티아스도 잠자코 대련을 마무리 지었다.

“몸을 쓰는 법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군요. 마력 운용을 동작에 접목시키기만 하면 되니 한동안은 실력이 빠르게 늘 겁니다.”

마티아스는 다나를 칭찬했으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그녀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한편 무공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라 와와 거리며 상황을 보고 있을 뿐이던 남태수는 그제야 시험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끝났어?”

“네, 마스터. 속전속결로 하다 보니 검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 짜내고 있는 지경입니다만. 어쨌거나 저 아가씨는 검기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천재라고 해도 고작 이틀간의, 그것도 말로만 행해진 강의였다.

그 단기간 만에 검기를 뽑아낸 것은 대단하나, 앞으로를 생각하면 다나는 이제 발걸음을 뗀 것이었다.

“천재라고 단순한 반복 숙달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이 이상은 부담이 되실 테니 이만.”

마티아스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스스로 역소환되었다.

남태수는 그런 그의 영혼을 리치의 영혼석에 받아들였다.

티타니아는 그간 성진과 남태수가 해방한 영혼 중, 민간인의 영혼들을 회수해갔다.

덕분에 지금 영혼석에 남아있는 것은 무르무르와 마티아스를 비롯해 숙련된 전사로만 구성된 300명의 영혼.

페르시아 군대가 몰려와도 끄떡없을 정예들이었다.

-물론 마스터께서 빨리 사령술을 익히지 못하면 그들은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어야겠지요.

“남의 생각을 멋대로 읽지 말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태수는 함께하는 영혼들의 인적사항이나 특기 등을 수첩에 적어 기억하고 있었다.

외울 자신은 없으니 기록이라도 열심히 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닦고 있는 것.

게임 공략법 연구에 가까운 ‘호감작’이었으나 스스로 싸울 재능이 없는 남태수에게는 이쪽이야말로 정답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계속된 마법 연습으로 남태수도 효과를 보고 있었다.

실제로 방금 소환되었던 스켈레톤 마티아스는 무르무르와 교대하여 불러낸 게 아니라, 남태수가 직접 사령술로 불러낸 것이었으니까.

아직 스켈레톤이 고작이었지만 어쨌든 스킬 없이도 언데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

천재는 아니라지만, 남태수도 성장하고 있었다.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럼 바로 이동하지.”

“네?”

“31층을 공략하러 간다.”

탑 공략을 재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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