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탑에 오르기 위해 성진은 자신의 카르마를 모두 청동망치에 옮겨 담았다.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지금, 성진은 아공간에 보관 중이던 청동망치를 일시적이나마 불러올 수 있게 되었다.
[무구에 깃든 신성이 당신을 침범합니다!]
[망치가 당신을 인식합니다.]
[신성이 자신의 주인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카르마가 갱신됩니다.]
[보유 카르마를 등급 순으로 정렬합니다.]
[보유 카르마 목록.]
<세계의 특이점 (근원)>
<사룡왕의 계약자 (신화)>
<요정왕의 대행자 (신화)>
<진마왕의 계승자 (신화)>
<기갑왕의 대전사 (신화)>
……
성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목록 사이에서 원하던 것을 찾았다.
<별이 불태우지 못한 자 (전설)>
“네놈의 주인조차 불태우지 못한 나를 일개 사도 주제에 불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성진이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 붙어있던 성좌의 불꽃이 촛불처럼 꺼졌다.
불과 광채의 성좌조차 온전한 상태의 성진을 상처 입힐 순 없었다.
하물며 그 힘을 빌려다 쓸 뿐인 사도라면 더더욱.
청동망치를 통해 일시적으로 격을 되찾은 지금.
그는 성좌가 두려워하고 왕들이 인정한 이 세계의 특이점이었다.
‘이거 한 번으로 30층까지 모은 힘의 절반이 날아갔군.’
청동망치는 잠깐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힘을 소모한다.
고작 리처드 카이만 하나 잡겠다고 부르는 것은 낭비.
그러나 성진이 노리는 건 처음부터 리처드 카이만 따위가 아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사도는 사도. 저기다 빨대를 꽂아 차원문의 배터리로 쓰기 위해선 그 뒷배의 눈을 가려놓을 필요가 있다.’
1초라는 시간 동안 한정적으로 소환된 청동망치는 어느새 신성광휘를 잃고 사라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돌아왔던 카르마 또한 사라지고 있었으나, 남은 카르마의 편린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충분했다.
성진은 그 상태로 망치를 휘둘러 리처드 카이만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화륵!
어차피 불꽃으로 만들어진 분신.
머리가 터진다고 죽지는 않는다.
대신 그 안에 들어있던 정신은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고 모든 정신방벽이 해제된다.
성진은 리처드 카이만의 정신 깊은 곳에서 별의 바다를 발견했다.
그가 별을 바라보자, 별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
[불과 광채의 성좌가 염탐꾼의 존재를 눈치챕니다.]
그 메시지와 동시에 30층의 스테이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망치를 휘두른 충격파로 구름이 모두 날아간 화창한 하늘.
푸른 하늘이 한순간에 밤하늘로 변하며 별들이 도래했다.
직후, 강렬한 빛이 다가오며 다른 모든 별빛을 누르고 홀로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지평선까지 이어진 십자형 광채와 십자가를 후광처럼 감싸 두른 광륜.
밤이 되었던 하늘이 순식간에 다시금 대낮처럼 밝아졌다.
[불과 광채의 성좌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조준경의 십자선과도 같은 그것은 바로 성좌의 ‘눈’이었다.
불과 광채의 성좌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테이지를 모두 불태울 열기를 발했다.
시선만으로 세상을 불태우는 신성존재.
티타니아가 미리 펼쳐둔 요정결계는 30층을 통째로 다른 차원에 격리시켜 스테이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허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태수는 성좌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영혼이 불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저 눈은 일개 필멸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별빛이너무가까워별빛이너무가까워별빛이너무가까워별빛이너무가까워별빛이너무가까워별빛이너무가까워…….”
-정신 차리십시오 마스터! 저것의 마력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해선 안 됩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바닥에 엎드려 온몸을 웅크려도 별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마력을 느끼는 것조차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남태수에게 역으로 마력을 느끼지 말고 외면하라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특이점.]
“그래 나는 여기 있다. 네놈들이 그리도 두려워하던 존재가 이렇게 쇠약해진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와서 자세히 살펴봐라. 지금이라면 네놈 혼자서도 나를 죽일 수 있다.”
성진은 네 생각쯤은 다 안다는 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너 혼자서 내 영혼을 독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 말에 30층 전역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특이점.]
“더 다가와라. 고개를 들이밀어. 짐승이면 짐승답게 참지 말고 머리를 처박아.”
불과 광채의 성좌는 성진의 말처럼 이성이 없는 짐승마냥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별빛을 반짝였다.
[특이점.]
그리고 별빛이 충분히 가까워진 순간, 성진은 하늘을 향해 망치를 집어던졌다.
빠르게, 하지만 드넓은 하늘 아래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날아오른 망치는 별빛의 중앙에 가 닿았고,
쩌억!
하늘이 갈라졌다.
[……!!!!]
소리 없는 영혼의 비명이 30층에 울려 퍼졌다.
별빛으로 대낮처럼 밝아졌던 하늘이 유리창처럼 깨져나가며 다시금 밤하늘이 돌아왔다.
“어떻게……?”
분신체를 회복한 리처드는 그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어떻게 일개 인간이 위대한 성좌께……!”
사도인 리처드는 성좌의 힘을 잘 알았다.
알기 때문에 더더욱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성좌의 권능을 깨부수며, 어떻게 인간이 성좌를 상처 입힌다는 말인가?
“글쎄.”
성진은 멍청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리처드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내가 그놈들보다 더 위대한가 보지.”
“사도 따위가 아냐, 네놈은, 네놈은……!”
불과 광채의 성좌가 상처 입고 물러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성진은 리처드를 마무리하기 위해 그에게로 향했다.
“나는 주성진, 탑을 부수고 성좌를 멸하기 위해 돌아왔다.”
“……!”
“그리고 너와 네 성좌의 힘은 차원문을 가동시키기 위한 재료가 될 것이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
그것이 불과 광채의 사도 리처드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 *
불과 광채의 눈을 파괴한 직후, 성진은 충격에 빠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성좌가 발하는 힘에 대미지를 입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제로 성좌를 접해본 결과 기대와 상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점에 놀란 눈치였다.
‘세계정부가 성좌를 숭배하는 와중에도 실제로 성좌를 접해본 것은 사도 정도겠지.’
강력한 힘을 지녔을 뿐인 짐승 같은 놈들.
한때 천상의 신들이었던 저 신성존재들은 이제 완전히 영락하여 끝없이 힘을 탐하는 아귀가 되어버렸다.
-잘 하셨습니다 선생님. 눈을 부쉈으니 불과 광채의 성좌는 한동안 활동이 불가능하겠지요.
성진은 티타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채가 손상되었으니 불과 광채의 성좌는 성진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으리라.
30층을 완전히 장악하고, 주변의 눈을 티타니아의 결계로 가린 상황에서, 리처드 카이만이 겁도 없이 혼자서 이곳에 기어들어 와준 덕이었다.
별빛이 깨지며 드러났던 밤하늘은 이내 푸른 하늘로 돌아왔다.
-바깥은 밤이로군요. 본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요.
스테이지의 하늘이 부서지며 드러났던 지구의 하늘.
금방 복구되긴 했지만, 이쪽에서 바깥을 볼 수 있었다면 그동안 바깥에서도 이쪽을 볼 수 있었으리라.
“감수해야지.”
사도를 붙잡았으니 어차피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은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분신술을 해제하거나 분신체가 사망할 때까지 사용자의 의식은 본체로 돌아가지 않고 분신체에 남는다. 놈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붙잡아둔 이상 바깥의 본체가 계속 잠들어있을 테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는 건 불가능해.”
게다가 잠깐 30층 내부의 광경을 본 것만으로는 바깥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으리라.
“성좌와 사도들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버벅대는 사이 탑의 끝에 오른다.”
이번에 일을 크게 벌이긴 했지만 기본적인 것은 달라질 게 없었다.
불과 광채의 성좌가 회복하고 나면 천상이 움직이겠지만, 어차피 성진도 천년만년 탑을 오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놈이 회복할 때쯤이면 이미 모든 일이 끝나있으리라.
“자, 그러면.”
충격에 빠져있는 플레이어들 속에서 성진은 유난히 멀쩡해 보이는 한 사람을 찾았다.
“네 녀석은 뭐 하는 놈인지 들어보도록 할까.”
* * *
같은 시각, 별들이 떠난 세계.
세상을 지탱하던 모든 카르마가 사라지고,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천천히 식어가는 그 세계에서 왕이 눈을 떴다.
“청동망치가 움직였다.”
여덟 왕은 모두 죽어 영혼만 남은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모두가 패배하여 힘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성좌와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닌, 마도의 극을 보기 위해 스스로 언데드가 되는 길을 택한 왕.
사룡왕이 계약자의 행보를 감지해냈다.
“벌써 그만한 힘을 회복한 건가. 과연 여의 계약자답구나.”
사룡왕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진은 사룡왕이 그 모습을 취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나, 그녀는 오히려 그러한 반응을 좋아하여 인간의 모습을 즐겼다.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립구나. 여의 보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영혼이 성좌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여는 미쳐 버릴 것이니라.”
그녀는 처음부터 이번 작전에 반대했다.
영혼을 다루는 사령술사로서 성진과 같은 강대한 영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없을 보물과도 같았다.
성진은 죽더라도 사룡왕 자신이 영혼을 회수할 수 있는 선에서 죽어야 했다.
탐욕스러운 용왕은 자신의 보물이 성좌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지구라. 탑이 나타난 이상 그곳에도 사령술사가 생겨났겠지. 그들의 눈을 통해 여의 귀여운 계약자가 뭘 하고 있는지 지켜보도록 할까.”
그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요정왕이 반응했다.
“사룡왕 엘드리치. 괜한 짓 하지 마라. 성좌의 눈길을 끌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지?”
“흥, 패배자는 조용히 잠들어있도록. 그딴 힘만 센 무식한 놈들이 여의 마법을 간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요정왕 맥글로리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죽어서도 업과 카르마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룡왕의 마법 덕분이었으니까.
거신왕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크크크, 최후의 용왕이여. 죽은 동족을 죄다 언데드로 되살린 그 광기와 집착은 여전하군.”
최후의 용왕이자, 사룡군단의 주인.
사룡왕이 천상과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이상 왕들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특이점의 말에는 그렇게 끔뻑 죽더니, 귀쟁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가.”
각자 한 종족을 대표하는 신성존재였던 여덟 왕들은 서로 어울리기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그들이 손을 잡은 건 성좌라는 공통의 적과, 주성진이라는 특이점의 존재 때문.
“어쨌거나 여의 계약자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그대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잠자코 지켜보도록.”
사룡왕의 두 눈이 지구의 사령술사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