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런가.”
성진을 마주한 리처드 카이만은 주먹을 꽉 쥐었다.
“30레벨에 불과한 몸으로도 나를 날려버릴 정도의 힘. 거기에 매혹이 통하지 않는 이 카르마.”
답은 명백해 보였다.
“네놈도 사도로군.”
리처드는 성진을 다른 성좌의 사도로 오해했다.
“지분을 나눠 먹자는 협약이 마음에 안 든 성좌가 있었나? 용케 지금까지 세계정부의 눈을 피해 사도로 활동했군.”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며 다나를 바라보았다.
“그년의 동생이랑 함께 있는 걸 보니 신시아 스펜서, 침묵과 광기의 사도도 한패인가 보지? 망할 년. 자기 뒤가 구린 걸 감추기 위해 동생을 팔아 나를 협박했던 건가?”
성진은 그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해주지 않았다.
일부러 상대에게 자신의 정보를 넘겨줄 필요는 없었다.
“같은 사도끼리라면 봐줄 필요는 없겠지.”
리처드는 하늘 위에 그대로 모여 있던 인공태양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태양은 천천히, 아니 너무나 거대하여 느릿하게 보일 뿐 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불과 광채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불길이다! 마력으로 발현되는 일반 스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힘이지!”
그 말대로였다.
권능스킬은 성좌의 힘을 직접 빌려오는 스킬.
영혼까지 불태우는 저 카르마 불꽃은 일반적인 물리법칙을 넘어선 힘이었다.
하늘 높이 있음에도 지면까지 느껴지는 강력한 열기.
저게 지상에 떨어지면 모든 것이 불타버리리라.
“이 스테이지 내에서 저것을 피할 곳은 없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이란 뜻이지. 자, 어떻게 할 테냐? 이름 모를 사도야!”
성진은 낙하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그의 옛 동료를 불렀다.
“티타니아.”
파지지직!
강렬한 스파크가 허공을 수놓으며 요정향의 하늘에 원을 그렸다.
양옆으로 뻗어나간 곡선이 태양을 가두며 완전한 원을 이룬 그 순간.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이 그 자리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뭣……?”
공간전이.
막을 수 없다면 통째로 치워버릴 뿐.
티타니아는 울릉도보다 거대한 리처드의 태양을 통째로 자신의 아공간에 집어넣어 버렸다.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지는 인벤토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아공간과, 태양을 통째로 이동시킬 수 있는 막대한 마력.
한때 성좌와 싸우던 준신은 죽어서 육체를 잃고 영혼만 남아 봉인된 와중에도 압도적인 마법.
콰악!
직후, 성진의 주먹이 리처드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퍼어엉!
“몸뚱이는 하급 천사보다도 튼튼하군. 꼴에 사도라 이건가.”
주먹에 맞고 튕겨 나가는 리처드를 뒤쫓아 몇 번이고 후속타를 박아 넣는다.
파바바바방!
결국 그 공격을 버티지 못한 리처드는 자신의 육체를 불꽃으로 화해 성진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화르륵!
흡혈귀가 핏물로 변해 몸을 빼듯, 육체를 불꽃으로 변화시켜 도망치니 맨손으로는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육체 강화 권능인가? 아니면 그년처럼 종족 변경? 어느 쪽이든 잘 되었군.”
그와 동시에 리처드의 육체가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불과 광채.
불꽃이 무효화되자 그는 자신의 두 번째 특기를 꺼내 들었다.
“이 몸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최속의 사도! 이제 네놈의 주먹이 닿을 일은 없다!”
리처드는 그렇게 말하며 가속해 성진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사람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속도.
한줄기 섬광이 되어 주위를 휘감는 그 모습에 성진은 가볍게 주먹을 들어,
콰아아앙!
바닥을 내리쳤다.
“거긴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지면을 밟고 움직이는 이상, 갑자기 지면이 무너지면 움직임도 흐트러지기 마련.
성진은 리처드가 멈칫하며 한순간 감속한 틈에 주먹을 뻗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커헉!”
피 대신 불똥이 튀어 올랐다.
“빛의 속도라기에는 많이 느리군.”
“어, 어떻게…….”
정말로 리처드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면 주변은 이미 초토화되었으리라.
광채를 휘감은 속임수.
성좌의 개답게 구차하고 치졸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칫!”
리처드는 상대의 예상치 못한 강함에 당황하면서도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도주하려 했다.
어차피 이곳에 보낸 것은 분신체.
분신을 해제하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저레벨 사도라고 얕볼 상황이 아니다.’
저레벨이면서도 이미 전투에 익숙한 모습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디선가 자신의 불꽃을 없앤 의문의 조력자의 존재.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자신과 달리 상대는 사도를 맞이할 준비가 다 되어있는 상태였다.
‘저 다나라는 년도 함께 있는 걸 보면 신시아 그년도 이 일에 엮여있다.’
이 모든 것이 함정이라 생각한 리처드는 분신을 해제하여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당신은 정령결계 내부에 있습니다!]
[정령결계 내에서는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분신술을 재사용하여 해제하려던 리처드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고서야 뒤늦게 자신의 스킬이 봉인되었음을 깨달았다.
“도망칠 생각인가?”
성진은 그런 리처드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왔다.
“내가 뭣 때문에 늦었다고 생각하지? 이미 네놈의 퇴로는 모두 막아뒀다.”
“강신!”
[당신은 정령결계 내부에 있습니다!]
[정령결계 내에서는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젠장, 이것까지? 강신! 강신! 강신!”
[정령결계 내에서는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령결계 내에서는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령결계 내에서는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도를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그들의 뒷배인 성좌와의 연결을 끊어놓는 것.
“이런 함정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내 손으로 스킬을 해제할 수 없다고 해도 분신술은 분신이 죽으면 자동으로 원래 몸에 돌아가게 되어있어!”
리처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스스로 빨리 죽으려하는 대신 당당히 성진을 향해 뻗댔다.
성진은 그런 리처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죽이지 않는다.”
“그럼……?”
“본인의 사도가 죽으면 불과 광채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러니 네놈은 죽이지 않는다.”
대신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만든다.
“네놈은 이곳에서 식물인간이 되어 차원문을 가동하기 위한 마력 배터리가 될 거다.”
성진은 리처드가 이곳의 플레이어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운명을 선언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리처드는 자신의 선언을 실현시키지 못했지만, 성진은 그것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점.
“초짜 사도 주제에 감히!!!”
상황의 불리함에 도망치려던 리처드는 그 도발에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섬광과 같은 대시.
리처드가 인벤토리에서 장검을 꺼내 들자 검신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라 녹아버리고, 불꽃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압축된 불꽃이 광선검처럼 빛나는 모습.
권능의 불꽃으로 만들어진 리처드의 광검은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닿은 것을 모두 불태우는 카르마를 담고 있었다.
“잿더미로 만들어주마!”
리처드가 광검을 휘둘러오는 와중에도 성진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공격방향을 향해 손을 뻗어 광검을 잡으려 들었다.
치이이익!
성진의 손이 광검을 붙잡자 그의 손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무르무르와 교대하여 마력을 회복하고 있던 남태수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성진 씨! 손이!”
지금까지 그 어떤 공격에도 상처입지 않던 성진이 이번만큼은 대미지를 받고 있었다.
리처드는 성진의 손에 불이 옮겨 붙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크하핫! 이 분신체가 죽어도 그 불꽃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에 붙은 불은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없앨 수 없겠지! 멍청한 놈! 이걸로 네놈은 끝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진은 불타고 있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익어버린 것은 피부뿐, 뼈와 근육은 열기를 버티고 있었다.
-선생님!
그 모습에 옥좌의 방에서 요정향을 굽어 살피고 있던 티타니아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역시 무기가 없으니 불편하군.”
“성진 씨, 일단 물러나죠. 상대는 사도라고요. 저건 힘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에요!”
남태수는 성진의 손을 보며 물러나자 떠들어댔지만, 성진은 그런 그를 탓하지 않았다.
“단순한 마력과 권능스킬의 차이를 느꼈나? 조금은 볼 수 있게 된 모양이군.”
“예?”
“모든 존재는 살아가면서 쌓아온 업에 따라 카르마라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카르마의 보유량에 따라 영혼의 격이 상승하지.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남태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신성존재인 성좌들이 하위존재의 영혼을 잡아먹는 것도 모두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이 상황에 그게 무슨…….”
“지금부터 잘 봐둬라. 그리고 무서우면 도망쳐라.”
“도망치라니요?”
“볼 수 있게 된 지금이라면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잘 보고 결정해라.”
성진은 남태수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나와 함께한다는 건 앞으로 이런 싸움을 반복할 거란 뜻이다. 감당할 수 없다면 떠나라. 이번이 네가 발을 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끝까지 함께하거나, 여기서 헤어지거나.
성진은 처음 남태수를 끌어들일 때, 거절은 거절하겠다며 그를 강제로 붙잡았다.
이유는 간단.
승낙하든, 거절하든 아무것도 모르는 놈의 대답은 무의미했으니까.
그러나 상황을 알고, 본질을 볼 수 있게 된 지금.
남태수가 스스로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존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성진에게는 그가 어떤 결정을 했냐 보다는 어떻게 결정을 했냐가 더 중요했으니까.
남태수는 갑작스러운 선택지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건 당연히…….’
자신처럼 재능 없는 일반인이 그런 거대한 전쟁에 끼어들어 무슨 대단한 활약을 하겠나.
이런 건 당연히 발을 뺄 수 있을 때 빼야 했다.
‘하지만 성좌가 결국 전 인류를 잡아먹을 생각이라면 도망칠 곳도 없지 않나? 사도인 리처드 카이만도 저렇게 우리를 쫓아왔는데.’
섣불리 답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다.
성진은 그런 남태수를 채근하지 않고 리처드를 향해 돌아섰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둬라.”
그리고 천사의 힘으로 회복한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구로 돌아와서 처음.
성진의 손에서 마법이 펼쳐졌다.
“그리고 결정해라.”
여덟 개의 마법진이 성진의 팔을 휘감고 펼쳐졌다.
마법진에서 시작된 빛은 성진의 손안에 뭉쳐 어떠한 형상을 이루었다.
남태수는 그 형상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남태수만이 아니었다.
“뭘 하는 거지?”
리처드 카이만은 물론, 다나나 30층의 그 어떤 플레이어들도 빛의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신성광휘.
압도적인 영혼의 격이 발하는 찬란한 그 빛은, 격이 떨어지는 존재들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위업의 상징이었다.
“한정소환, 1초.”
대장장이 신의 청동망치가 성진의 손안에서 형태를 갖춘 순간, 성진의 영혼은 온전한 격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성진의 망치가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