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다나가 30층의 플레이어들과 남태수 사이에 끼어들게 된 경위는 이랬다.
실력 있는 유망주답게 다나는 남태수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30층에서 기여도를 쌓고 있었다.
노역장이 아니라 전장에서 활약하던 그녀는 남태수와 성진이 같은 층에 올라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성진이 30층의 모든 플레이어들을 불러내 자신의 통치를 선언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
아무리 다나라도 이곳의 NPC 요정들이 죄다 성진을 따르는 와중에 홀로 거기에 반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당신들 이 층에선 딱히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지도 않았고.”
다나는 혼자서도 30층의 플레이어들을 여유롭게 상대하며 남태수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우린 수배자인데?”
“상대가 수배자라도 살인은 범죄라고! 게다가 당신은 저항도 안 했잖아!”
‘엉?’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남태수는 반사적으로 의문을 표했다.
다나의 말은 이랬다.
“태수 아재는 그 주성진이란 사람과 동료지? 그 남자의 힘을 생각하면 아재도 엄청 강할 텐데. 한주먹거리도 안 될 사람들이 덤비는 걸 봐주고 있던 거 아냐?”
‘아.’
다나는 남태수에게서 느껴지는 무르무르의 마력 때문에 그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오히려 발작적으로 남태수를 죽이려 드는 다른 플레이어들이야말로 위험한 상태였던 것.
‘그게 아니더라도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꼴을 그냥 넘길 순 없고.’
과한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으나 다나에게는 이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신들이 NPC를 죽이는 건 몰라도 플레이어를 죽이는 꼴은 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극동군구의 군인들이나 추살대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봐?”
“죽였다고 알려진 인원들은 전부 세계정부 소속이지? 그 이야기는 여기서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여긴 듣는 귀가 많으니까.”
“……!”
세계정부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말에 무르무르 또한 놀랐다는 듯이 반응했다.
-일단 그 말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마스터. 그녀가 무슨 의도로 마스터에게 접근했든, 그녀가 지닌 정보는 귀중한 것입니다.
남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플레이어들을 밀어낸 다나는 남태수를 집어 들고 주위의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아무튼 저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한 거에 대해선 뭐 아는 거 없어?”
“그건 나도 잘…….”
그렇게 대답하던 남태수는 문득 다나를 다시 바라봤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전부 정신이 이상해져있는데 얘는 괜찮아 보이네?’
지금 상황도 상황이지만, 확실히 무르무르의 말대로 다나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쳇,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요정들은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야?”
30층이 암묵적 휴전지역인 것은 이곳의 NPC인 요정들이 플레이어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
그러나 평소라면 금방 튀어나와 관련자들을 체포해갔을 요정들이 어쩐지 지금은 조용했다.
“아재는 저 사람들 막을 방법 없어? 죽이진 말고 제압만.”
-마스터.
‘알았어.’
두개골을 쓰고 무르무르와 교대하자 사악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에 다나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툼스톤 스트라이크.”
스킬 대신 직접 마력을 움직여 마법을 발동시킨 순간, 하늘에서 수십 개의 묘비가 따발총처럼 떨어졌다.
쿠구구구구구궁!
정확히 플레이어 하나하나를 저격한 묘비들은 지면에서 상대를 깔아뭉갠 채 일제히 마법진을 발동했다.
묘지 위에 비석이 박히듯 적들을 땅속에 처박아버리고 붙잡아두는 마법.
“그 기술은 2차 전직 스킬일 텐데 어떻게 30레벨이…… 하긴 그 정도의 힘은 되니까 그렇게 공격받으면서도 반격하지 않고 여유롭게 있었겠지.”
다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랐으나 이내 혼자 알아서 납득했다.
-여유?
‘묘한 오해를 하고 있군요. 저희야 귀찮게 따져 묻지 않으니 좋습니다만.’
본격적으로 무르무르가 나서자 덤벼든 플레이어들을 제압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이걸로 끝인가? 자 그럼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한담?”
이들이 갑자기 단체로 미친 게 아닌 이상 이 일에는 누군가 흑막이 있으리라.
다시금 무르무르와 교대해 몸을 돌려받은 남태수가 이 사건을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 다나가 누군가의 접근을 알렸다.
“아재, 아무래도 힘들게 찾아다닐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다나가 가리킨 방향에는 이 소동에 휩쓸리지 않은 한 플레이어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너는 또 왜 나를 아재라고 부르는 건데?”
“여기 사람들이 다 태수 아재라고 부르니까 나도 입에 붙었나 보지.”
두 사람이 떠들어대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앨런 스미시가 입을 열었다.
“원래도 기대는 안 했지만 어떻게 인질도 못 잡는지 모르겠네. 버러지 같은 것도 정도가 있지.”
그는 지면에서 튀어나온 플레이어들의 머리를 굴러온 공처럼 걷어찼다.
툼스톤으로 땅속에 파묻는 와중에도 숨은 쉴 수 있도록 머리만은 빼준 것이었으나, 덕분에 그들은 속절없이 머리통을 걷어차여야 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조종한 건가?”
남태수가 그에게 묻자 앨런은 빤히 그를 마주 보더니 한 마디 내뱉었다.
“어차피 죽을 놈이 궁금한 것도 많지.”
-마스터!
다음 순간, 그는 남태수의 눈앞에 도달해있었다.
덥썩!
앨런은 한 손으로 남태수의 목을 잡아들었다.
그의 손에 목이 졸린 남태수는 소리를 내지 못해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앨런은 그 상태로 옆에 있던 다나에게 명령했다.
“너는 지금부터 주성진이라는 놈을 불러와라.”
“……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다나는 어이없어하며 그를 공격했으나 앨런은 손쉽게 공격을 피해냈다.
“이것 봐라? 그때 모임에 없어서 내 매혹에 안 걸렸나 했는데. 이제 보니 저항하네?”
“매혹이라니, 사람을 향한 정신조작은 살인 이상의 중죄…….”
“아하! 네가 바로 그년 동생이구나?”
앨런이 그렇게 말한 순간, 다나의 눈빛이 180도 변했다.
여유롭게 플레이어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살기가 듬뿍 담긴 참격.
그러나 다른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던 다나의 진심이 담긴 검격을, 앨런은 맨손으로 간단히 잡아버렸다.
“인간이 아니니 인간을 향한 매혹이 안 걸리지.”
앨런은 다나의 검신을 붙잡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가 붙잡은 부분으로부터 강렬한 열기가 뿜어지며 금속제 검을 통째로 녹여버렸다.
탑의 시스템이 표기한 그의 ID가 오류라도 난 것처럼 노이즈로 뒤덮였다.
-조졌군요. 스테이지에 이상현상이 벌어진 걸 보자마자 도망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어야 하는데. 제 실책입니다 마스터.
‘반성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뭔가 방법을……!’
-방법은 없습니다.
‘뭐?’
-모든 마법이 스킬로만 사용되는 문명. 지구상에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ID의 노이즈가 걷혔다.
-적은 사도입니다.
분신체로 카르마가 넘어오며 탑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의 ID를 수정했다.
리처드 카이만은 이미 탑에 한 번 올랐던 인물.
식별이 완료되었으니 그는 곧 탑 밖으로 쫓겨나겠지만, 사도에게는 그만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 사도가 사람들을 세뇌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괜찮으신가?”
다나는 이러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비교적 담담히 그를 비꼬았다.
이미 사도의 비밀에 대해 그녀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알려져? 왜?”
카르마가 넘어오며 외모까지 완전히 리처드 카이만으로 변한 분신체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긴 시체밖에 없는데? 이곳에서 나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군.”
그와 동시에 리처드 카이만의 몸 속에서 거대한 마력이 용솟음쳤다.
리처드는 더 이상 남태수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그를 집어던졌다.
“커헉! 아오 씨……!”
남태수는 뾰족한 모서리에 허리를 부딪치곤 바닥을 굴렀다.
“가능하면 주성진 그놈의 얼굴을 확인하고 처리하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너희들과 함께 30층을 통째로 불태워주마.”
본체의 힘을 불러오면 탑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된다.
때문에 성진을 확실히 찾아놓고 힘을 불러오려 했던 리처드였으나, 다나를 본 순간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네가 죽으면 신시아 그년의 표정이 볼만하겠지. 지금부터 너와 이곳의 플레이어들은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 주성진이 사도인 이 몸을 두려워하여 자폭해버렸기에 죽는 거다. 네놈들의 이름은 특별히 21세기 최악의 테러에 휘말린 희생자로 대서특필해주지.”
묻혀있던 플레이어들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불과 광채의 사도시여?”
권능스킬로 매혹되어있던 플레이어들은 스킬 사용자인 앨런 스미시가 시스템상 다른 인물로 변경되자 스킬 효과에서 풀려났다.
제정신을 되찾은 그들은 매혹되어있던 당시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눈치가 아무리 없더라도 눈앞의 사도가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져 있던 정의의 사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명확한 상황이었다.
리처드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라 하늘 위에서 불꽃의 구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불과 광채의 사도가 만들어낸 인공태양.
인공태양의 불꽃은 계속해서 불어나며 스테이지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커져갔다.
‘무르무르! 빨리 교대를…….’
-아무리 저라도 마스터의 빈약한 몸뚱이를 가지고는 권능스킬을 써댈 사도와 싸워 이길 순 없습니다.
무르무르가 아무리 뛰어난 리치라도 남태수의 몸은 고작 30레벨 플레이어.
그의 몸으로는 절대적인 마력량이 부족해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아까 말했지 않습니까. 막을 방법이 없다고.
‘그럼 이대로 죽어야 한다고?’
-아니오. 막을 방법만이 아니라 막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무르무르의 말이 떨어진 직후.
“쓸모없는 목격자 놈들. 내게 거역한 멍청한 놈과 함께 모두 불타 사라져라!”
“아니, 멍청한 건 네놈이다. 성좌의 개.”
그와 동시에 날아든 주먹이 리처드의 면상에 작렬했다.
리처드는 일격에 보도블럭을 갈아엎으며 바닥을 굴렀다.
무르무르가 기다리던 인물은 일격에 사도를 수백 미터나 날려버리며 등장했다.
“성진 씨!”
“조금 늦었다.”
“조금이 아니잖아요!”
남태수는 성진의 말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는 듯이 따져 물었지만 성진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여기 들어온 사도가 저놈 하나뿐인지, 또 저놈이 나를 보고 도망가 성좌에게 이르지 못하도록 차단막을 준비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정체를 드러낼 거라면 확실하게.
목격자를 모두 불태우려 했던 리처드와 마찬가지로 성진 또한 뒷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단 말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성진이 직접 나선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불과 광채의 사도. 네 죄업은 여기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