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여덟 왕의 대전사인 성진은 그들의 힘만이 아니라 군대 또한 물려받았다.
지구로 잠입할 때는 성좌의 눈을 피하기 위해 홀로 움직였으나, 바깥에는 그를 여전히 따르는 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탑의 꼭대기에 오른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니지. 그건 시작일 뿐이다.”
천상의 좌표를 얻고 난 뒤.
그때부터야말로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차원문은 좌표를 얻은 뒤 군대를 불러오기 위한 다리가 되어줄 거다. 30층은 완전히 우리 손에 있으니 여기라면 방해받지 않고 차원문을 완성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일반 플레이어까지 동원해서 일을 벌이는 거군요?”
“플레이어들이 뭐라 불만을 가지든 이곳은 티타니아가 통제할 수 있으니까.”
성진이 자신의 이름을 꺼내자 티타니아는 그의 무릎 위에서 우쭐한 표정을 짓다, 남태수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싹 바꿨다.
“선생님, 이제는 제가 있으니 저런 시체쟁이와 함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의 뒷바라지는 제게 맡기세요.”
티타니아는 사령술사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아니, 너는 여기 남아 있어야 하니 저 녀석은 계속 데려갈 거다.”
“선생님!”
“너처럼 중요 감시대상인 영혼이 자리를 이탈하면 담당 관리자가 없어도 성좌들이 알아채겠지. 너는 내가 탑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 이곳에 남아 후방에서 우리를 지원해라.”
성진은 티타니아의 반발을 일축했다.
요정왕의 후계자로서 요정향의 통치자가 된 티타니아였지만 그녀는 성진의 말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성진 씨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인가?’
“그리고 남태수.”
“네?”
“보아하니 그간 30층의 플레이어들에게 인망을 쌓아둔 모양이더군. 너는 현장에서 플레이어들을 관리해라.”
“제가요?”
“기초공사를 마칠 때까지 한동안 여기 머물 거다.”
* * *
남태수를 공사현장으로 보낸 성진은 다시금 설계의 검토에 나섰다.
대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차원문.
거기에 스테이지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만을 이용해 만들어야 했으니 대체품의 대체품까지 써가며 설계를 해야 했다.
덕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을 왕창 써먹었으므로 예상한 성능이 나올지 어떨지 알기 힘들었다.
티타니아는 그런 성진을 곁에서 묵묵히 바라보았다.
반신인 그녀는 전장에서 죽어 NPC의 몸에 영혼을 봉인당하고서도 자유의지를 지니고 NPC의 몸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필 사령술사 따위를 데리고 다니시다니.’
사령술사라 하면 결국 사룡왕의 수하나 다름없는 존재.
티타니아는 같은 반성좌연합의 일원이면서도 사룡왕이 싫었다.
‘아버님의 시신을 언데드로 만든 망할 년.’
요정왕이 죽고 요정향이 무너지던 날.
뒤늦게 도착한 사룡왕은 요정왕의 시신을 언데드로 만들어 성좌들을 막아섰다.
신성존재의 시신으로 만들어진 언데드는 과연 강력했다.
티타니아는 그렇게 번 시간으로 요정왕의 영혼에서 카르마를 이어받아 신성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룡왕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반면 사룡왕과 함께 와 티타니아와 다른 요정들을 구해준 성진은 달랐다.
그는 성좌들을 모두 몰아낸 뒤에도 요정향에 남아 어린 티타니아에게 카르마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성진은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해 고통에 시달리는 티타니아를 위해 항상 그녀의 손을 잡고 대신 그 힘을 진정시켜주었다.
그녀가 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성진은 티타니아를 대신해 그녀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한 달이 넘게 잠도 자지 않고 그녀를 지켜봐주었다.
‘아무도 저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선생님만은 달라.’
신성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존재.
신성존재인 요정왕에게 후계자 따위가 필요할 리 없었다.
요정공주는 천상과의 전쟁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진 요정왕의 대체품이었다.
본래라면 불가능할 카르마의 양도를 가능케 하기 위해 요정왕이 스스로를 복제해낸 클론.
언젠가 요정왕에게 몸을 내어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할 예정이었으므로, 요정들은 그녀에게 정중히 대할지언정 그녀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반면 성진은 요정왕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한 그녀에게 티타니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를 사람으로 대했다.
그리하여 티타니아는 요정들의 새로운 통치자로서 성진을 위해 싸우고, 성진을 위해 죽었다.
‘선생님의 곁에 있어도 되는 건 나뿐인데. 그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하는데.’
남태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신의 원한을 샀으나 그가 이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다.
* * *
안 그래도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던 30층의 플레이어들은 그나마 얻던 기여도마저 무보수로 변하자 이를 갈기 시작했다.
요정들을 향하던 짜증은 성진에게로 돌아섰다.
“저 새낀 진짜 죽인다. 두고 보자 진짜 죽인다.”
“왜인지 30층에서야 요정들이 저놈을 떠받들지만, 그것도 다음 층으로 넘어가면 끝이라고.”
요정들이 있으니 여기선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탑의 공략이 계속되면 얼마든지 틈은 있으리라.
실제로 탑에서 범죄의 예방은 불가능, 기껏해야 잡은 범죄자를 확실히 처벌하는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어지간하면 서로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협력하는 편이었다.
괜히 원한을 샀다가 위험한 층에서 만나거나, 탑을 나선 뒤에 상대가 레벨이 더 높으면 보복당할 테니까.
반면 성진은 그러한 암묵적인 규칙을 개무시하며 노동을 강요했고, 이는 플레이어들의 원한을 샀다.
“다들 불만이 상당한가보네요?”
“응?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입이냐?”
“안됐군. 지금은 주성진 그 놈 때문에 기여도도 못 버는데 하필 이런 시기에.”
그러한 상황의 30층에, 의문의 남성이 새롭게 등장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남자는 능숙하게 사람들 속에 녹아들었다.
“흐응, 그랬구나. 그럼 저 남태수라는 사람을 잡아다가 다음 층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태수 아재를?”
“그야 저 사람은 주성진이라는 놈이랑 같이 세계정부에 수배된 인물이잖아요? 주성진이라는 놈도 자기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몇 사람 정도는 그냥 보내주겠죠.”
“하지만 태수 아재는…….”
“그럼 계속 여기 있으시려고요? 요정들이 부려먹을 때는 힘들어도 언젠가 기여도를 얻어 다음 층으로 갈 거란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잖아요. 주성진이라는 놈이 이 공사가 끝나면 보내주긴 할까요? 어쩌면 영원히 여기 붙잡혀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가?”
30층의 플레이어들은 이상할 정도로 쉽게 앨런 스미시의 말에 설득되었다.
그가 궤변에 가까운 소리로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권능스킬을 이용하면 선동쯤은 식은 죽 먹기지. 큭큭, 멍청한 놈들.’
리처드 카이만.
뉴욕에서 자신의 분신을 보내 태평양 한복판의 행사에 참여하던 그는 마침내 탑 내부로 자신의 분신을 들여보내 성진을 추적하기에 이르렀다.
‘1층부터 따라잡느라 한참이나 걸렸네. 귀찮게 하기는.’
탑에서 선별한 사도가 토착민들을 쉽게 조종하기 위해 특별히 부여된 권능스킬.
개중에는 성좌의 힘을 빌려오는 것 외에도, 사람을 매혹하는 정신조작 스킬도 포함되어있었다.
탑과 성좌들은 대외적으로 정신계열 스킬을 금지해놓고 자신들만 그것을 활용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
‘탑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카르마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덕분에 이 분신체는 내 카르마를 담지 못한 단순한 통신단말. 직접 주성진 그놈을 잡아 죽이긴 곤란해.’
아무리 사도라도 탑의 규칙은 절대적.
시스템을 우회하여 분신체를 들여보내기 위해 리처드는 앨런 스미시라는 분신체에 최소한의 힘만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앨런 스미시의 전투력은 평범한 30층 플레이어 수준.
‘분신체로 이 이상의 힘을 끌어오는 건 내게도 부담이 커.’
사도인 리처드 자신이 직접 조종하고 있으니 그것보다야 잘 싸우겠지만 추살대를 몰살시킨 테러리스트를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탑 안에서 싸우는 건 사도라도 불편하니 추살대라는 걸 만들어둔 건데. 고작 테러리스트 하나도 잡지 못하다니 쓸모없는 놈들.’
내심 추살대원들을 씹은 그는 다시금 30층의 플레이어들을 선동했다.
“가요. 가서 남태수를 붙잡아 인질로 쓰세요. 인질을 이용해서 주성진을 죽이는 겁니다.”
“주성진을 죽일 수 있다……?”
“인질…….”
권능스킬을 이용한 선동에 당한 플레이어들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이 몸으로 직접 싸우기 곤란하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을 써먹으면 될 뿐.’
동레벨 플레이어 수백 명이 자신을 노린다면 테러리스트라도 간담이 서늘하리라.
만일 그가 어찌어찌 선동된 플레이어들을 쓰러뜨려도 문제였다.
죄 없는 일반인 수백 명을 죽여버리면 막대한 카르마가 쌓이리라.
‘그 정도의 <살인마> 카르마가 있다면 <인류의 지도자> 효과로 페널티를 최소화하고 내 본체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
선동당한 플레이어들이 성진을 붙잡는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국엔 자신이 승리하리라.
완벽한 함정.
그 첫 번째 단계로 앨런 스미시는 30층의 플레이어들을 움직여 남태수를 노렸다.
“태수 아재.”
“어? 음?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다들 우르르 몰려와서는.”
언데드를 부릴 수 있는 사령술사는 홀로 100인분은 거뜬히 해내는 노동력이었다.
요정들은 그런 남태수를 최대 효율로 활용하기 위해 일반 노동자들과 달리 중간관리직에 앉혀놓았다.
덕분에 노역장에서 함께하던 플레이어들과 따로 움직이던 남태수는 그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주성진의 동료. 죽어라.”
플레이어들은 거침없이 남태수의 머리통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사도의 권능스킬은 사람들의 생각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을 뿐, 성향이나 구체적인 행동방식까지 지정할 순 없었다.
덕분에 선동에 의해 폭주한 플레이어들은 남태수를 인질로 잡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잡아 죽이려 들었다.
“으아아 갑자기 왜 그러세요!”
남태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황급히 몸을 피했다.
“우릴 착취하는 놈과 공범.”
“네놈도 주성진과 똑같다.”
남태수는 성진과 함께하며 스펙을 잘 챙겼을 뿐, 특별히 남들보다 싸움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령술사는 PVP에 취약한 직업.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자 그로서는 도망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스터, 교대합시다.
“잠깐만, 저 사람들은 NPC도 아니고 플레이어잖아! 죽이면 안 된다고!”
-하지만 이대로 가면 마스터가 죽을 겁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
몬스터를 죽이는 것하고 사람을 죽이는 건 다른 문제가 아닌가.
탑에 들어오기 전 세계정부의 연수과정에서 최소한의 정신교육은 받은 남태수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이겠다는 각오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쳇, 싱싱한 시체를 수집할 기회였는데.
“본심을 드러냈구나 이놈!”
무엇보다 계약에 의해 묶여있긴 했지만 무르무르는 엄연히 사람 목숨을 자원으로 여기는 사악한 리치였다.
“아무리 나라도 버티는 정도는!”
남태수는 나름대로 언데드를 소환해 방어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상대도 그와 같은 플레이어들이었다.
“신성한 정화!”
사제들의 카운터에 남태수의 사령술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죽어라!”
쿡!
이어서 장검이 그의 가슴을 찔렀지만 알뜰하게 챙긴 방어구의 효과로 갑옷을 뚫지는 못하고 막혔다.
“아저씨 잠깐 뭔진 모르겠지만 말로 합시다 말로…….”
“이익! 그렇다면!”
“우아아아악!”
뒤이어 달려든 전사가 장검 위로 워해머를 내려치려는 순간.
터엉!
길쭉한 다리가 날아들어 이단옆차기로 전사를 날려버렸다.
“너, 너는…….”
남태수의 시선이 머리 위로 향하자 그곳에는 본 적 있는 ID가 떠 있었다.
“아재 살아있어?”
“네가 왜?”
“살아있으면 됐고.”
직후, 다나는 남태수에게서 몸을 돌려 30층의 플레이어들을 향했다.
“덤벼 이 범죄자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