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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27화 (27/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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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 씨?”

무심코 내어버린 목소리에 요정들의 시선이 남태수에게 내리꽂혔다.

그러나 성진이 단상 위에 서서 슬쩍 손을 들어 올리자 요정들은 일제히 차렷 자세를 갖추었다.

회장에 모인 수많은 이들이 왕의 대행자라고 등장한 30레벨 플레이어를 보며 웅성이는 가운데 성진이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그와 동시에 발해진 강력한 마력파가 회장의 소리를 지워버렸다.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갑작스럽게 깔린 침묵에 어리둥절했다.

성진은 그런 이들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요정왕의 대행자인 주성진이다. 현 시간부로 요정향의 모든 것은 내가 통제한다.”

“““존명!!!”””

단순명료한 성진의 선언에 요정 NPC들이 일제히 경례로 답했다.

플레이어들은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라면서도 여전히 침묵에 휩싸여있었다.

“우선 첫 번째 명령이다. 현 시간부로 모든 하급 노역자들은 마수처리 대신 건설에 투입한다.”

“존명!”

“두 번째, 대마수전선에 투입된 모든 인원은 해당 건설의 자재 확보와 가공에 전념한다.”

“존명!”

‘성진 씨는 무슨 생각인 거지?’

30층은 기본적으로 계속해서 밀려드는 마수를 막아내는 스테이지.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그 뒤처리만 하고 있긴 했지만, 가끔 마수전선에 합류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인원이 빠지면 전선에 마수가 쌓이기 시작할 거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건설기간 동안 마수전선은 요정공주가 담당한다.”

그와 동시에 회장 안의 공기가 일변했다.

파지직!

허공에서 튄 작은 스파크.

정전기 크기였던 스파크는 이내 순식간에 불어나며 공간을 찢어발겼다.

‘공간이동?’

남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탑 바깥에서 보았던 텔레포트 스킬을 떠올렸다.

-아뇨, 저건 고작 공간이동 따위가 아닙니다.

스파크가 사방을 뒤덮으며 불어났다.

그리고 그 너머로 전혀 다른 공간이 보였다.

-공간전이. 저쪽에서 넘어오는…… 아니 이건 이쪽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러들인 것이군요.

스파크가 사방을 뒤덮자 어느새 그들은 서 있던 공간째로 다른 공간에 넘어와 있었다.

요정족과 플레이어, 그 외 네 자릿수에 달하는 NPC들.

수많은 사람을 공간째로 전이시킨 마법.

그 마법을 시전한 자는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모두를 수용하고도 남을 거대한 홀.

홀의 한편에는 천장까지 이어진 석재 옥좌가 놓여 있었다.

요정공주 티타니아는 자그마한 몸으로 커다란 옥좌 한복판에 다소곳이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티타니아를 중심으로 옥좌를 따라 바닥까지 늘어진 기다란 머리칼에서는 강력한 마력광과 스파크가 일고 있어, 누가 보아도 그녀가 그들을 불러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저 애가 바로 성진 씨가 말했던 요정공주? 그나저나 레벨이 0이라니……?’

레벨 0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놀란 것은 남태수뿐이 아니었다.

그 의문을 풀어준 것은 무르무르였다.

-비록 반쪽짜리일지언정 과연 신성존재다운 힘이로군요. 저 레벨은 성좌들이 그녀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 부여한 것입니다.

‘힘을 봉인한다고?’

-레벨을 통해 힘을 부여하듯, 레벨을 통해 힘을 제한할 수도 있지요.

성좌들이 만들어낸 탑의 시스템은 단순히 힘을 더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더할 수 있다면 뺄 수도 있는 법.

영혼의 감옥이기도 한 탑의 기능을 이용하면 오히려 힘을 제한하는 봉인구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레벨 제로. 저것은 신성존재의 힘을 봉인하기 위한 족쇄입니다. 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그러는 사이 티타니아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성진은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네 말대로 플레이어와 NPC들을 모두 한곳에 모았다. 이제 밖에 있는 건 전부 마수다.”

“확인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마력파장이 티타니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고리 형태로 퍼진 마력파장은 옥좌의 방 바깥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불태웠다.

“말살 완료. 이걸로 다음 리젠까지 한동안 마수 걱정은 없겠군요.”

티타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선생님.”

* * *

성진의 선언 이후 30층의 모든 플레이어는 모두 어떠한 시설을 건설하는데 동원되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에겐 노가다가 다른 노가다로 바뀌었을 뿐이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건 기여도를 안 주잖아?”

“NPC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킨 일이라고 퀘스트로 인식이 안 된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기존의 스테이지 내용과 전혀 다른 일을 시키자 아무리 일을 해도 기여도가 쌓이지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항의했으나 그에 따른 성진의 반응은 간단했다.

“내가 왜 너희들의 사정까지 신경 써줘야 하지?”

“뭐라고? 당신도 플레이어잖아!”

“플레이어? 웃기는 소리. 더 이상 귀찮게 굴면 봐주지 않겠다. 꺼져라.”

성진의 손짓 하나에 우르르 몰려나온 요정들이 그들을 압박하자, 플레이어들은 어쩔 수 없이 강제노역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저 주성진이라는 인간은 뭔데 요정들이 저렇게 받들어 모시는 거야?”

“게다가 요정공주라니. 난 이 스테이지에 저런 NPC가 있는 줄도 몰랐어.”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요정향의 궁전을 보고서도 거기에 사는 요정 왕족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당장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노역장 행인 데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이들도 전장의 말단 병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아 장군직을 받았다는 쾌락과 유희의 사도가 군부대신을 만났던 게 가장 높은 직위의 요정족이었다.

“무슨 말 한마디로 스테이지의 모든 마수를 지져버릴 줄이야…….”

삽질을 하던 플레이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선언 이후, 건설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왕좌의 방 밖으로 나온 플레이어들은 성벽 너머를 빼곡히 메운 마수들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오염 걱정을 할 것도 없이 완전히 불타버린 대형 마수들의 시체가 성벽 위까지 잔뜩 쌓여있었다.

이곳에서 등장하는 마수들의 레벨을 생각하면, 티타니아의 레벨이 0으로 표기된다 하여도 그녀의 강함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요정공주가 사도보다 더 센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래도 NPC인데…….”

일반 플레이어들이 그러는 동안 남태수는 다시 성진과 마주할 수 있었다.

“성진 씨!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자신을 노역장에 방치해놓고 한동안 안 보이더니 갑자기 스테이지의 NPC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모습.

남태수로서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말하지 않았나. 30층에서는 요정공주를 찾을 거라고.”

“그야 그러긴 했는데요…….”

집무실에서 다시 만난 성진은 남태수의 항의에 뭐가 문제냐는 듯이 담담히 답했다.

반면 성진의 옆에 딱 붙어있던 티타니아는 남태수가 들어서자마자 눈빛이 싸늘해졌다.

“더러운 시체쟁이가 어딜 들어서는 거죠?”

티타니아는 정말로 남태수를 공격하려고 마력을 움직였으나, 성진이 그것을 제지했다.

“멈춰라. 그 녀석은 내 동료다.”

“선생님……?”

티타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놀란 건 남태수도 마찬가지였다.

“동료였어요?”

“그럼 아닌가?”

그 말에 티타니아가 온몸으로 ‘동료가 아니라면 죽여도 되겠지?’ 같은 오오라를 뿜어냈기에 남태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물론이죠. 우리 모두 이 일에 목숨을 건 사이 아닙니까? 아하하…….”

이유야 제각기 다를지언정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성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티타니아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칫.”

‘지금 칫이라고 했지? 진짜 죽이려고 한 거지??’

“아무리 선생님의 동료라도 방해가 된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그리 아세요.”

티타니아는 끔찍한 소리를 내뱉고는 깜찍한 포즈로 성진의 무릎 위에 앉았다.

성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어떠한 건물의 설계도로 보이는 물건을 수정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남태수는 끔찍함과 깜찍함이 공존하는 이 혼란 속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거, 이번에 플레이어들을 시켜서 만들라고 한 거죠? 도대체 뭘 만들려는 거예요? 아니 그보다 요정왕의 대행자라는 건 또 뭐고요?”

“…… 내가 다른 차원에서 성좌들과 싸우다 왔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겠지.”

연달아 쏟아지는 질문에 성진은 굉장히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남태수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요정족은 성좌와 싸우는 연합군의 기둥이었던 8대 종족 중 하나다. 티타니아 또한 나와 함께 싸우던 전우지. 그녀는 이곳에서 우리를 지원할 거다.”

“전우요? 하지만 탑에 있는 영혼들은…….”

성좌에게 죽은 이들의 영혼뿐.

그 사실을 떠올린 남태수는 티타니아를 바라보았다.

자기 나이의 절반은 되었을까 싶은 모습.

그러나 그녀는 이미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존재란 뜻이었다.

-성좌가 멸망시킨 세상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요정공주보다 어린 아이들도 많았겠지요.

그간 성진이 혼자 다니고 있으니 체감할 수 없었지만, 새삼 남태수는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요정공주는 절반이나마 윤회의 굴레를 벗어던진 신성존재입니다. 마스터에게 동정을 살만한 입장은 아니지요.

“신성존재라는 게 도대체 뭔데?”

-신성존재는 강력한 카르마로 윤회의 굴레마저 벗어던지고 신적 존재로 거듭난 영혼들을 말합니다. 성좌와도 같이 말입니다.

“그럼 이 애가 성좌와 같은 신이라고?”

-정확히는 요정공주의 아비이자, 모든 요정들의 시조인 요정왕이 신성존재였지요. 요정공주는 그 카르마를 물려받아 불완전한 반쪽짜리 신성존재가 된 인물입니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카르마에 대한 것도 궁금해진 남태수였으나 성진은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성좌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놈들이 숨어있는 천상의 좌표가 필요하다. 나는 그 때문에 지구에 나타난 탑에 숨어들었지.”

성좌들은 천상에 숨어 탑과 천사들을 내려보내 일방적인 침략을 반복하고 있었다.

놈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결국 천상으로 직접 쳐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내가 탑을 노리고 움직이면 놈들은 천상과의 연결을 끊고 탑을 버려버린다. 때문에 나는 가진 힘의 대부분을 버리고서 몰래 탑에 잠입할 필요가 있었다.”

“…… 가진 힘의 대부분을 버린 게 그거라고요?”

“그래. 그러니 지금의 상태로는 성좌에게 들켰다간 끝장인 셈이지.”

잠입을 위해 힘을 버려두고 왔으니 성좌에게 들키면 끝장.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숨기만 할 수는 없었다.

“천사를 제압하고 탑을 점거하기 위해서 나는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지.”

조용히 탑을 오르기만 해서는 탑을 점거할 힘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힘을 회복하기 위해 너무 날뛰었다간 성좌에게 들킨다.

들키지 않고 충분한 힘을 회복하며 탑의 꼭대기까지 도달할 것.

양쪽의 절묘한 밸런스를 맞춰야지만 승리할 수 있는 도박.

성진은 전쟁의 승패를 걸고 칼끝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맙소사. 그만큼 중요한 일을 지금까지 그렇게 막 해온 거예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다. 중요한 국면에서 손에 익은 방식을 포기할 이유는 없으니까.”

막판에 답안지를 고치면 꼭 틀린 답을 고르는 법이었다.

어설픈 신중함보단 지금까지의 성공으로 증명된 익숙한 방식이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 것은 꽤나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었으니 너도 가서 공사에 참여해라.”

“도대체 저게 뭘 만드는 건데요?”

“차원문.”

성진은 남태수의 눈앞에 도면을 펼쳐보였다.

“나의 군대를 불러오기 위한 차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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