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어우 죽겠다.”
“이 짓을 기여도 포인트 10,000점 쌓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이러려고 탑에 들어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하루의 노역이 끝나자 플레이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하소연을 시작했다.
“1,188회차로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01회차가 같은 층에 있네.”
탑의 30층은 각자 부여받은 역할에 맞춰 기여도를 쌓아야지만 클리어가 가능했다.
빠르게 클리어할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경우에 따라선 몇 달이고 곡괭이질이나 하게 되는 것.
게다가 그렇게 곡괭이질을 하다가도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아차 하다가 휘말려 골로 가는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재능 없는 자들의 벽.
단순노동을 부여받은 플레이어들은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쥐꼬리만 한 기여도를 차곡차곡 쌓아야 했다.
“거 새로 들어오신 분들 통성명이나 합시다.”
이미 길게는 몇 달간 이곳에 갇혀 있던 플레이어들은 서로 안면을 튼 상태였기에 낯선 얼굴이 들어오자 자연스레 화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저는 후안 게레로라고 합니다. 멕시코에서 왔고, 총잡이입니다.”
“제 이름은 에드워드 가필드고…….”
세계정부의 이름 아래 모든 국가가 하나 되었지만, 기존의 국가명은 지명이나 관습명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신참들의 소개가 이어지다 보니 결국 남태수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한국의 남태수입니다.”
꿀꺽!
‘괜찮겠지?’
남태수는 그간 탑의 커뮤니티를 지켜보며 성진에게 걸린 세계정부의 현상금이 올라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나마 매번 성진이 단독으로 날뛴 터라 남태수의 언급은 적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성진 씨랑 같이 있는 게 아니면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데.’
성진과 달리 남태수는 동레벨 플레이어들과 싸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정면에서 싸운다면 모를까 자다가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플레이어끼리 모이는 눈치라 따라오긴 했지만. 주위에서 이상하게 보더라도 혼자 다니는 편이 나았을지도.’
-자신감을 가지시죠, 마스터. 제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너랑 교대하면 싸우기야 잘 싸우겠지.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이제는 NPC를 죽여도 진짜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플레이어는 달랐다.
만일 무르무르와 교대해서 싸우다가 플레이어를 죽이기라도 하면?
살인자가 되는 건 남태수 자신이 아닌가.
그런 의미로 신입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되자 괜히 왔다 싶은 남태수였으나, 의외로 반응은 시원했다.
“어? 이분 그 현상금 걸린 분이시네?”
“아 그 극동군구? 그럼 여기도 추살대 찾아오는 거 아냐?”
“너는 커뮤니티도 안 보냐? 추살대도 털렸어.”
‘엥?’
분명 살인혐의까지 붙은 남태수였지만 이곳의 플레이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광경에 남태수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플레이어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30층은 일종의 비무장지대거든. 그래서 여기선 추살대도 안 싸워.”
“비무장지대요?”
“길게는 몇 달씩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데, 싸우기라도 하면 요정들이 처벌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잘났어도 30레벨 플레이어가 요정들을 이길 순 없으니까.”
이곳 스테이지의 요정들은 플레이어들이 비효율적인 짓, 예컨대 자기들끼리 싸우는 등의 행동을 하면 철저하게 응징했다.
세계정부는 범죄자들이 30층에 숨어들어 버틸까 봐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부쳤지만, 실제로 30층에 와본 이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부모의 원수라도 여기선 억지로 참아야 할 판인데다, 좋든 싫든 서로 얼굴 마주하며 일해야 하는 상황이니 30층에서는 바깥의 일은 모르는 척하는 게 규칙이지.”
“이 아저씨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라고 하기엔 너무 순진한데? 그냥 동명이인 아냐?”
그들은 남태수에게 인벤토리에 쟁여둔 술까지 권하며 반겼다.
“지금은 어색해도 여기 계속 있다 보면 익숙해져.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선 서로 돕고 사는 거야.”
“예, 예…….”
남태수는 어색하게 술잔을 받았다.
적정량의 술은 피로를 풀고 잠을 청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요정들도 금지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만난 김에 물어나 보자. 아저씬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계정부랑 싸우려 드는 거야? 혹시 뒷배라도 있어?”
“아, 매운 건 잘 먹나? 오늘은 이 멕시코 친구가 가져온 칠리소스로 이것저것 만들어볼 생각인데.”
그간 성진과 얽혀 졸지에 범죄자로 쫓기는 삶을 살았던 남태수는 이런 평범한 대화에 울컥했다.
“어, 어, 울긴 왜 울어. 어디 아파?”
“아뇨, 조금 울컥해서요. 요즘 들어 항상 억울하기만 했는데.”
그 말에 고참 플레이어들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성진과 달리 남태수의 경우에는 딱히 악행이랄 게 없었다.
극동군구나 추살대의 몰살도 목격자가 없거나 목격정보가 불확실한 것뿐.
남태수에게 걸린 혐의는 전부 성진과 함께 다니다 보니 생긴 것들이었다.
“설마 아재 누명 쓴 거야?”
“와 진짜로? 세계정부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 다 뒤로 처리한다고 듣긴 했는데 진짜였어? 하긴 세상 그 많은 나라들이 갑자기 합병하는 게 말이 되긴 하나.”
사도는 각국의 고위 관계자들을 성좌의 권능과 스킬로 암살, 세뇌, 매수하여 세상을 장악했다.
지구상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었으므로, 주요 인사들을 포섭한 뒤에는 평범하게 언론플레이로 세계정부 체제를 세웠다.
이러다 보니 대놓고 체제에 반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탑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는 이들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화합의 상징이라는 올림픽만 해도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데 어떻게 ‘손에 손잡고’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실현되냐는 것이었다.
“와 레전드네. 내가 도울 순 없지만 힘내요, 아재.”
말뿐이지만 그간 따뜻한 말 한마디 듣기 힘들었던 남태수에게는 정말로 큰 위로가 되었다.
“30층에서 어울렸던 사실은 불문율에 부치는 게 플레이어들 간의 암묵적인 룰이니 여기선 안심하고 지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감사였으나, 진심이 보이는 그 감사에 모두가 푸근한 분위기가 되었다.
“왠지 보고 있으니 나도 짠해지는걸.”
“그럼 술잔이나 들어.”
짠!
남태수는 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계속 받아 마시다 금방 고주망태가 되어 잠들었다.
* * *
이튿날.
“자, 자, 일어들 나세요! 작업시간입니다!”
모두가 구시렁거리며 일어나는 가운데 남태수는 숙취에도 불구하고 상쾌하기 기상했다.
‘역시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
맨날 이리 굴러라, 저리 굴러라 명령만 해대는 성진 대신 ‘함께’ 일할 사람들이 생기자 괜히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첫날에 이미 업무에 관한 설명은 들었기에 남태수는 바로 작업장으로 향했다.
“남태수 십장님은 오늘 이놈들만 다 처리하시면 됩니다.”
십장 역할을 받은 남태수는 플레이어와 NPC 10명으로 이루어진 노역자 조의 조장이 되었다.
일종의 관리직인 셈이었지만 사실 여기선 책임만 늘어날 뿐, 딱히 일반 노역자들에 비해 이점은 없었다.
“변이된 드레이크 10마리인가.”
“아 이건 가죽도 가죽이지만 육질도 질겨서 더럽게 힘든데 망했네.”
팀원들은 할당된 분량을 보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편 남태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마수의 사체를 가공하는 육가공센터나 다름없다고 했지.’
일반적인 동식물과 달리 마수는 칼로 후벼도 흠집 하나 안 나는 놈들이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마석을 채취하고, 사체를 처리하는 것도 플레이어에게나 가능한 일인 것.
물론 플레이어의 힘이라도 수십 레벨, 가끔은 100레벨이 넘어가는 마수의 시체처리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단순 노가다조차 그렇게 힘드니 30층에 도달한 일반 플레이어들이 대부분 노역장으로 떨어지는 것.
“근데 나는 사령술사잖아? 시체를 다루는 일이라면 전문가인데…… 무르무르, 내 생각이 실제로 가능할까?”
-마수의 사체를 언데드로 되살려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처리만이 목적이라면 아마 가능할 겁니다.
남태수가 고레벨 마수의 사체를 언데드로 되살려봐야 생전 레벨에 걸맞은 힘은 발휘할 수 없었다.
스킬로 되살린 언데드의 스펙은 스킬 레벨을 따라가니까.
하지만 강력한 언데드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사체를 가공하기 위한 거라면?
오히려 마수의 몸체가 약화되는 게 이득으로 작용하는 것.
“스켈레톤 생성!”
남태수가 언데드 생성 스킬을 사용하자 변이된 드레이크의 살과 가죽이 녹아내리며 드레이크의 뼈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미친, 그러고 보니 십장 아재 사령술사라고 했었지?”
언데드 드레이크는 옷가지가 흘러내리듯 한순간에 뼈와 살이 발라졌다.
이어서 뼈만 남은 드레이크는 남태수의 명령대로 스스로 뼈를 모아놓는 곳까지 걸어가 시체로 돌아갔다.
남태수는 자신을 향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개꿀인데요?”
남태수의 조가 그날의 할당량을 모두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 * *
“조장님 만세!”
“조장님 만만세!”
30층에서는 일한 만큼 기여도 점수를 받는다.
이는 그날 할당량을 다 끝내고 추가분까지 해치우면 그만큼 더 많은 기여도 점수를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효율적인 요정들은 기본 할당량 자체를 빡빡하게 잡아두었다.
덕분에 할당량을 마치고도 추가 업무를 진행하는 조는 거의 없었지만, 남태수 조는 달랐다.
“이놈은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마석만 뽑아내야 합니다. 마석의 위치는 개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의심 가는 곳을 다 째보는 수밖에 없죠.”
사체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몸 속 어딘가에 있을 마석만을 적출해야하는 작업.
“내게 맡겨.”
무르무르와의 특훈으로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된 남태수는 사체에 흐르는 마력을 감지하여 간단히 마석의 위치를 찾아냈다.
“이놈은 턱 밑이다. 째면 바로 보일 위치야.”
그리하여 조 원들이 턱 밑의 가죽을 째면, 최소한의 상처만으로 마석을 채취할 수 있었다.
“대형 마수 둘입니다! 이놈들은 고래보다 커서 한참 걸려요!”
“구울 생성!”
8층짜리 건물만 한 마수들이 구울로 되살아나 서로의 살을 발라주자 중장비가 필요 없었다.
“야, 나 이틀 만에 벌써 보름치 기여도를 벌었다?”
“뭐? 거기 빈자리 없냐? 졸업해서 자리 나면 나 그 조로 이적할래!”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 찜했거든?”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사령술사인 남태수는 놀라운 사체 처리 능력으로 조원들과 함께 엄청난 기여도를 벌어들였다.
가장 점수가 짠 단순 노역 역할로도 일주일 안에 30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
이러다 보니 남태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태수 아재, 우리도 버스 좀 태워주면 안 돼?”
“어허! 어디서 공짜로 버스를 타려고. 태수 아재, 나는 법사용 레어 아이템이 좀 있는데 말이야…….”
안내를 맡은 요정이 말하길 남태수의 적성이 노가다 십장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사실이었다.
“모두가 나를 인정해주고 있어……!”
남태수 조의 활약은 다른 노역자들뿐만 아니라 요정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나 요정족의 악독함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훌륭합니다! 적성과 재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군요! 보상으로 할당량을 40배로 늘려드리겠습니다!”
“그게 왜 보상이야 미친놈들아!”
“가진 능력을 더 잘 활용할 수 있게 기회를 드리겠다는데 불만입니까 인간?”
“불만이라면 상담실로 오십시오. 적극적으로 여러분의 불만을 해결해드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담실로 찾아간 플레이어들은 그 자리에서 ‘해결’되었다.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당연하게도 요정들의 그 행동에 오히려 플레이어들의 불만이 폭증했다.
“이게 말이 돼?”
“양심이 있어야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30레벨에 불과한 그들이 요정들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망할 놈들…….”
“치사하고 더러워서라도 내가 빨리 기여도 쌓아서 여길 뜨고 만다!”
쌓인 불만은 자연스럽게 요정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했다.
요정들은 대부분 마법을 활용하여 육체노동이 아닌, 다른 업무를 맡았다.
실제론 그것도 그들의 능력에 맞춰 꽤나 힘든 일이었겠으나,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일반 플레이어들에겐 그저 놀고먹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저놈들, 완전히 우리를 노예로 알아.”
“NPC 주제에…….”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그러지 않은 것은 그저 일반 플레이어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며칠간 지속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요정들이 모든 체류자들을 불러 모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낸들 아나,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요정 하나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지금부터 중대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대발표?”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수많은 요정들이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실수로 입을 연 플레이어는 뻘쭘하게 입을 닫았다.
“발표는 왕의 대행자께서 직접 진행하시겠습니다. 모두 예를 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등장한 요정왕의 대행자는 남태수도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성진 씨?”
무심코 내어버린 목소리에 요정들의 시선이 남태수에게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