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정신이 드십니까?”
남태수가 눈을 뜬 곳은 수녀원의 침대 위였다.
“으헉!”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흉악한 어스름 수녀의 얼굴에 남태수는 기겁을 하며 뒹굴어 침대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수녀는 그 모습을 보며 못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휴우, 혹시라도 리치에게 몸을 빼앗겼으면 처리하려 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처, 처리?”
“안타깝지만 사령술사에게 굴복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남태수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무르무르 정도 되는 리치가 어스름 수도회라는 이름만 듣고도 몸서리치는 이유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정작 그 소름을 불러일으킨 수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수녀원장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 크게 놀라며 남태수 님을 철저히 돌보라 명하셨습니다. 설마 스스로의 몸을 바쳐 리치를 봉인한 성자께서 이 땅에 계셨을 줄은.”
‘응?’
막 일어난 남태수는 이야기를 듣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기절하기 전에 무르무르랑 했던 연기가 통한 건가?’
사령술사라는 이유로 어스름 수녀에게 쫓기던 와중, 무르무르는 남태수의 몸속에서 리치인 자신과 인간인 남태수가 따로 존재한다는 식의 연기를 시도했다.
즉, 남태수가 앞에 나와 있는 이상 사령술사라는 이유로 죽일 수 없게 만든 것.
강함을 숭상하는 어스름 수녀회에는 정신적인 강함도 먹힌다는 걸 이용한 사기극이었다.
‘무르무르? 듣고 있어?’
남태수는 이에 관해서 기절한 동안 일어난 일을 묻기 위해 무르무르를 찾았으나, 리치의 영혼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제가 들고 있던 영혼석 못 보셨나요?”
“그 사악한 물건은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수녀원장님께서 직접 보관하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수녀원장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니 만나보시겠습니까?”
수녀는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혹시 몸이 성치 않아 만나기 힘들다 하시진 않겠지요?”
“예?”
“그만큼 잠들어계셨으면서 몸이 성치 않다면 역시 사악한 리치가 인간을 연기하느라 수녀원장님을 피한다고밖엔…….”
“아뇨, 아뇨! 방금 자다 깨서 준비만 하고 바로 가겠습니다!”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저 수녀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흑흑 도와줘요, 성진 씨!’
* * *
탑에 등장하는 종교들은 성좌와 같이 실존하는 존재들을 섬기는 경우가 흔했다.
때문에 신성마법이라 부르는 것들은 종교에 따라 그 효과와 방식이 모두 천차만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스름 수도회가 사용하는 신성마법은 참으로 단순명료한 것이었다.
“신성한 정화!”
키가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곰이 두 발로 일어서 양 앞발로 사신의 대낫을 내리쳤다.
늑대인간과 같은 곰인간.
웨어베어 수녀원장의 강력한 신성마법이 사신의 대낫에 작렬하자, 그간 남태수의 손을 붙잡아놓은 저주가 깨지며 그의 손이 떨어졌다.
“오, 오오!”
지금까지 저주 때문에 잘 때도 뒹굴다 날에 베이진 않을까 불편한 생활을 해오던 남태수였다.
그는 사신의 대낫에서 손이 떨어지자 감동하여 자신의 손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사신의 대낫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사령술사가 아닌 척 할 수 있게 된 것.
‘근데 정화된 건 좋긴 한데, 여긴 무슨 정화마법이 이래? 고장 난 티비 두들기는 것도 아니고.’
남태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녀원장은 곰 모습으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힘으로 형제님의 저주를 해결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힘…… 아 예, 힘이죠 힘.”
남태수가 만난 수녀원장은 의외로 흔히 생각하는 성직자들처럼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속지 않기로 했다.
‘이 인간이 수녀원장이라는 건 여기 있는 수녀들 중 가장 어스름한 인간이란 말이다.’
사람을 ‘어스름하다’고 부르는 게 다소 이상할 순 있겠으나, 어스름 수녀회의 충격적인 사상을 한마디로 설명하기엔 그보다 나은 말이 없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어스름 수녀원 팔룸 분원의 원장을 맡고 있는 즈덴다라고 합니다.”
“남태수입니다.”
곰과 악수를 한다는 게 어색한 남태수였으나, 즈덴다는 양 앞발로 남태수의 손을 붙잡고 격렬히 흔들어댔다.
“리치의 영혼을 자신의 몸에 봉인하려는 생각은 어찌 하셨답니까. 리치의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정신이라니. 육체의 강인함만을 생각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입니다.”
“아니, 뭘요.”
“아닙니다. 남태수 형제님의 용기와 희생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리치에게 고통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남태수 형제님의 행동은 성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예, 예 하면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남태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제가 리치 때문에 요새에서 사령술사라 오해를 샀습니다만. 혹시 제 누명을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정말입니까?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도 억울하게 사령술사로 몰리다니요! 어스름 수도회의 이름을 걸고 제가 남태수 님의 신원을 보증하겠습니다!”
즈덴다는 분개하며 일어섰다.
“이럴 때가 아니지요. 당장에라도 기사단 주둔지로 달려가서 성자도 알아보지 못한 우둔한 기사 놈들의 머리통을 깨부숴야겠습니다!”
남태수는 그 말에 기겁을 하며 즈덴다를 붙잡았다.
“진정하시지요. 아무리 그래도 오크 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기사단이 쓰러지면 큰일 날 겁니다.”
“사령술사로 몰리고도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을 용서하시다니. 진정 성자와 같은 분이시로군요!”
남태수는 흥분한 즈덴다에게 자신의 손이 으스러지기 전에 빨리 손을 빼냈다.
“그보다 제가 지니고 있던 영혼석을 볼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물건이거든요.”
“그 끔찍하리만치 많은 영혼들이 봉인된 마석 말입니까? 이전이었다면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봉인했을 물건입니다만, 성자와 같은 남태수 형제님의 정신력이라면 문제없겠지요. 안내하겠습니다.”
즈덴다의 오해 덕분에 남태수는 별다른 문제 없이 리치의 영혼석을 회수할 수 있었다.
무르무르는 남태수의 복귀를 열렬히 환영했다.
-마스터, 살아계셨군요?
‘왜 의문문이야?’
-마스터께는 머리를 써야 한다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마스터의 머리를 믿진 않았거든요.
무르무르는 남태수를 만나자 영혼석에 둘러두었던 마법 방벽을 풀었다.
그러자 영혼석에 흐르던 사악한 마력이 사라지며 마치 영혼석이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리치의 영혼만이 아니라 힘마저 제압하신 겁니까? 과연 대단한 정신력이십니다!”
즈덴다는 그 모습을 보며 감동했다.
“그런 강대한 정신력이라니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군요. 그런 의미에서 남태수 형제님은 혹시 웨어베어가 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럼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갖출 수 있으실 텐데요.”
흔히 늑대인간으로 대표되는 웨어비스트나, 흡혈귀 등은 후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종족이었다.
아무리 탑의 시스템이 스탯을 부여한다고 해도 인간의 한계는 명확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면 재생도 안 되고, 물속에서 숨을 쉴 수도 없으며, 하늘을 날지도 못한다.
스킬과 아이템으로 같은 일을 할 순 있겠으나, 스탯은 어디까지나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강화하는 것.
새로운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종족을 바꾸면 훨씬 많은 것들이 가능해졌다.
흡혈귀가 되면 피를 마시는 것으로 마력을 회복할 수도 있었으며, 웨어비스트는 팔다리가 날아가도 아무렇지 않게 재생하는 등의 강력한 육체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보다 전투에 특화된 종족은 얼마든지 있다.
즉, 격렬한 전투를 치러야하는 플레이어라면 종족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혹시 바꾸실 생각이라면 지금 빨리 바꾸는 게 좋습니다. 몸이 바뀌면 마력 운용법을 처음부터 다시 연습해야 하거든요.
‘웨어비스트도, 리치도 안 할 거거든?’
하지만 뭐든 그렇듯, 장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오. 저는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겠지요. 힘은 스스로 길러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형제님과 같은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몸을 키우는 것쯤 아무런 문제가 아닐 겁니다.”
흡혈귀가 되면 낮에 약해지는 것은 물론,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 계속해서 생피를 마셔야 했다.
웨어비스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탑 안에서라면 모를까, 지구로 나가면 치명적일 페널티들이 줄줄이 달려 있는 것.
‘인간임을 포기하면서까지 강해지고 싶은 건 아니거든? 난 그냥 적당히 내 개인의 영달과 사리사욕만 채울 정도면 만족한다고.’
남태수는 탑에서 한 층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성진 씨를 따라다니는데 내 무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그릇이 작군요.
‘애초에 너희들이 하는 말이 진짜라면 강해져 봐야 성좌의 노예가 될 뿐이잖아. 난 나 혼자 희희낙락 살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해.’
-그것에 대해선 동의하는 바입니다. 주제도 모르고 사도가 되겠다 날뛰는 놈들은 항상 최후가 안 좋으니까요.
‘왜? 보통 어떻게 됐는데?’
-보통은 성좌에게 토사구팽당하거나, 해당 차원의 용사들에게 목이 날아갔지요. 겨우 천사가 된다고 해도 전장에서 왕의 계약자와 같은 분들을 만나면 다짐육이 되는 거였고요.
남태수는 성진이 청동망치로 천사들을 다져놓는 모습을 상상했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청동망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은 없지만 성진의 힘이라면 천사를 천사였던 것으로 만드는 일쯤은 어렵지 않으리라.
“아무튼 리치와 함께 하신다니 본원에서 도움이 될 만한 장비라도 좀 내어드리겠습니다.”
“장비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도와주신 셈이니 성물이라도 좀 챙겨드리지요.”
즈덴다는 그렇게 말하며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우둔한 성자의 반지]
레전더리 반지 아이템
체력 +100
마력 +100
7% 확률로 적의 공격을 반사
7% 확률로 적의 마법을 반사
7% 확률로 적의 저주를 반사
공격 성공 시 7% 확률로 적의 현재 체력 7% 감소
모든 하급 축복 스킬 레벨 +1
변신 스킬 +1
상태이상 면역
“헉!”
탑에서 등장하는 반지는 원래 여러 개를 낄 수 있어 하나하나의 옵션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수준의 아이템.
“이거 설마 언데드들이 들고 나오는 무기에 사제의 축복을 걸어줄 수도 있는 건가?”
“예? 언데드 말씀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남태수는 옆에서 보고 있는 즈덴다의 모습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굉장한 보물이네요.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주는 아이템은 절대 사양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플레이어의 자세.
허나 선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것도 가져가시지요.”
[어스름의 증표]
표식 아이템
어스름 수도회의 증표로, 이 표식을 지닌 자는 어디서든 수도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훔치거나 강탈하는 등, 적법하지 못한 방식으로 획득한 증표를 내보일 경우 수도회의 추적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
“이건……?”
“어디서든 저희 수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패와 같은 물건입니다. 홀로 리치와 싸우는 형제님이시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즈덴다는 증표의 기능을 설명했지만, 남태수는 이미 이 물건을 알고 있었다.
‘이건 사실상 탑에 등장하는 어스름 수도회 스테이지 프리패스권이잖아?’
그간 탑 공략을 준비하며 어스름 수도회가 어떤 곳인지 말만 들었던 남태수였다.
‘이렇게까지 또라이 같은 놈들일 줄은 몰랐는데. 이것만 있으면 이후에 나올 어스름 스테이지를 그냥 넘길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스름 수도자가 나오는 스테이지라면 어디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어지간한 유니크 아이템보다 훨씬 귀중한 아이템이었다.
‘대박이다.’
-끔찍한 물건이군요.
무르무르는 질색했으나 남태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럼 이제 형제님의 누명을 풀러 가시죠.”
남태수가 즈덴다와 함께 수녀원을 나선 순간.
댕댕댕댕댕댕!
“군이 패했다! 군이 회전에서 전멸했다!!”
“뭐? 성진 씨는 어쩌고?”
경보와 함께 때아닌 전멸 소식이 요새 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