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왕도를 뒤덮은 이클립스가 펼쳐지기 조금 전.
무르무르에게서 몸을 돌려받은 남태수는 기사단을 피해 자리를 이탈하던 중, 성진의 메시지를 받았다.
“소환할 테니 대기하라고요?”
그 말에 멈춰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발밑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진이 발동한 순간, 남태수는 무르무르, 마티아스와 함께 수도 바깥으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성진과 NPC 무르무르였다.
“일단 무르무르에게 이 몸부터 넘기지.”
“예?”
“영혼 무르무르를 NPC 무르무르의 몸에 빙의시킬 거다.”
NPC 무르무르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왕의 계약자와 함께하다니, 출세했군 미래의 나.”
NPC 무르무르는 원본의 기억을 바탕으로 자의식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거리낌 없이 성진에게 충성했다.
사령술의 끝을 추구하는 그에게 사룡왕은 신이나 다름없었으며, 그 계약자인 성진은 신의 화신이었으니까.
“내 몸을 이용해라.”
-안 그래도 그럴 거다.
남태수는 자신이 쓰고 다니던 무르무르의 두개골을 NPC 무르무르에게 씌워주었다.
그러자 빙의가 시전 되며 NPC 무르무르의 ID가 소환수를 뜻하는 녹색으로 물들었다.
“이거이거, 진리를 보기 전의 몸이라 그런지 부족한 곳이 많군요.”
NPC로 구현된 과거의 몸을 차지한 무르무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몸을 뜯어고쳤다.
그 결과 시스템은 그를 리치에서 아크 리치로 재설정했다.
정신의 변화만으로 분류가 달라지는 그 모습에 남태수는 얼이 빠져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무르무르, 너는 지금부터 남태수와 함께 왕국을 침공해라.”
“당신의 뜻대로.”
“나는 천사를 끌어내리겠다. 교전이 벌어지면 알아서 이탈하도록.”
멍하니 듣고 있던 남태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이야기까지 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교전이요?”
“1층에서처럼 쉽게 끝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니까. 놈들이 이곳에 약한 천사만을 넣어뒀을 리는 없지 않나.”
성진의 말에 무르무르가 남태수를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천사는 성좌에게 개조당한 노예들을 총칭하는 말인 만큼, 그 안에서도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튜토리얼을 담당했던 천사처럼 꼭두각시로 개조해 잡무를 맡기는 놈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병정들이지요.”
침략전쟁에서 직접 강림하기 힘든 성좌들을 대신해 전장에 나가 싸우는 전투천사들.
이 경우에는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상당히 강했다.
“개체 간의 차이는 있지만 아무리 약한 녀석이라도 사도보다는 강할 겁니다. 애초에 사도가 위험한 것은 성좌의 힘을 빌려오는 권능스킬 때문. 그 본인의 강함은 현지인 수준을 따라가니까요.”
즉, 전투천사야말로 진짜로 천사다운 힘을 가진 존재라는 소리였다.
“일개미랑 병정개미 같은 건가. 완전 개미굴이네.”
“머릿수마저 개미 같은 놈들이지요.”
성진이라면 전투천사와 맞붙어도 질 일은 없다.
그러나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한 지금이라면 천사가 도망가려 할 경우 확실히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만일 도망친 천사가 성좌를 불러오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 마주쳤을 때 확실히 붙잡아야 한다.”
도망친 천사가 성좌들을 불러오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진이 탑을 오르는 데 가장 방해되는 위험 요소였다.
“일단 천사를 끌어낸 다음에는 확실하게 족쳐야 한다. 그러니 교전이 벌어지면 나는 너희를 봐주기 힘들 거다.”
“걱정 마십시오. 마스터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육신을 얻은 지금의 무르무르라면 남태수 하나 지키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본 드래곤을 하나 붙여 드릴 테니 타고 가시지요.”
성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언데드 군단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 * *
펄럭!
본 드래곤이 첨탑에 내려앉자 성진은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도시를 둘러보았다.
NPC와 다르게 플레이어는 은신효과를 받지 않는 이상 시야에 보이기만 하면 ID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진의 시력은 첨탑에서 도시 전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확인 가능한 건 30명 정도. 나머지는 실내에 있거나 은신 중인가.’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추살대의 대장 오스본이었다.
오스본은 내성벽 위에서 성진과 눈이 마주쳤다.
왕궁의 첨탑과 내성벽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성진이라면 무기를 투척해 정확히 노릴 수 있는 위치.
‘여기서는…… 한번 봐주도록 할까.’
천사와의 전투를 앞두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녀석에게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천사는 나에 대해 모르고 있다.’
이곳을 담당하는 천사의 입장에서 지금 사태는 무르무르라는 NPC의 폭주로만 보이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남태수라면 모를까 성진에게 추살대는 딱히 위협도 아니었고.
지금은 오스본을 잡는 이득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손해가 더 컸다.
성진은 오스본을 무시하고 왕궁 내로 들어섰다.
목표는 왕궁 중앙 왕좌의 방.
콰앙!
주먹을 내지르자 벽이 터져 나간다.
성진은 그대로 옥좌의 방을 향해 막아서는 벽을 모조리 부숴 버리며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콰앙!
“웬 놈이냐!”
성진이 도착했을 때, 왕좌의 방에는 왕과 대주교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이 둘을 죽이면 스테이지 실패다.’
클리어든 실패든 스테이지가 종료되어버리는 건 성진에게 가장 큰 위험이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심정으로 남태수에게 스테이지 클리어를 막고 있으라 했을 정도이니, 성진은 실수로라도 그들이 죽지 않게 조심했다.
“폐하! 제 뒤로 숨으십시오!”
“네놈들에게는 관심 없다. 꺼져라.”
“무도한 놈!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겠으나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대주교가 마법을 사용하자 천상의 사슬이 성진을 휘감았다.
그러나 성진은 잠깐의 멈칫함도 없이 사슬을 깨뜨리며 걸어 나갔다.
“왕좌에 봉인된 성검을 내놓아라.”
“이놈! 성검을 노린 악당이로구나! 성검은 신께서 이 나라를 보살펴 내려주신 신물! 절대로 내줄 수 없다!”
그 말에 성진은 코웃음 쳤다.
‘사도 주제에.’
20스테이지에 등장하는 왕국은 정교일치의 신성국가.
국왕은 왕이자, 종교 지도자로서 그들의 신이 내려준 성검을 수호하는 사도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신이 성좌라는 점.
‘성좌가 토착종교의 신을 사칭하며 나타나는 경우는 흔하다.’
천사를 보내 기존 종교의 신을 사칭하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성검처럼 강력한 무기를 내려주기도 하며, 풍년을 이끌어오고, 병을 치료하는 등 기원을 이뤄준다.
그렇게 교세를 키워, 해당 차원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강림시키게 만드는 것.
사실상 지구에서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짓이었다.
‘이 나라의 고위층은 천사가 되는 것을 약속받고 사도가 되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협조하고 있다.’
성진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결국 성좌가 강림하여 멸망한 뒤의 이 왕국에 실제로 가본 적이 있었으니까.
한때 무르무르 같은 이들이 열심히 저항했을 테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꺼져라.”
성진은 대주교와 국왕을 간단히 집어던지고 왕좌의 등받이 위로 튀어나온 검의 손잡이를 잡고 검을 뽑아 들었다.
파아앗!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자신을 붙잡은 성진을 불태우려 했다.
그러나 성진은 눈이 부시다는 듯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을 뿐, 아무렇지 않았다.
“스테이지 내의 성검은 탑의 힘으로 만들어진 레플리카.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지.”
원본 성검은 성좌와 직접 연결된 신기(神器)였으나, 복제본에는 그런 힘이 없었다.
대신 성좌가 아니라 천사와 연결할 정도의 기능은 남아 있었다.
성진은 마치 남태수가 사신의 대낫에 달린 스킬을 쓰듯, 성검에 달린 스킬을 발동시켰다.
“천사 소환.”
시동어를 읊자 성검의 빛이 하늘로 치솟으며 왕궁의 천장에 구멍을 뚫었다.
솟아오른 빛이 하늘에 닿자 구름이 갈라지며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신성한 기운을 품은 광채가 일식으로 어두워진 왕국에 빛을 내려주었다.
“오오, 신이시어……!”
“신께서 당신의 천사를 내려주시어 왕국을 수호하시리라!”
강렬한 빛에 인간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광채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성진은 당당히 빛을 직시했다.
성진의 눈은 광채에 가려진 적의 실체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순백의 단발과 금빛 동공.
아름다우면서도 이질적인 외견의 여성이 그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성진과 마주친 순간.
“인가…….”
퍼억!
성진의 주먹이 그 얼굴에 틀어박혔다.
[<천사 살해자(영웅)> 카르마 효과로 천사를 향한 공격이 추가적인 위력을 발휘합니다.]
쿠우우우웅!
주먹에 맞고 포탄처럼 지상으로 추락한 천사는 왕궁의 보호막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그리고 튀어나온 방향에는 이미 성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이이잉!
내지른 주먹이 허공에 떠오른 광륜에 막힌다.
전투천사의 방어결계.
‘인지하기 전에 첫 일격으로 죽였으면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지금의 힘으로는 부족했나.’
성진은 공격이 막히자 그 즉시 자리를 이탈했다.
온갖 종류의 가속주문을 덮어쓴 성진이 도심을 내달렸다.
콰과과과!!!
성진의 이동에 뒤따르듯 하늘에서 파괴광선이 내리꽂힌다.
성진은 파괴광선이 쫓아오는 것보다 빠르게 달리며 도심 속을 누볐다.
성좌가 전투천사에게 부여한 공격과 방어능력은 모두 스킬 시스템으로 이루어진다.
즉, 시야에만 들어오면 즉시 발동되는 것.
덕분에 첫 일격은 방어결계도 펼치지 못하고 허용했지만, 대응하자마자 선공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전투천사쯤 되니 확실히 센스는 개판이라도 공격력과 방어력은 갖춰져 있군.’
바보라도 강력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 시스템과, 성좌가 내려준 강력한 힘.
전투천사란 이렇듯 개개인의 기량과는 별개로 일정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양산품들이었다.
상대의 시야에 포착되기만 해도 파괴광선에 녹아내릴 상황.
이를 쓰러뜨릴 방법은 상대의 동체시력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부웅!
성진은 크게 점프하여 도심의 건물들 위로 뛰어올랐다.
“대놓고?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인간!”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 행동에 천사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파괴광선을 발사했다.
그러나.
카가가각!
성진이 들고 있던 성검이 파괴광선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투척.
10층에서 단검으로 리치를 터뜨려버렸던 것처럼 성진은 천사를 향해 성검을 집어던졌다.
복제된 성검은 파괴광선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부서졌으나, 성진은 처음부터 투척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거기냐!”
전투천사는 파괴광선의 여파에 섞여 자신에게 접근한 성진을 발견하고 황급히 파괴광선을 거두고 방어로 전환했다.
지이이잉!
또다시 방어결계가 펼쳐지며 성진을 막아섰다.
성진은 아까처럼 이탈하여 다시 기회를 노리는 대신, 그대로 길항상태를 유지했다.
“방어결계와 파괴광선을 동시에 쓸 순 없지.”
“어떻게 그걸?”
전투천사의 두 스킬은 매우 강력하지만 동시에 사용할 순 없었다.
성좌는 전투천사 하나하나의 기능을 강화하는 대신 단순하고 강력한 스킬을 부여한 뒤, 대량생산하여 물량으로 쏟아붓는 편이었으니까.
전장이라면 이렇게 한 놈이 잡고 있는 동안 다른 천사들이 적을 불태웠으리라.
그러나 탑에서는 협공을 가할 다른 천사 따윈 없었다.
잠시 당황한 듯 보였던 천사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봐야 인간의 힘으로는 성좌께서 내려주신 천사의 스킬을 뚫을 수 없다.”
자신이 방어를 계속하고 있는 이상 지구상에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만약 죽는다고 해도 탑의 윤회시스템으로 회귀하여 다른 천사들을 불러오면 될 일.
“그래. 확실히 지금의 내 힘으로는 부족하겠지.”
“흠?”
아까와 같이 방어결계에 막힌 상황.
“그러나 무식하게 힘 싸움을 해줄 생각은 없다.”
쿠오오오오오오!
“……!”
천사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당황했다.
그곳에는 첨탑에 자리한 본 드래곤이 브레스를 모으고 있었다.
“어째서 본 드래곤이 천사의 파괴광선을……!”
“외관이 아니라 내면을 봐야지.”
무르무르가 제공하여 성진이 타고 왔던 본 드래곤.
천사는 그 본 드래곤을 다시금 살폈다.
“…… 에제키엘?”
그 안에는 성진이 심지를 제압한 1층의 천사, 에제키엘의 영혼이 들어 있었다.
즉, 저 본 드래곤은 천사만큼 강하진 못해도 천사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개체였다.
“인가아아아아안!!!”
천사의 스킬은 시선이 닿은 곳에만 사용이 가능하다.
성진을 막고 있는 이상 천사가 본 드래곤이 발사할 파괴광선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리하여 파괴광선이 발사되는 순간.
지이잉!
천사는 어쩔 수 없이 방어결계를 본 드래곤에게로 돌렸고,
퍼석!
성진의 주먹이 천사의 머리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