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전투의 시작은 옷가지를 뒤집어쓰고 인간으로 위장해 있던 구울들이 뛰쳐나온 것이었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족보행을 하는 등, 인간이라기보단 짐승처럼 달려드는 구울들.
40마리가 넘는 구울이 달려드는 모습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려 굳어 버릴 광경이었으나, 오스본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전투준비! 제1진 앞으로!”
남태수가 사령술사라는 정보는 이미 알려진 바, 그들은 언데드 대비를 해둔 상태였다.
“힐링 에어리어!”
“성스러운 가호!”
“헤이스트!”
언데드에게 사제, 성기사 계열의 힐 스킬은 대미지로 들어간다.
이미 남태수의 직업을 파악하고 있던 추살대는 능숙하게 대처했다.
버프, 디버프류는 신체능력을 갑작스럽게 변화시키므로 적응이 필요하다.
때문에 파티의 구성원들끼리 합을 맞추는 과정이 없으면 없는 것만 못 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세계정부가 기량만을 보고 키운 엘리트였다.
오스본은 버프 걸린 자신의 신체능력을 정확히 계산하여 뒤로 뛰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 뛰어든 구울들에게 마법을 갈겼다.
“윈드 커터.”
스킬의 시동어를 외자 모든 계산이 시스템의 보조 아래 생략되어 즉시 마법이 발동되었다.
원소 마법과 관련된 유니크 풀 세트를 입은 그의 공격에 구울은 레이저로 자른 것처럼 토 막났다.
“제 2진!”
투두두두두!
이어서 지시를 내리자 총잡이들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광장을 둘러싼 상가 건물들은 마탄에 맞자 마치 대포알에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천둥 벼락이 사방을 휩쓸자 인근에 있던 NPC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쿠르르르릉!!
한 발에 10만 원을 넘어가는 마탄 수백 발이 30초도 안 되어 녹아내렸다.
탄약은 그들에게도 한정된 자원이었지만 오스본은 이러한 소모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탑의 층수가 낮을수록 바깥에서 가져온 아이템의 효과가 빛나는 법.’
아무리 고렙 장비라도 해당 층을 넘어가면 잡템이 되기 마련이었다.
같은 장비라도 저층에서 쓰일수록 강력한 것.
아무리 남태수가 강해도 여긴 20층.
‘20레벨 스펙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버틸 위력이다.’
“적영(敵影) 없음! 생명체 탐지 주문에도 안 잡힙니다!”
“죽었나……?”
연기와 흙먼지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
한차례 화력을 쏟아낸 추살대원들은 승리를 점쳤으나 오스본은 달랐다.
“스테이지 인원 현황이 변하지 않았다! 놈은 아직 살아 있다!”
그와 동시에 연기 속에서 오스본의 등 뒤로 사신이 나타났다.
“거기군요.”
서걱!
목소리를 내자마자 귀신같이 연기 속에서 나타난 무르무르가 사신의 대낫을 휘둘렀다.
사신의 대낫이 오스본의 목을 가르자 그의 시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생명 보호의 반지.
리 메이양이 써먹은 바 있었던 수십억짜리 아이템의 효과였다.
-무르무르! 뒤!
“알고 있습니다.”
마탄의 화력으로 밀어붙였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화살이었다.
쉬쉬쉭!
무르무르는 몸을 기울여 화살을 피했으나, 궁수의 15렙 스킬인 가이드 애로우는 유도 기능을 달고 그를 계속 쫓아왔다.
오스본을 한번 잡아낸 건 좋았지만, 덕분에 무르무르 또한 적에게 위치를 들킨 것.
-어떡해 이제!
“호들갑 떨 일은 아닙니다.”
무르무르는 연기 속에서 화살에 담긴 마력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읽어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력은 그곳에 존재한다.
반면 플레이어들은 눈으로 보고 스킬을 사용할 뿐.
“눈 멈.”
궁수들의 위치를 잡아낸 무르무르의 눈 멈 저주가 시전되자 화살들은 갈 길을 잃고 떨어졌다.
“앞이 안 보여!”
“저주다! 정화를 걸어줘!”
사제들이 빠르게 반응하여 정화를 걸었으나 무르무르의 저주는 일반적인 저주와 차원이 달랐다.
“어어? 저주가 안 풀려?”
20레벨 사제의 정화로는 끄떡도 없는 수준 높은 저주.
무르무르의 품격 높은 마법은 세계정부의 추살대를 손쉽게 농락했다.
“재미있구나, 병아리들.”
연기 속에서 움직인 무르무르는 사제의 멱살을 붙잡았다.
“어, 어떻게?”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더 복잡한 기술이었다.
15초 전의 위치로 돌아가는 사령술사의 이동기, 그림자밟기로 적의 어그로를 풀고,
자신의 언데드와 위치를 바꾸는 꼭두각시술로 사전에 사제의 위치로 보낸 구울과 위치변환을 사용한 것.
덕분에 한순간 모두가 무르무르의 위치를 놓친 것이었다.
“어억! 어어어억!”
사제의 몸에서 붙잡힌 멱살을 중심으로 서릿발이 퍼져나갔다.
칠링 터치.
거기에 라이프 드레인과 에너지 드레인까지.
사제는 순식간에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스킬을 사용할 마력도 없이 쓰러졌다.
반대로 무르무르는 지금까지 사용한 모든 마력을 재충전했다.
“마스터, 잘 봐두도록 하십시오.”
-응?
“사령술은 원래 시체를 일으켜 인형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태수의 모든 마력이 사라지며 단 하나의 언데드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나름대로 아이템을 잘 챙겨 구울을 40마리씩 생성하고도 남던 남태수의 마력을 전부 쏟아 부어 만든 단일개체.
폭연이 가시며 드러난 그 육중한 모습을 이곳에 있던 모두가 알아보았다.
“데스나이트?”
칠흑의 갑주로 전신을 감싼 검은 기사.
최소 레벨 70에 달하는 상급 언데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중요한 건 외견이 아닙니다, 마스터.”
사령술은 시체가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기술.
그제야 남태수는 눈앞의 데스나이트에게서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
데스나이트의 몸속에 들어간 영혼은 성진이 해방시켜 영혼석에 넣어주었던 요정의 영혼이었다.
“남태수 님. 명령을.”
데스나이트는 남태수의 몸을 차지한 무르무르가 아닌, 정확하게 원래 주인인 남태수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름은 마티아스. 100년 넘도록 검을 수련한 요정 검사입니다.”
탑에 갇힌 영혼 중에는 성좌와 맞서 싸운 전사들의 영혼들도 있었다.
힘은 모두 잃었어도 기억과 경험은 그대로.
스킬로 만들어낸 껍데기뿐인 언데드와 달리 진짜 영혼이 들어간 데스나이트였다.
-저놈들을 전부 쓰러뜨려 줘!
“명을 받들겠나이다.”
마티아스는 뒤돌아 일어남과 동시에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검신을 타고 일어난 검은 검기가 파도처럼 사방을 덮쳤다.
쿠와아아아아앙!!
포탄이 쏟아지는 것 같았던 추살대의 마탄세례.
그러한 마탄세례보다도 더 강력한 화력이 일개 검 한 자루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티아스는 먼지를 털어내듯 검을 가볍게 한 번 더 휘둘러 검집으로 되돌렸다.
그 풍압에 흙먼지가 모두 날아가고 처참한 광장의 풍경이 드러났다.
잠깐의 전투로 완전히 폐허가 된 광장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다 죽은 거야……?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한 작전도 있는지 사방으로 나뉘어 도망갔군요.”
-쫓아야 되는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희도 장기전은 불리한지라.”
아무리 무르무르가 조종한다고 해도 그 몸은 남태수의 몸이었다.
20레벨의 몸뚱이로는 마력이 부족하여 전투가 길어질 경우 어떻게 될지 몰랐다.
“게다가 슬슬 NPC들도 난리라 계속 싸우는 건 불리합니다.”
왕국 수도 한복판에서 전투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슬슬 멀리서 기사단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스테이지 진행을 막아야 하는 마당에 이 스테이지 전체와 싸울 수는 없지요.”
-그럼 어떡해? 저놈들 이번에 실패했으니 앞으론 더 확실하게 준비해서 나타날 텐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르무르는 마스터의 불안에 담담히 답했다.
“왕의 계약자께서 돌아오신 모양이거든요.”
* * *
오스본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곧바로 플랜B로 넘어갔다.
20층의 왕국 수도 스테이지는 1층부터 19층까지의 모든 NPC를 합친 것보다 많은 NPC가 등장했다.
수도 한복판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기사단이 출동하리라.
그렇다면 NPC들을 이용해 사령술사인 남태수를 압박하는 것도 가능했다.
“사령술사는 대부분의 스테이지에서 배척받는 직업. 상대가 강하다면 굳이 정면승부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대로 NPC의 힘을 빌린다.”
기습에 당해 아이템의 힘으로 죽음을 모면한 뒤, 오스본은 부하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무슨 20레벨이 저런 스킬들을 다 가지고 있는 거지?’
오스본의 입장에서 남태수의 강함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인 그에게 마법을 직접 배워서 쓴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까.
하물며 무르무르의 존재 따윈 미리 예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20레벨짜리가 한 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싸움에 응한 이상 놈의 패배다.”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추살대 또한 소란을 일으킨 범죄자인 셈이었지만, 사령술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령술은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적대시하는 극악무도한 범죄.
이 경우, 쫓기는 것은 남태수뿐이며 처세에 따라 추살대는 오히려 왕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도 있었다.
남태수가 추살대와 싸운 시점에서 그는 이미 소위 말하는 가불기에 걸린 것.
“자, 그럼 어디 국왕과 접촉하여 안락의자에 앉아서 놈을 쫓아보실까.”
세계정부의 공략정보에는 20층 국왕의 정치적 약점 등도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그는 자리에 앉아서 편안하게 NPC들이 남태수를 잡아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오스본이 왕궁에 입궁하려한 순간.
“흠?”
댕댕댕댕댕댕댕!!!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수도 안을 가득 채웠다.
“무슨 일이지?”
바삐 움직이는 병사 하나를 붙잡아 물어보자 병사는 완전히 겁에 질린 모습으로 답했다.
“서, 성 밖에 적이……!”
“적?”
공략 정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뜬금없는 이벤트.
오스본은 빠르게 내성벽을 타고 올라 바깥을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도시, 그리고 도시 외곽을 감싼 외성벽.
그 외성벽 너머 성 밖의 평야가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저게 무슨……?”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똑같았다.
지평선 전체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스본은 황급히 망원경을 꺼내 그곳을 바라보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십만은 충분히 넘었다.
백만?
‘어쩌면 백만 이상……!’
사방의 지평선을 완전히 메워 버리려면 백만이라는 숫자도 부족할지 몰랐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지가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그 가공할 숫자는 바로 성벽 바깥에 나타난 언데드들의 숫자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20층에서 언데드 백만대군이 왜 튀어나오고 난리냐는 말이다!”
오스본의 외침과 동시에 일식이 찾아왔다.
자연현상?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식이라면 태양이 천천히 가려져야지 저렇게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오스본은 이러한 효과를 일으키는 ‘스킬’을 알고 있었다.
“사령술사 100레벨 각성기 이클립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이클립스는 이렇게까지 강력한 스킬이 아니었다.
왕도 전체를 뒤엎을 저 거대한 언데드의 파도는 100레벨 스킬로 만들어낼 수 있는 효과를 뛰어넘었다.
부웅!
그러던 중 어둠 속에서 날아든 거대한 비행체가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오스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최상급 언데드인 본 드래곤이 왕궁의 첨탑에 휘감기듯 앉아 있었다.
크롸롸롸롸!!!
[용의 포효를 들었습니다!]
[저항력 부족!]
[당신은 스턴 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신은 침묵 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신의 모든 스탯이 전투 종료까지 80% 감소합니다!]
[당신의 마력 최대치가 전투 종료까지 50% 감소합니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오스본은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탑에 들어오기 전, 확실히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그 얼굴.
그들이 찾던 세계정부의 적은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