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7화 (17/170)

<17>

17층 이후로도 성진은 메인 퀘스트의 진행을 도왔다.

14층까진 남태수의 부족한 기량을 장비로 메꾸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

당장 파밍할 것들을 다 끝내놓으니 진행 속도는 엄청났다.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9 > Lv.20]

순식간에 도착한 20층.

남태수의 언데드 생성도 딱 떨어지는 숫자에 맞춰 한 단계 진화했다.

“이제 스켈레톤이 아니라 구울도 소환할 수 있어요. 마력은 2배로 들어서 숫자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요.”

성진은 남태수의 성장을 반겼다.

“잘됐군. 그럼 계획대로 작전을 진행한다.”

꿀꺽!

성진의 선언에 남태수는 침을 삼켰다.

“그거 진짜로 하시려고요?”

“안 할 거였으면 뭐 하러 설명했겠나.”

성진이 남태수에게 밝힌 그의 노림수는 이랬다.

“스테이지를 뒤집어 엎는다.”

20층의 배경은 왕국의 수도.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NPC가 등장하는 대규모 스테이지였다.

“이 계획을 위해서는 먼저 탑의 스테이지 시스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탑의 내부에는 매층마다 다른 스테이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스테이지는 미리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해당 스테이지에 진입할 때 정해진 정보대로 새롭게 생성된다.

때문에 앞선 회차의 플레이어들이 이미 다 깬 스테이지라고 해도 내가 안 깼으면 새로 깨야 하는 것.

“옛날 게임 중에 따로 방을 파서 하던 게임들을 기억하나? 이는 그와 같은 방식이다.”

각각의 방에서 똑같은 맵을 불러와서 플레이하더라도, 양측의 플레이어들은 서로 만날 일 없이 같은 방의 플레이어들끼리만 마주친다.

그 두 게임은 완전히 별개의 공간이니까.

요는 이랬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새롭게 방을 만들 때 스테이지 정보를 어디서 불러오냐는 것이지.”

5층의 요정 마을,

10층의 버려진 도시,

15층의 설산.

그런 맵들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성좌들이 만들어 넣은 게 아닌가요?”

“아니, 놈들이 만든 건 어디까지나 시스템뿐. 스테이지의 정보는 영혼들이 가진 기억에서 불러온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탑에 묶인 관리자들이 요정 영혼들의 기억 속에서 요정 마을을 발견한다.

이 마을이 스테이지로 쓰기 적합해 보여, 요정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맵을 구현한다.

관리자들은 거기에 스테이지의 용도에 맞게 클리어 조건이나, 맵의 경계 등을 설정할 뿐.

“즉, 탑의 스테이지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나 사건 등을 배경으로 한다.”

물론 모든 맵을 똑같이 만들면 공략대로 개나 소나 깰 수 있기에 몬스터의 배치나, 함정의 위치, 맵의 구조를 매번 조금씩 비틀긴 한다.

하지만 그건 기억 속에서 어디 뒀는지 애매한 리모컨의 위치를 마음대로 정하는 정도.

기반이 되는 영혼들의 기억과 위배되는 거대한 변경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맵이 있고 나서 스테이지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스테이지를 만들려고 맵을 처음부터 만든 게 아니라, 적당한 맵을 불러온 다음 그 위에 스테이지를 만든 것.

“때문에 스테이지는 맵 바깥으로도 이어져 있다. 영혼의 기억이 닿는 한 말이지.”

린드블룸이 그런 식이었다.

탑의 영혼 중 누군가가 그 근처에 강이 있고, 강 밑바닥에 린드블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맵이 거기까지 생성된 것.

관리자는 거기까지 스테이지로 쓸 생각이 없어 맵의 경계를 긋고 나가는 것을 막았지만, 성진은 압도적인 신체능력으로 경계를 넘어가 린드블룸을 잡을 수 있었다.

“20층의 왕국 수도 스테이지도 수도 바깥까지 만들어져 있을 거라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그 바깥에 뭐가 있을지는 어떻게 알고요?”

“어떻게 알기는.”

성진은 남태수가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니는 무르무르의 영혼석을 가리켰다.

-제가 사실 20층의 배경인 리어 왕국 태생입니다.

“어?”

-그리고 제 예상이 맞다면 스테이지의 배경이 되는 896년도에는 제가 수도 근처의 소도시에 머물고 있지요.

“어어?”

-즉, 맵 바깥으로 나가 옆 도시까지 이동하면 젊은 시절의 저를 데려올 수 있다는 거죠.

“…… 뭔 소린지는 알겠는데 그걸로 뭘 하게요? 무르무르가 무슨 좋은 아이템이라도 가지고 있대요?”

“의도적으로 탑에 오류를 일으킬 거다.”

“오류라고요?”

-20레벨들이 놀고 있는 20층에 200레벨이 넘는 리치가 뜨면 오류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200레벨???”

-제가 소싯적에 좀 날렸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조공도 받아 가면서 살았지요.

탑에서는 NPC로서 40레벨짜리 리치의 몸에 들어가 있었을 뿐, 무르무르는 사룡왕의 존재와 사령술의 진실에 다가갔을 정도로 진리에 가까운 사령술사였다.

20층에서도 젊은 시절이라 200정도일 뿐, 전성기에는 그보다 훨씬 강했다.

-물론 일단 저를 찾아서 접촉하는 것부터 문제지만요.

이 방법의 유일한 단점은 아무리 성진이라도 맵을 벗어나 제한시간 내에 옆 도시까지 다녀올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찾아오게 만든다면 문제없지.”

“어떻게요?”

“편지를 쓰든, 소문을 내든. 사령술사가 관심을 가질만한 정보를 뿌리면 그쪽에서 알아서 접촉해올 거다.”

즉, 찾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접촉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20층에서는 무르무르를 찾아올 때까지 남태수 네가 시간을 벌어줘야겠다.”

혹시라도 그들이 준비하는 동안 다른 플레이어들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해버리지 못하도록.

“저보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싸우라고요?”

“싸우지 않고도 막을 수 있다면 꼭 싸울 필요는 없다.”

“목숨 걸고 탑에 들어온 사람 중에 진행을 멈추란 소리를 들을 놈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단순히 주성진의 덤으로 머물지 않고 남태수 또한 다른 플레이어들과 대립해야 한다는 소리.

성진으로서는 남태수를 써먹으려고 데려왔지, 모셔가려고 온 게 아니었으므로 일을 시키는 건 당연했다.

“이제부터 너도 공범이다.”

* * *

“목표는 제보대로 광장에 대기 중입니다. 100레벨 이상의 변신이나 위장, 환영 검사에도 이상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 굉장한 자신감이야.”

추살대 대장 오스본은 남태수가 20층에서 스테이지 진행을 막고 있다는 제보를 받자마자 부하들을 이끌고 20층에 입성했다.

“포위 완료했습니다.”

이미 진행 중이던 방인 탓에 도중에 정원이 가득 차 모든 부하를 데려오진 못했다.

그래도 현재 이 스테이지에 들어와 있는 추살대원의 숫자는 22명.

일반 플레이어들의 제보와 신속한 대응으로 정원 40명짜리 스테이지에서 과반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공격합니까?”

“아니, 우리의 목표는 남태수만이 아니다. 일단 다른 한쪽의 행방을 알아내 보도록 하지.”

오스본은 천천히 포위가 완료된 광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그 행동에 남태수는 읽고 있던 수첩을 덮고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남태수 씨. 당신에게는 현재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조 행위로 수배가 걸려 있습니다. 순순히 자수하신다면 폭력은 쓰지 않는다고 약속하죠.”

20층에서 만난 이상 너도나도 똑같은 20레벨이다.

하지만 공략법이 존재하는 몬스터와 달리 플레이어와 플레이어의 싸움은 단순히 힘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스본과 그의 대원들은 세계정부가 ‘인간사냥’을 위해 키워낸 정예들.

세계정부가 탑 내에 개입하고 싶을 때 사용한 후, 임무를 다한 뒤에는 고레벨로 졸업하여 정부의 요직을 꿰차는 것이 예쩡된 엘리트들이다.

순수하게 기량만을 보고 뽑은 이 대인전 전문가들은 세계정부의 체제를 수호하는 핵심적인 톱니바퀴였다.

덕분에 아이템 지원 또한 상당하여 수백억 단위의 금액이 투자되기도 했다.

즉, 이들은 하나하나가 전차나 미사일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

남태수로서는 눈물 나는 상황이었다.

‘꼭 싸워야 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없습니다. 꿈 깨십시오, 마스터.

‘진짜로 자신 있는 거 맞지?’

-당연합니다. 상대는 고작 지구의 20층짜리 플레이어 아닙니까. 저와 교대해 주시면 순식간에 쓸어버리겠습니다.

‘하지만 추살대는 세계정부에서 작정하고 키워낸 인간사냥꾼들이라고. 인생은 실전이잖아.’

게임에서는 강한 쪽이 무조건 이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니었다.

‘100번을 싸워 99번 이길 수 있는 상대라도, 실전에서 한번 져버리면 그냥 죽는데? 인생은 언제나 한 방이라고.’

-죄송합니다만 마스터.

무르무르는 정중하게 남태수의 불만을 일축했다.

-저는 원래 죽어 있던 시간이 더 긴 언데드입니다.

한편 오스본은 두개골 가면을 쓴 눈앞의 사령술사를 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시설 출신의 천애고아, 훈련소 성적도 별로였을 텐데 이런 기세라니. 전부 연기였나?’

세계정부의 입장에선 주성진도 남태수도 갑자기 툭 튀어나온 미지의 적이었다.

특히 주성진이야 처음부터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물이지만, 남태수는 정식으로 세계정부의 청약에 당첨된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문제였다.

이는 상대가 세계정부의 시스템마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으니까.

‘서류상의 허접한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직접 마주해 보니 확실했다.

상대는 무수한 죽음을 경험해 본 강자다.

물론 이것은 무르무르의 마력을 오인한 것에 불과했으나, 아무리 추살대라도 이를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피해 없이 쓰러뜨리긴 힘들지도 몰라.’

“전부 오해였다고 하면 믿어줄 겁니까?”

오스본은 남태수가 입을 열자 흠칫했다.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망자가 손을 뻗어오는 듯한 쇳소리.

머리 위에 떠오른 ID는 분명 상대가 플레이어임을 알리고 있는데도, 마치 지옥의 악마를 마주한 오싹함이 들었다.

물론 이것도 남태수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목소리가 많이 가셨군요. 그러게 비명 좀 그만 지르시지.

‘장비빨로 버틸 수 있을 테니 괜찮다는 이유로 독침에 쏘이고, 용암에 데고, 몬스터한테 산 채로 삼켜지고 그랬는데 어떻게 비명을 안 질러!’

성진의 강행군을 따르는 건 스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레벨에 잠이 오냐’, ‘레벨 업 하면 낫는다’ 등의 이유로 잠도 못 자고 구른 결과 목이 갈라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오해라면 이대로 탑을 나가 정부에 진술하면 될 일입니다.”

“진술을 위해 도전을 포기하면 20레벨에서 멈춰 버린 제 인생은 어떻게 하고요?”

“그건 정부가 보상하겠지요.”

그 대답에 남태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보상은 개뿔.’

레벨을 1이라도 더 올렸을 때의 가치에 비하면 쥐꼬리만 한 보상금이었다.

게다가 남태수의 훈련소 평가 등을 생각하면 그의 기대 레벨은 매우 낮았다.

그에게 책정될 보상금은 성기사 전직을 위해 구매했던 단검 값도 안 나오리라.

‘애초에 세계정부의 실체를 생각하면 솔직하게 진술해봐야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금을 내주지도 않겠지만.’

살고 싶으면 탑을 올라 세계정부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무르무르.”

-네, 마스터.

“교대.”

-당신의 뜻대로.

고대의 리치가 남태수의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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