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성좌는 공짜로 힘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놈들의 목적은 인간의 영혼.”
“영혼을 잡아먹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움직일 뿐인,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탑은 그들이 제약 없이 차원을 넘어오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세상을 팔아넘기려는 이들이다.”
하나같이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남태수는 이를 거짓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남태수가 얻은 1레벨짜리 사령술 마스터리는 영혼의 존재가 실재함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영혼들의 노래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기억과 경험, 감정 그 자체를 담고 있었다.
그가 본 영혼들의 기억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30년에 불과한 남태수의 인생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정보가 담겨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있던 천사의 존재가 남태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맙소사.”
꿰맨 실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누더기처럼 천사의 날개를 기워 붙였을 뿐인 모습.
천사의 가죽 아래 숨어 있던 그 내면은 탑의 몬스터로도 등장하는 임프에 불과했다.
“이게 현실이다. 기만의 가죽을 벗겨내면 그 속은 이 모양이지.”
“하, 하지만 갑자기 이런 걸 보여준다고 해도 어떻게 믿어요?”
“믿을 필요는 없다. 다만 알아둘 필요가 있었을 뿐.”
성진은 굳이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판단은 네가 하는 거다. 나는 네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으니까.”
직접 보고 판단해라.
그것은 지금까지의 일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도 포함하는 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남태수는 침착하게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 하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따를 수밖에 없잖아?’
성진이 힘으로 협박하든, 아니면 남태수의 현 상황을 가지고 설득하든.
결국 남태수에겐 성진과 함께 탑을 오른다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상황이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
어차피 그에게 협력하여 탑을 올라야 한다면, 가급적 열심히 협력한다.
그리하여 최대한 높이 오르는 것이야말로 남태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며, 최선의 일이기도 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알았어요. 믿지 않아도 당신의 ‘주장’이라고 인지하고 있으면 되는 거죠?”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태수는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점을 감안하고 묻는 건데요.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면 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지 않는 거죠?”
“60억이 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일일이 설득할 생각이지?”
“아…….”
“만일 설득에 성공한다고 해도 성좌와의 싸움에 일반인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태수가 생각하기에도 그 말이 맞았다.
성좌들은 살아 있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지구는 그들이 준 힘만으로도 세상이 뒤바뀔 정도이니 싸움이 성립할 리 만무했다.
대강 이야기를 정리한 성진은 당장의 일인 스테이지 공략으로 화제를 돌렸다.
“사령술사로 전직한 이상 이들의 영혼은 네 직업 능력에도 도움이 될 거다. 리치의 영혼석에 이들을 옮겨 보낼 테니 받아둬라.”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하급 언데드야 그냥 몸만 일으켜 세워도 문제가 없었지만, 상급 언데드의 경우에는 달랐다.
같은 데스나이트라도 뛰어난 기사의 영혼이 들어간 쪽이, 리치라도 위대한 마법사의 영혼이 들어간 쪽이 강하다.
언데드의 힘은 사령술사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기량은 그 안에 들어간 영혼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
“요정 중에는 100년, 200년씩 검술을 단련한 이들도 많지. 선천적으로 수명이 긴 덕분에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술을 보유한 이들이 수두룩하니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예? 100년, 200년이요?”
“애초에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스킬로 마법을 사용할 뿐, 간단한 마법이라도 실제로 배워서 쓰는 놈은 하나도 없지 않나.”
본인이 할 줄 알면 따로 스킬을 배울 필요도 없다.
“잠깐. 그럼 직업이 사령술사라도 다른 직업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직업은 성좌들의 꼬리표일 뿐이다. 너 자신의 한계를 거기에 묶지 마라.”
“아……!”
남태수는 그제야 성진의 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플레이어로서 힘을 얻은 게 아냐. 전부 직접 배운 거다.’
탑이 내려주는 편리한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갈고닦은 힘.
지금까지 누구도 성진의 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플레이어라는 틀에 갇힌 시각으로는 플레이어가 아닌 강자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은 영혼석에 있을 리치부터 불러보지. 말도 없이 영혼들을 밀어 넣으면 그놈도 곤란할 테니.”
“잠깐. 그러고 보니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이 리치의 영혼석이라는 거 설마 저를 죽이려고 했던 그 리치가 들어 있는 거예요?”
“리치의 영혼석에 리치가 아니면 뭐가 들어 있지?”
그 말에 남태수는 후다닥 영혼석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이거 당신이 들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얘가 당신 말은 들어도 제 말은 안 들을 것 같은데요.”
“걱정 마라. 생각보다 너랑 비슷한 녀석이니.”
“그건 또 무슨 뜻?”
이곳은 성진의 내면세계.
따로 소환 마법 같은 걸 쓰지 않아도 물건에 깃든 영혼을 꺼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다 듣고 있었겠지? 알아서 기어 나와라.”
성진의 말에 리치의 영혼석에서 동굴의 종유석이 돋아나듯 뼈가 솟아났다.
양팔의 형태를 이룬 뼈가 주변을 받치고 마치 영혼석 안에서 몸을 뽑아내듯이 당기자, 리치의 영혼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크, 또 아이템으로 하찮은 플레이어 따위를 섬기며 지내야 하나 싶었더니.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산양?”
리치의 몸통은 인간과 같은 이족보행 구조의 뼈였으나, 두개골은 뿔이 달린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지에 이른 사령술사라면 어느 종족이든 리치화할 수 있다.
바포메트 리치.
10층의 보스 몬스터 몸에 들어가 있던 영혼은 바로 실제 리치의 영혼이었다.
“필멸자 주제에 천상을 거스르겠다? 재미있군.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
4미터에 달하는 리치의 영혼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무르무르. 기꺼이 너희의 계획에 동참하겠다.”
인간과 달리 기다랗게 늘어진 무르무르의 꼬리뼈가 부드럽게 두 사람을 휘감았다.
“허나 그 방식은 내가 정하도록 하지. 내가 너희를 돕는 게 아니라,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이다.”
무르무르는 그리 말하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사악한 사령술사 그 자체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그는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또 박살 나고 싶은 건가?”
성진의 말에 무르무르는 짐승의 두개골로도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무리 강력한 전사라고 해도 정신의 세계에서는 마법사를 따르지 못할 테지. 관리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이곳에서 나를 불러냈나? 좋은 아이디어지만 실수였다, 인간아.”
남태수는 저 말이 진짜냐는 듯이 성진을 바라봤다.
성진은 그냥 자신을 휘감은 꼬리뼈를 뜯어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드득!
무르무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개골의 텅 빈 눈구멍이 제 혼자 움직일 리 없었음에도 남태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뭣이?”
“종족을 막론하고 보통 처맞기 전까진 사람 말을 안 듣더군.”
이어서 성진이 무르무르의 모든 뼈를 하나하나 다 분리하기까진 30초면 충분했다.
남태수가 보기에도 무르무르의 눈구멍에서 당황이 느껴졌다.
“뭐, 뭐하는 인가…… 아니, 선생님이세요?”
100년은 우습게 살았을 리치의 영혼은 폭력 앞에 급격히 공손해졌다.
“사룡왕의 계약자로서 명한다. 리치 무르무르. 지금부터 너는 남태수와 계약하여 사령술을 가르치고 그가 탑을 오르는 것을 도와라.”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영혼에 새겨진 계약의 문장.
“……!”
성진의 영혼에 새겨진 사룡왕의 문장을 확인한 무르무르는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산산조각 나 있던 무르무르의 영혼이 빠르게 원래의 형태를 갖추며 성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엥? 성진 씨?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마스터.”
“마, 마스터?”
무르무르는 뼈다귀 위에 예복을 갖춰 입으며 남태수에게 고개를 숙여 그가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게 머리를 낮추었다.
“사룡왕 폐하는 최초의 리치로서 사령술이라는 마법을 만들어내고 온 세상에 전파하신 위대한 왕이십니다.”
“허?”
“모든 사령술사는 그분의 지혜를 빌린 대가로 언제든 그분이 명령하시면 언제든 한 번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혼의 계약이 걸려 있습니다. 따라서 저 무르무르는 현 시간부로 계약자께서 명하신 대로 남태수 님을 따를 것입니다.”
또다시 상식의 범위를 뛰어넘은 이야기에 남태수는 그냥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성진을 바라보았다.
“내게 협력하는 대가는 그 녀석의 충성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니, 이건 성진 씨한테 더 필요한 거 아니에요?”
“내게 고작 저 녀석의 힘이 더해진다고 뭐가 달라지지?”
‘그런가?’
남태수가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와중에 무르무르는 성진에게 굽실거렸다.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계약자님인 줄 알았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요…….”
“복종하겠다는 놈을 때리면 재미가 없으니까.”
“예?”
“다른 영혼들은 다 힘들어하는데 혼자 보스 몬스터 속에서 실실대는 게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무르무르의 정신은 잠시 아연해졌다가 곧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열 받아서 그랬단 거 아닌가?
‘또라이 새끼잖아?’
그는 황급히 남태수에게 들러붙었다.
“마스터가 제 마스터라 정말 다행입니다.”
“응?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남태수는 어깨를 잡은 무르무르의 뼈다귀 손을 신경 쓰다 문득 성진의 발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랑 비슷한 녀석이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거 무슨 뜻이에요?”
“어차피 할 거면서 당하기 전까지 뻗대는 게 똑같잖나.”
남태수도 사령술사 하기 싫다고 뻗대다가 결국 성진이 좀비들 사이에 던져놓고 나서야 그걸 받아들인 바가 있었다.
오싹!
‘그러니까 저거 나도 계속 버텼으면 온몸의 뼈를 분리해 놨을 거란 소리지?’
남태수는 앞으로 성진의 말을 잘 따라야겠다고 결심했다.
“나가기 전에 미리 말해두지. 이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함부로 입 밖에 내뱉지 마라.”
남태수는 애초에 이 이야기를 어디서 떠들고 다닐 생각이 없었기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든 사도든 주성진이든 그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돌아가지.”
성진의 정신세계에 있던 수많은 영혼들이 리치의 영혼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남태수는 현실에서 눈을 떴다.
-마스터의 언데드 생성 스킬이 리치를 만들 수 있게 될 때까지 저는 이곳에서 마스터를 보조하겠습니다.
무르무르의 영혼은 현실로 따라 나오지 못하고 영혼석 속에서 말을 전해왔다.
“어, 응. 근데 거기서 뭘 할 수 있는데?”
-제 지식으로 스테이지 공략을 도와드릴 수도 있고, 여차하면 제가 마스터의 몸에 빙의하여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영혼석 자체에 들어 있는 마력이 꽤 되어서,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
“바로 스테이지 공략에 들어가지. 남태수, 언데드를 소환해라. 가능한 한 많이.”
남태수가 11층에 오기 전까지 성진 혼자 진행을 좀 해두었는지 주변에는 시체가 모아져 있었다.
남태수는 그곳의 시체들을 이용해 스켈레톤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스테이지의 공략은 이놈들에게 맡기고 우린 다른 곳으로 간다.”
“예? 아니 던전을 깨야 다음 층으로 가는데 이걸 내버려 두고 어딜 가려고요?”
“능력이 있는데 굳이 일반적인 공략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4인용 던전이니 스켈레톤이라도 30구나 있으면 알아서 깰 수 있으리라.
성진은 그동안 스테이지의 배경이 되는 세상에서 다른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 말 자체는 맞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스테이지 내의 자원을 턴다.”
스테이지 내에 존재하는 물건은 탑이 아이템으로 부여한 것이 아니라면 다음 층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물건을 다음 층으로 가져갈 순 없는 대신 그 안에서 내에서 포션이나 영약 같은 걸 먹어서 흡수해 가는 건 가능하지. 우선 그 점을 노릴 거다.”
스테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자원을 씨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털어먹는다.
원래라면 그럴 여유가 없는 스테이지지만, 남태수 덕분에 던전 쪽은 신경을 꺼도 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장난 좋아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