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게 퍼펙트 클리어가 되네…….”
성진에게 붙잡혀 스테이지 내내 좀비들과 싸운 남태수는 클리어 메시지를 보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버티기 스테이지인 10층은 지금까지 퍼펙트 클리어를 해낸 기록이 전무했다.
보스인 리치는 둘째치고 맵에 존재하는 수많은 좀비들을 다 잡아서 더 이상 버텨야 할 대상이 없게 만들어야 가능한 클리어.
‘1층 퍼펙트 클리어도 최초였지만 그건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엔 같이 진행하던 모두가 봤어.’
극동군구의 플레이어들을 전부 보내버린 것에 더해, 10층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주성진과 남태수라는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박아놨으니 이젠 돌이킬 수가 없었다.
“내 인생…….”
그러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따라오는 법이라고 했던가.
이어진 시스템 창에 남태수의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보상목록]
(기여도 순위에 따라 택1)
-상점 포인트 1,000,000
-리치의 영혼석
-전직 선택권
-스킬 포인트 20
-스킬 포인트 10
…….
‘전직 선택권?’
처음 들어보는 물건이지만 이름으로 보아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그 자리에서 고를 수 있는 아이템으로 보였다.
‘저게 있으면 지금이라도 성기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아니지, 혹시 성기사가 아니라 히든 클래스도 고를 수 있는 거 아냐?’
히든 클래스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거나, 인구가 적어 해당 직업의 공략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추천되지 않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조건 없이 자유롭게 고를 수만 있다면 평범한 성기사보다 나은 직업도 얼마든지 있었다.
“성진 씨, 저기…….”
“전직 선택권을 받아 가겠다.”
남태수는 혹시 지금이라도 사령술사를 피할 수 있을까 기대했으나, 그의 꿈은 더 높은 기여도로 보상 우선권을 지닌 성진의 손에 들어갔다.
성진은 전직 선택권을 얻자마자 바로 그것을 사용했다.
“아이템 사용. 공백의 사도로 전직하겠다.”
[사도 전직은 해당 성좌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성좌의 허가를 확인.]
[클래스 부여를 실시합니다.]
[오류!]
[하위 직업으로는 전직할 수 없습니다!]
[전직이 취소됩니다.]
[아이템이 소멸합니다.]
뜻 모를 메시지와 함께 성진의 손에 들려 있던 전직 선택권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그냥 소멸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태수의 얼도 함께 소멸해 버렸다.
“꼼수를 써보려 했는데 역시 안 되는군.”
“아이템이 그냥 날아갔는데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너는 신경 쓸 거 없다. 그보다 리치의 영혼석을 고르도록. 본인이 약하면 소환수라도 강해야지.”
“아니, 여기선 상점 포인트를 고르는 게 훨씬 낫죠. 저 포인트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거래하면 훨씬 좋은 걸 구할 수도 있을 텐데.”
“다른 플레이어들이 사도랑 척진 놈의 파티원이랑 잘도 거래를 해주겠군. 어차피 넌 필요한 건 모두 직접 얻어가며 진행해야 할 거다.”
그 말에 남태수는 아,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잠깐 잠깐 잠깐, 그럼 저희는 지금부터 거래 없이 탑을 진행해야 하는 거예요? 무슨 맨땅에서 진행하던 1회차 플레이어들처럼?”
“어차피 쉽게 얻은 것들은 쉽게 사라질 뿐이다. 너 스스로 실력을 쌓아라.”
그런 의미에서 꼼수가 통하지 않은 것도 성진에게는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성좌가 준 힘으로 성좌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사령술사로 전직해볼 생각이었으나 오류를 보아하니 그것도 안 될 가능성이 높았다.
허나 성진이 사령술사로 전직하려 했던 건 해방시킨 영혼을 관리하는 데 약간의 편의성을 얻기 위함이었을 뿐.
그마저도 남태수가 사령술사로 전직한다면 딱히 직접 사령술사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11층에서 기다리지.”
성진은 그 말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남겨진 남태수는 홀로 보상 목록을 바라보며 고민하다 결국 리치의 영혼석을 선택하고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도전자의 카르마를 확인.]
[클래스 : 사령술사를 부여합니다!]
[영구적으로 다음과 같은 효과를 받습니다.]
-마력 +15
-저주 저항력 +20
-빛 속성 저항력 -20
-하급 공통 마법 스킬트리 개방
-하급 사령 계열 스킬트리 개방
-하급 저주 계열 스킬트리 개방
-사령술 마스터리 스킬 레벨 +1
-사령술사 계열 2차 전직 조건 확인 가능
기다란 영수증 같은 메시지가 나왔으나 전직 후 나오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남태수는 해당 메시지를 치워놓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부터 확인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 접속합니다.]
탑 내에 있는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대화하고, 수수료를 내면 아이템 교환도 가능한 시스템.
막 10층을 깨고 나온 직후라 아직까지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포인트로 받아서 공개수배되기 전에 빨리 거래하는 게 이득이었던 거 아닌가?’
물론 성기사 공략을 준비했던 남태수로서는 당장 사령술사가 된 자신에게 뭐가 필요할지 파악하기 힘들긴 했다.
남태수는 커뮤니티의 게시글 중, 1,201회차 플레이어들이 튜토리얼을 깨고 나오길 기다리는 글을 확인해 보았다.
[(필독!) 1,201회차 10층 깨신 분들 출석체크하고 가세요.]
본 게시글은 세계정부의 플레이어 현황 확인용으로 사용됩니다.
고의적인 댓글 확인 방해나, 심각한 욕설 및 비방의 경우 세계정부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해당 게시글에는 앞서 10층을 깨고 지나간 이들의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는데, 중간부터 성진이나 5층에 대한 언급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방금 10층에서 일어난 일은 아직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 돌겠다. 방금 내가 진행한 스테이지에서 최소 30명 이상 죽었음
└: 뭔 소리야? 거기 누가 거점에서 수류탄 까고 트롤이라도 함?
└└: 미친놈 하나가 NPC랑 군 소속 플레이어 전원을 살해해 버렸다고!
└└└: ?? 자세히 좀 말해봐.
에두아르도라는 플레이어는 자신이 10층에서 본 것들을 전부 이야기했다.
해당 댓글은 금세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충격적인 소식에 소문이 퍼졌는지 10분도 안 되어 고층의 플레이어들까지 해당 게시글에 모여들었다.
덕분에 커뮤니티는 성진과 남태수의 이야기로 난리가 났다.
: 허위사실 유포로 세계정부에 소송 걸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진짜라는 건데…… .
: 테러리스트가 탑에 들어온 거야 그렇다 쳐도 10층 퍼펙트 클리어가 말이 돼?
: 솔직히 못 믿겠다. 15층이나 20층에서 교차검증이 되면 알겠지.
└: 저게 사실이면 어차피 당장 1,202회차에 조사대가 파견될걸.
계속해서 갱신되는 댓글들을 확인하던 남태수는 한숨과 함께 창을 닫았다.
계속 보고 있어 봐야 한숨밖에 안 나왔다.
“이거 나까지 수배를 당하…… 겠지. 그래. 기여도란에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박제했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이젠 진짜 돌이킬 수 없다.
성진과 함께 탑을 올라 세계정부도 무시할 수 없는 레벨이 되어 나가는 수밖엔.
그게 불가능하다면, 진짜로 탑 안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오히려 세계정부가 날 죽이려 했다는 걸 사과할 정도로 성공하는 수밖에……!”
그는 튜토리얼에서 아껴둔 스킬 포인트를 배분하고 다음 층으로 진행했다.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0 > Lv.11]
[11층을 진행 중인 파티원이 있습니다.]
[합류하시겠습니까?]
남태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침낭에서 눈을 떴다.
“왔군.”
탑의 11층은 이제 막 얻은 직업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파티 플레이를 연습시키는 던전 스테이지.
이곳에서 플레이어는 소규모 파티에 소속되어 자신의 역할에 맞는 전투를 수행하게 된다.
‘나는 사령술사라 마법사로 취급되니 전사나 성직자, 레인저 계열 플레이어들과 파티가 될 텐데.’
혼자서 진행한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남태수는 성진과 파티가 되어 있어 그가 진행하는 방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성진의 직업에 따라 파티가 구성되리라.
‘이 양반은 뭐로 전직 된 거지?’
성진이 사령술사를 하려고 했다는 건 알지만, 바로 직전에 전직 선택권이 날아가는 모습을 본 참이었다.
남태수는 침낭에서 몸을 일으켜 일단 주위부터 확인했다.
4인 파티의 야영지여야 할 터인데, 어째선지 주변이 조용했다.
“왜 저희 둘밖에 없어요?”
“노전직이라 오류가 났는지 나한테는 파티원이 없더군.”
“노전직이라고요?”
“그래. 나는 상점이나 커뮤니티도 이용이 불가능하다.”
탑의 시스템에 오류라니?
남태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으나, 성진이 그렇게 말하니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하긴 이 인간한테 상식적인 구석이 어디 있다고.’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도 사도를 쥐어팬 인간이었다.
어차피 함께하게 된 이상, 그도 성진을 좀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진행에는 문제가 없으니 걱정할 거 없다. 그보단 나와 함께하기로 한 이상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성진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라.”
어째 불안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자길 괴롭히려고 저러는 건 아니리라.
남태수는 군말 없이 그 손을 맞잡았고, 그의 정신이 성진의 내면과 연결되었다.
성진의 정신세계가 형상화된 그곳은 별이 없는 밤이었다.
그곳에서 남태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성진이 탑에 들어와 지금까지 해방시킨 888명의 영혼.
-천사에게 죽음을!
-성좌에게 복수를!
-왕들의 대전사가 오만한 하늘을 심판하리!
-모두 불태워라!
-모두 재로 만들어라!
분노한 영혼들이 심판을 노래했다.
“당신은 도대체……?”
별들이 떠나간 황폐한 대지에서 성진이 남태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성진. 탑을 부수러 이 땅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