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창밖으로 던져진 리 메이양은 황급히 몸을 뒤틀어 허공에서 자세를 잡았다.
간판을 잡고, 벽을 딛고, 버려진 도시의 건물들을 휘감은 덩굴에 매달렸다.
덩굴은 그녀의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뜯겨져 나왔으나, 충분히 감속한 그녀는 안전하게 가로등을 딛고 버스 위에 착지했다.
직후, 인벤토리에서 권총을 뽑는다.
꺼낸 총은 탄 배합을 그때그때 바꾸기 좋은 리볼버.
리 메이양은 리볼버의 빈 탄창에 마탄을 장전했다.
유도탄, 폭발탄, 관통탄 각 2발로 총 6발.
착지부터 장전, 조준까지 단 2초.
그러나 성진은 이미 코앞에 도달해 리볼버의 공이를 붙잡고 그녀를 막아섰다.
‘근접격투?’
순간적으로 몸이 먼저 대응하려 한 그녀였으나, 이번만큼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성진의 눈이 이제는 진짜 살기를 품고 있었으니까.
‘움직이면 진짜로 죽는다.’
능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이쯤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주 선생. 제게 손을 대면 세계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겁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계정부는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그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
성진은 그 협박에 처음으로 웃음 지었다.
어차피 세계정부라는 놈들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내 앞을 막아서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 전 인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필요하다면.”
성진의 손이 리 메이양의 목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목이 부러진 리 메이양의 시체가 재로 변해 바스라졌다.
영혼이 나오지 않았으니 죽은 건 아니었다.
“생명 보호의 반지. 1회용 목숨 보전 아이템인가.”
리 메이양은 죽지 않았다.
스테이지 어딘가에 체력이 회복된 상태로 순간이동 되었으리라.
흘러내린 재는 성진의 발밑에 모여 어떠한 글자를 이루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당신이 벌인 짓입니다.’
“흠?”
성진이 그 메시지의 뜻을 고민하는 사이.
백화점 내에 남아 있던 리 메이양의 부하들에게 그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금 즉시 세계정부의 적과 자폭하라.
“존명.”
팔다리가 성치 않은 상태로도 병사들은 기어서 자폭 스킬을 지닌 분대원에게로 모여들었다.
영약으로 향상된 모든 마력이 한 사람에게로 집중된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10스테이지의 거점 중 하나인 백화점이 지도에서 지워졌다.
빛과 열, 폭음과 충격이 남태수의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거대한 폭발.
백화점에 모여있던 수많은 NPC와 플레이어들이 폭풍에 휩쓸려 찢겨나갔다.
폭풍을 버텨낸 이들은?
고열에 녹아내렸다.
그나마 건물 밖에 있던 남태수는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살아남았다.
물론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잦아들기를 기다릴 뿐.
“쿨럭! 쿨럭!”
숨을 쉬기도 힘든 열기가 가신 후, 남태수는 쿨럭이며 몸을 일으켰다.
충격으로 머리가 흔들린 탓에 자신이 서 있는 건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슨…….”
흙먼지가 휘날리는 와중에도 성진은 여전히 처음 서 있던 그곳에 멀쩡히 서 있었다.
반면 방금까지 떡하니 서 있던 백화점 건물은,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있었다.
“자폭이라. 설마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줄이야.”
“서, 설마 아까 그 군인들이 백화점을 터뜨린 건가요?”
“그래. 너와 나를 빼고 다 죽었다.”
백화점에 있던 사람은 NPC뿐 아니라 일반 플레이어도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건 폭발 따윈 별문제도 아닌 주성진과, 사신의 대낫에 달린 온갖 저항력으로 충격을 버텨낸 남태수 뿐.
“그 메시지는 이 사건을 내 소행으로 뒤집어씌울 생각이라는 뜻이었나.”
리 메이양은 성진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도, 상관없는 플레이어도 모두 죽여버렸다.
“웃기는군.”
수많은 세계를 지나며 수많은 사람들을 봤다.
사람을 구하고 다니기도, 사도 같은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다니기도 해봤다.
그러나 성좌들이 농간을 부리는 세상에선 뭘 해도 무의미했다.
결국 문제의 원인인 성좌들을 처리하지 않는 이상,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성진은 세계정부라는 놈들을 보고도 무시하고 곧장 탑에 들어왔다.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그의 목표인 성좌만을 노리기 위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막아선다면, 성진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리 메이양. 이 녀석을 우선적으로 치우고 시작한다.”
성진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선 남태수를 바라봤다.
‘나는 탑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지구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
적당한 양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만의 공략법을 준비할 정도의 지식이 있으며, 지구의 현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아는 인간.
그리고 세계정부와 연관되지 않은 일개 개인.
“남태수.”
“예? 예?”
“내게 협조해라.”
아무래도 이번엔 현지 협력자가 필요할 듯했다.
“어차피 놈들은 너를 내 파티원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혼자 열심히 해봐야 너도 저 꼴이 되겠지.”
“그, 그건 오해잖아요?”
성진은 말없이 턱짓으로 무너진 백화점을 가리켰다.
저 안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어떤 잘못도 없었으나, 그저 이번 사건에 휘말렸을 뿐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사람 목숨을 저렇게 쉽게 여기는 세계정부가 남태수의 사정을 봐가며 움직일까?
‘그럴 리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태수는 알 수 있었다.
세계정부는 개개인의 사정 따윈 관심이 없다.
아니, 정부 전체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후의 사도들은 확실하게 개개인의 사정에 관심이 없었다.
“탑을 오르는 건 도와주마. 나를 따라오려면 어차피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어야 할 테니.”
현대 사회에서 세계정부에게 밉보이고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것은 탑을 올라 세계정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레벨 플레이어가 되는 것뿐이다.
“함께 가자.”
[이 당신에게 파티를 제안합니다.]
[수락 시, 이후 스테이지를 진행할 때 우선적으로 같은 방이 매칭됩니다.]
남태수는 훗날 이 일을 두고두고 떠올렸다.
만일 뒷말이 없었더라면 자신도 기꺼이 수락하지 않았을까?
“거절은 거절하겠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성진이 남태수에게 처음으로 요구한 것은 사령술사로의 전직이었다.
“네? 제가요? 사령술사를요? 왜요?”
“네 무기도 사령술사용 무기니까. 그만큼 저항력이 붙은 무기도 흔치 않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걸 쓸 터.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사령술사보다 성기사가 훨씬 유능한데요?”
“성기사의 어디가 유능하다는 거지?”
“그야 탱킹이라든가…….”
성진은 말없이 ‘네가?’라는 표정으로 남태수를 바라보았다.
남태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 같은 남자를 두고 자신이 탱킹을 설 일은 없으리라.
“버프라든가…….”
저 괴물 같은 남자에게 추가 버프가 필요하긴 할까?
“힐……?”
폭발에도 멀쩡한데 다치긴 하나?
“헛소리 말고 사령술사나 해라.”
남태수는 울상이 되었다.
“제발 그것만큼은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귀찮은 녀석.”
성진은 굳이 남태수를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좀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그 한복판에 남태수를 집어 던졌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해라.”
“야 이 개새끼야!”
남태수는 눈물을 머금고 사신의 대낫을 휘둘러 좀비들을 썰었다.
공격력 하난 더럽게 높아서 그의 실력으로도 좀비 무리를 갈아 마실 수 있었다.
100에 가까운 좀비 무리가 10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녹아내렸다.
“흐윽, 흑…….”
그 말은 이제 성기사 전직은 글러 먹었다는 뜻이었다.
“더럽게 느리군. 역시 근접 직업보단 후열이 나아.”
“칭찬이라도 좀 해주면 안 됩니까?”
“헛소리 말고 스킬도 사용해 봐라. 전직 전이라도 아이템에 붙은 스킬은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사신의 대낫에 달린 스킬이라 하면,
언데드 생성 스킬 레벨 +3
언데드 강화 스킬 레벨 +3
모든 하급저주 스킬 레벨 +1
를 말하는 것이리라.
“언데드 생성 스킬은 레벨마다 언데드를 만들 때 들어가는 마력을 줄여주고, 강화는 그렇게 생성된 언데드가 강화되는 스킬인가…….”
원래 성기사를 하려 했던 만큼 남태수도 사령술사 스킬의 상세 정보는 처음이었다.
“이거 생성 스킬이 높으면 하급 언데드는 마력 0으로 무제한 소환이 가능한 건가요?”
“마력이 0이라도 시체가 필요하니 무제한은 불가능할 거다. 하급 언데드만으론 백날 만들어도 쓸려 나가기만 할 뿐이니 의미도 없고.”
결국 최적의 비율이나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강화와 생성을 적당히 찍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마침 시체가 많으니 생성부터 해봐라.”
“언데드 생성.”
남태수가 스킬을 사용하자 자동으로 그의 마력이 소모되며 좀비 하나가 스켈레톤으로 일어섰다.
“보통 스켈레톤은 몸도 가볍고 힘도 약하지만, 강화 스킬도 3이 붙었으니 좀비보단 훨씬 강할 거다.”
“스켈레톤은 하나 만드는 데 마력이 7 드네요. 언데드 생성 10까지 찍으면 스켈레톤은 마력 안 들겠고. 지금은 25마리 뽑을 수 있는 건가.”
사신의 대낫 자체에 붙어 있는 마력이 높아서 남태수는 벌써부터 꽤나 많은 수를 소환할 수 있었다.
10층의 난이도는 명백히 뛰어넘은 수준.
낫을 든 남태수 본인을 빼고도 그는 25인분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억울하긴 한데 성기사를 하면 이만큼은 못했겠지.’
자신같이 평범한 사람이 25인분을 해내는 날이 다시 오긴 할까?
솔직히 자신 없었다.
‘전직하면 마법계열 공통 스킬로 골렘 소환도 배울 수 있을 텐데 이건 비밀로 해두는 게 좋겠지?’
남태수가 1층에서 수호거상의 핵을 얻은 건 오로지 남태수 본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약화된 수호거상이라도 소환해서 부릴 수 있게 되면 혼자서도 상당한 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세계정부와 대립하게 된 이상, 그에게도 비장의 한 수는 있어야 했다.
“저주도 써봐라. 익숙해지지 않으면 전투 중에 혼란에 빠져 가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니.”
하급 저주 중에는 일시적으로 시력을 빼앗는 것부터 상처가 재생되지 않게 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저주는 보통 효과의 강력함보단 용도에 맞게 골라 쓰는 편이라 이렇게 스킬도 1씩 다양하게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에잇!”
남태수는 성진에게 공포 저주를 걸었으나 그는 끄떡하지 않았다.
“어라? 그럼 이건?”
눈 멈 저주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저주에 걸리지 않은 척해봐도 시전자에겐 효과가 지속 중이라는 이펙트가 보여야 할 텐데 아예 이펙트 자체가 안 떴다.
“저항력이 너무 높아서 내게는 안 걸리는 모양이군.”
“아니, 아이템 하나도 안 끼고 있는 상태인데 저항력이 높아 봐야 얼마나 높다고…….”
그러다 문득 남태수는 사신의 대낫에 적혀 있는 한 옵션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잠깐만요. 생각해보니 이 대낫은 당신이 제게 준 거죠?”
“그렇지.”
“저주템인데 당신은 어떻게 저한테 ‘줄’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저주도 내 저항력을 못 뚫었나 보지.”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은 무려 레전더리 아이템이다.
‘그런데 거기 걸린 저주도 저항력을 못 뚫었다고?’
도대체 기본 저항력이 몇이기에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게 인간이야 보스 몬스터야?’
“그거면 됐다.”
“됐다고요? 저주는 걸리지도 않았는데요?”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네 능력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으니.”
무기에 붙어 있는 저항력까지 생각하면 어디 가서 객사할 정도는 아니리라.
사령술사로서의 남태수가 제 한 몸 건사할 정도는 된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할 일을 마친다.”
남은 시간은 꽤 있었지만 할 일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할 일이라면 역시 그…….”
남태수는 할 일이라는 게 NPC를 죽이는 것이냐 물었지만 성진은 굳이 그걸 지금 설명하진 않았다.
다음 층으로 넘어가 사령술사로 전직하면, 그가 데리고 있는 영혼을 직접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그쪽이 빠르다.
때문에 그건 10층을 클리어하고 난 뒤에나 할 일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백화점을 터뜨린 세계정부의 개를 붙잡으러 간다.
“그년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어떤 짓이었는지 알려줘야지.”
탑에서 죽은 플레이어의 영혼은 탑에 귀속되어 노예가 된다.
리 메이양이 저지른 일은 그녀의 알량한 삶을 다 바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짓이었다.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