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6화 (6/170)

<6>

힘이 전부다.

5층에서의 사건으로 그 어떤 회차보다 빠르게 이 사실을 체감하게 된 1,201회차 플레이어들은 탑을 오르는 데 박차를 가했다.

그 와중에도 성진은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모든 영혼을 해방하며, 늦장을 부리진 않되 딱히 빠르지도 않은 공략 속도를 유지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8 > Lv.9]

“이제 9층인가. 다음 층이면 튜토리얼에 해당하는 구간도 끝이로군.”

탑의 10층은 처음으로 직업을 얻는 층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곳에서 획득한 직업에 따라 이후의 육성이 갈라졌다.

다만 성진이 보기에는 웃기는 일이었다.

“바보 같군.”

사람은 검술도 배우고 마법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성좌들은 직업과 스킬 포인트를 이용해 플레이어들의 성장 방향을 역할군에 따라 획일화시켰다.

이는 탑이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 아니라 병사를 육성하는 곳이기 때문이었으며,

뭣보다 그러는 편이 성좌들이 보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무수한 차원, 무수한 종족들 사이에서 자기 사도로 적합한 플레이어를 찾으려면 꼬리표를 달아놓는 편이 편했으니까.

“영혼을 흡수하고 다니려면 사령술사로 전직하는 편이 낫겠지.”

그에게 탑의 시스템이 부여하는 직업 따윈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주는 걸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진행하면서 함께하는 영혼의 숫자가 쌓이면 그걸 관리하는 것도 일이었으니까.

편의를 위해 잠깐 탑의 스킬을 쓰다 버리는 건 괜찮다.

문제는 플레이어의 직업이라는 게 그냥 자유롭게 선택하는 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전직 준비를 해야겠군.”

플레이어의 직업은 10층에서의 행동으로 결정된다.

정확히는 10층에서 쌓은 카르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만, 카르마에 대한 것은 비밀이었기에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는 대충 비슷하게 알려진 것.

“직업 아이템을 구하는 편이 쉽겠지.”

특정 직업에 관련된 장비를 사용하고 있으면 추가 카르마를 얻어 어지간해선 해당 직업을 얻게 된다.

마법사가 되고 싶으면 스태프를, 사제가 되고 싶으면 십자가를 들고 다닌다든가 하는 식.

일반적으로 플레이어들은 직업 전용 아이템을 이용해서 원하는 직업으로 전직한다.

그러나 튜토리얼 구간에서 직업 아이템을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점이 열리는 건 10층 이후였으니까.

구하려면 탑에 들어오기 전에 밖에서 미리 사오는 편이 나았다.

그게 아니라면…….

“뜯어내야겠군.”

성진은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별들이 사라진 세상.

그러나 그 세상의 하늘은 어둡지 않았다.

성진이 9층까지 오면서 구해낸 433명의 영혼이 별들을 대신해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영혼들로 빛나는 밤하늘 아래, 쇠사슬에 묶인 천사만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아기천사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아자키엘의 실체는 자그마한 임프에 불과했다.

자신의 세계를 성좌들에게 팔아넘긴 이 소악마는 그 대가로 천상의 천사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혼을 뜯어고쳐도 그 본질은 임프.

정신세계에서 아자키엘의 모습은 원래의 그 보잘것없는 소악마의 모습이었다.

“조금은 반성했나. 천사.”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인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냥 놔주지 않는다.

성진이 해방시킨 노예 영혼들은 자신들의 영혼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원수에게 쏟아부었다.

그 결과 아자키엘은 이곳에서 자신이 괴롭혔던 영혼들의 기억과 감정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

-흥, 악마 같은 인간. 얼마나 더 죄를 지어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건가요.

그렇다고 천사가 반성하는 일 따위는 없었으나, 척 보기에도 아자키엘의 영혼은 힘겨워 보였다.

<영혼 해방자(희귀)>

현재 당신을 지지하는 영혼: 433

9층까지 올라오며 계속해서 NPC들을 해방시킨 결과 현재 성진이 해방한 영혼은 433명.

433명의 영혼이 가진 30년간의 기억.

그것은 단순 계산으로도 12,990년 치에 달하는 고통의 기억이었다.

아무리 성좌의 힘으로 탄생한 종족이라 해도 최하급 천사의 영혼으로는 버티기 힘든 압박이리라.

성진은 아직도 분노를 노래하고 있는 영혼들을 대신해 천사의 앞에 섰다.

그의 손이 아자키엘의 턱을 잡았다.

성진은 아자키엘의 영혼을 들여다보았고, 아자키엘 또한 성진의 영혼을 보았다.

그리고 그 행동은 아자키엘에게 12,990년의 기억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다.

-아악, 아아아아악!! 인간? 인간이 어떻게??

“튜토리얼의 관리자. 네 기억을 내게 보여라.”

사령술?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순수한 영혼의 크기로 상대의 영혼을 짓누르고 짜내는 것.

기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단순한 위력행사.

그러나 그 위력행사의 효과는 대단했다.

“역시 있었군.”

탑에서는 상점에서 구매하거나 시스템의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이 아니면 인벤토리에 넣을 수도, 다음 층으로 들고 갈 수도 없었다.

대신 스테이지 내에서 얻은 물건은 그 안에선 쓸 수 있었다.

이는 필요한 물건을 그 스테이지 안에서 구할 수 있다면 따로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억했다.”

해당 아이템의 정보와 드롭 위치를 모두 기억한 성진은 아자키엘을 옆으로 집어 던졌다.

방금까지 분노를 노래하던 영혼들도 성진이 보여준 영혼의 편린에 놀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고요에 잠긴 내면을 뒤로하고 성진은 현실에서 눈을 떴다.

마침 9층도 끝나가고 있었다.

[최종 단계에 진입합니다.]

탑의 9층은 NPC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 함정 층.

살아 있는 적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작동할 뿐인 함정에서 살아남는 층이었다.

물론 성진은 굳이 함정을 피해 다니지 않았다.

화르륵!

불길의 그의 몸을 휘감았으나 성진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애초에 앞선 함정들은 성진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명상조차 방해하지 못하고 끝났다.

최종 단계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최종 도달 단계]

-물리 저항 max

-속성 저항 max

-저주 저항 max

[퍼펙트 클리어!]

[스킬 포인트를 추가 지급합니다.]

“분명 지구의 관리자는 10명이라고 했지.”

아자키엘의 기억 속에서 본 지구의 관리자는 총 10명.

그렇다면 앞으로 탑을 진행하며 천사를 넷 정도 더 잡아먹으면 성진도 탑의 권한을 일부 행사할 수 있으리라.

대대적인 조작은 성좌의 눈길을 끌겠지만 편의기능 몇 개를 만지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슬슬 이 탑을 어떻게 공략할지 가닥이 섰군.”

NPC를 해방시키고, 관리자를 집어삼키며 탑의 끝으로.

성진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9 > Lv.10]

[10스테이지는 전직시험입니다.]

[스테이지 클리어 후 직업, 커뮤니티, 상점 기능이 해금됩니다.]

[멀티 플레이 스테이지이므로 진행 중인 방에 참여합니다.]

[현재 스테이지 내의 플레이어: 142명.]

[제한 시간 동안 살아남으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적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클리어까지 남은 시간: 102:54:01]

성진이 도착한 곳은 지구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도시였다.

다만 식물로 뒤덮이고 폐허가 된 그 모습은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었다.

“새삼 기가 막히는 스테이지 선정이로군.”

아자키엘의 기억을 엿본 성진은 이미 10층의 스테이지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보니 새삼 기가 막히다고 밖엔 할 말이 없었다.

좀비 스테이지.

인간과 닮은 적이 나오며, 그 숫자도 많고, 재난 상황이니만큼 급박한 상황도 많이 연출된다.

플레이어의 재능과 성향을 알아보고 싶은 성좌들에겐 참으로 적절한 스테이지라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여기 나오는 좀비들은 영화 속 생물학적 좀비와 달리 마법으로 되살아난 언데드. 내버려두면 계속 늘어난다.”

즉, 이 스테이지에는 보스 몬스터로 사령술사 리치가 존재한다.

놈의 장비야말로 성진이 원하는 사령술사 장비 그 자체.

“기본적으로는 4일간 버티기만 하면 되는 스테이지지만…….”

자신이라면 제한 시간을 기다릴 것 없이 모든 적을 제거하여 클리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우선 리치부터 잡아볼까.”

제자리에서 도약한 성진은 상가 건물을 박차고 뛰기를 반복하여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스테이지의 지형이나 내용은 모두 알아도 시작 위치는 랜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강을 끼고 좌우로 나뉜 도시. 양측을 잇는 다리는 셋.’

넓은 맵이었다.

스테이지의 경계를 넘어서면 되돌아가라는 메시지가 나오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스테이지 실패.

탑의 도전이 종료되고 바깥으로 내보내지는 방식이었다.

‘시스템 오류를 생각하면 괜히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편이 낫겠군.’

겨우겨우 지구로 돌아와 놓고 스테이지를 실패해서 탑에서 쫓겨났다간 웃기지도 않으리라.

성진은 건물 옥상을 넘나들며 빠르게 이동했다.

건물 안이나 나무그늘 아래 등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좀비의 기척이 느껴져도 굳이 잡지 않았다.

이곳의 좀비들은 영혼을 불어넣어 만든 몬스터가 아니라 리치가 되살린 언데드였으니까.

1층의 수호거상처럼 골렘 같은 소환수 취급이라 일반 NPC와 달리 영혼이 들어 있지 않은 빈 깡통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110시간짜리 스테이지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시작한 지 7시간쯤 지난 상태이니 보스도 원래 위치에서 이동했겠지.’

보스의 최초 배치 지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전 맵을 뒤져볼 필요는 없었다.

버티기 맵의 보스는 잡으라고 넣은 게 아니다.

심지어 지난 30년간 공략법도 널리 알려진 상태이니 보스를 잡으려 드는 미친놈은 없을 터.

누가 자살이라도 하려고 일부러 보스에게 들이댄 게 아닌 이상, 보스는 적당히 주변을 배회하고 있으리라.

강가에 도착한 성진은 굳이 다리로 가는 대신 물 위로 몸을 날렸다.

타앗!

성진의 초인적인 각력은 평균적인 성인 남성의 몸무게를 가진 그가 물 위를 달릴 수 있게 만들었다.

강을 건너는 것은 금방이었다.

다만 맞은편 강가에는 성진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모여든 좀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대로 지나쳐 가면 이놈들이 내는 소리에 다른 좀비들까지 몰려온다.’

꼬리를 달고 다니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최대한 소리 없이 정리하기로 했다.

수면을 박찬 성진은 가장 앞에 선 좀비의 머리를 밟고 착지했다.

성진의 체중에 눌린 좀비의 목이 부러진다.

쓰러지는 좀비를 딛고 선 성진의 다리를 잡으러 주위의 좀비가 달려들었다.

성진은 놈들이 내민 팔을 붙잡아 당겼다.

양쪽에서 끌려온 좀비가 서로 부딪히며 머리가 깨진다.

많이 부패된 상태라 큰 소리는 없이 그저 질퍽대는 소리만 났다.

뒤이어 달려든 놈들을 정리하는 건 간단했다.

큰 힘을 쓰지 않고 3초 만에 좀비들을 침묵시킨 성진은 기도비닉을 유지하면서 근처의 건물 위로 올라섰다.

도시는 고요했다.

보아하니 리치라는 놈이 대놓고 눈에 띄게 돌아다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의심 가는 곳을 다 부숴볼까?’

다행히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타다다당!

고요한 도시에 울려 퍼진 총성.

이어서 총성에 반응한 좀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가 보면 되겠군.”

성진은 기척을 죽이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도 수류탄이나 여타 폭발물이 터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평범한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인 좀비라면 총화기의 위력을 버틸 수 없다.

총은 초보자가 쏴도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는 무기였으니까.

어설픈 실력으로 마법 무기를 다루는 것보다는 총화기를 쓰는 편이 낫다.

물론 나중에는 총에도 축성을 걸고 마탄을 쓰는 등 마법 무기와 다를 게 없어지지만, 저층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쉽고 편리한 무기였다.

‘그렇다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화력을 남용했거나…….’

잡으라고 나온 게 아닌 보스 몬스터를 만났거나.

성진의 몸이 더더욱 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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