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나랑 결혼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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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나랑 결혼해줄래?
2023.08.22.
“팀장님, 누가 청혼하는 거였나 봐요!”
재인이 소리치자, 등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아, 팀장님이 아니라 ‘오빠’라고 해야지?”
“아, 통화 끝나셨어요?”
무심코 뒤를 돌아본 재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혁이 무릎을 꿇은 채 반지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반지 케이스 안에는 조금 전 하늘에 그려졌던 것과 똑같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진지한 도혁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재인은 묻지 않아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재인 하나만을 위해 준비한 것임을!
재인은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결혼이 확정되자마자 재인은 도혁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 직접 케이크를 구워 소박한 프러포즈를 했었다.
그래서 도혁이 또 청혼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재인이었다.
도혁이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재인아, 나랑 결혼해줄래?”
“……!”
그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매번 들을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던 ‘재인아’ 소리가 이 순간 이 세상 그 어떤 말보다도 달콤하게 들렸다.
재인은 울컥 목이 메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느새 눈물이 그녀의 뺨 위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재인은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달래며 눈물을 훔쳤다.
그때까지도 도혁은 재인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재인은 있는 힘껏 도혁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네! 결혼할게요, 도혁 오빠!”
“사랑해, 재인아!”
“저도 사랑해요.”
도혁은 재인을 품에 안은 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활짝 웃었다.
“아! 오빠, 잠시만요.”
재인이 갑자기 도혁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왜?”
“이제 곧 관람차가 끝난단 말이에요.”
“아!”
어느새 관람차가 수평선 이하로 서서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재인의 로망이 시시하게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재인은 도혁의 코트 깃을 잡아당기며 한껏 발돋움했다.
촉촉한 두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두 사람은 넘실대는 행복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서로에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 * *
열흘 뒤,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이는 눈부신 봄날.
DS호텔 예식홀에서는 재인과 도혁의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막판 점검을 위해 회장 안팎을 바삐 오갔다.
“아니, 서 주임! 여기 들어오자마자 눈이 부셔서 혼났어!”
박 과장이 신부 대기실을 찾아와 너스레를 떨었다.
규민과 연지도 활짝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어머, 재인 씨 이렇게 보니까 너무너무 예쁘다. 하하.”
나희가 안 어울리게 살살거리며 재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달 초 지방으로 발령이 난 나희는 재인의 결혼식 때문에 내려간 지 며칠 만에 다시 올라왔다.
박 과장이 청첩장을 받자마자 전원 출석을 선포하며 오지랖을 부린 탓에 억지로 끌려온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의 주인공인 재인은 우아한 난꽃 같은 모습으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모두 와주셔서 감사해요.”
한편, 밖에서는 도혁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튀어나오게 만드는 멋진 자태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도혁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 너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본다?”
“제가 뭘요.”
고모 차주영이 옆에서 핀잔을 주는데도 도혁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다.
차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도혁을 편들었다.
“냅둬라. 홀아비로 늙어 죽겠다고 생떼를 쓰다 결혼을 하니 얼마나 좋겠냐.”
“그러게요. 재인 씨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니까요. 인환 오빠도 분명 하늘 위에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거예요.”
무심코 튀어나온 도혁의 아버지 차인환의 얘기에 차주영과 차 회장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뒤돌아 눈시울을 훔쳤다.
건너편에서는 재인의 엄마가 사위 자랑에 한창이었다.
“어머, 오셨어요? 저기 있는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 우리 사위예요.”
엄마는 30년 묵은 한을 마음껏 풀어내는 중이었다.
때마침 작은엄마가 할머니와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
“어머님, 오셨어요. 동서도 왔구나? 와줘서 고마워.”
“형님, 축하해요.”
작은엄마가 성의 없이 인사를 건넸다.
입을 꾹 다문 채 못마땅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는 것이 뭔가 트집거리를 찾는 듯했다.
할머니는 휘둥그런 눈으로 식장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내 살다 살다 이런 데를 와 보네? 재인이가 아주 복이 터졌구나!”
“어휴, 어머니. 그건 좀 더 살아봐야 알죠. 재벌이랑 결혼한 유명 연예인들 죄다 못 견디고 이혼한 거 모르세요?”
“그렇긴 하지.”
이 정도쯤이야.
작은엄마의 배배 꼬인 말에 엄마가 코웃음을 쳤다.
“동서, 우진이 한세병원 또 떨어졌다며? 우리 차 서방이 재인이 얼굴 봐서 잘 좀 봐달라고 했다던데 안타깝네.”
“아휴, 형님도 참. 그런 얘길 왜 여기서 하세요.”
우진의 얘기가 나오자 작은엄마의 기세가 팍 꺾였다.
엄마가 작은엄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동서, 앞으로는 피차 자식은 건들지 말고 페어플레이하자. 알았지?”
작은엄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도망치듯 식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자코 지켜만 보던 아빠가 한마디 했다.
“방금 내 3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어.”
“어디 감히 우리 재인이를 건드려?”
엄마가 작은엄마의 뒤통수를 향해 흥! 콧방귀를 뀌었다.
바야흐로 식 5분 전.
신부 대기실에는 유라와 성준이 남아 재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재인아, 괜찮아?”
도혁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휴우.
도혁을 보자 긴장이 풀린 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봐요. 오빠는요?”
이제는 제법 살가운 호칭이 익숙해진 재인이었다.
도혁은 대답 대신 홀린 듯 재인을 바라봤다.
“오빠, 왜 그래요?”
“나도 엄청 긴장하고 있었나 봐. 아침부터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재인이 네가 너무 예뻐서.”
재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찬가지예요. 저도 좀 전에 오빠가 들어오는데 너무 멋져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재인아…….”
“오빠…….”
막간을 틈타 콩깍지가 단단히 씐 티를 팍팍 내는 두 사람이었다.
“저기…… 도련님, 이제 들어가실 때가 됐는데요.”
보다 못한 성준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유라도 거들고 나섰다.
“자자, 신부 예쁜 거 소문 다 났으니까, 이제 멋진 신랑님도 어서 입장 준비하세요.”
“재인아, 조금 이따 봐.”
도혁은 유라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 재인도 스텝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펄럭이는 웨딩드레스 자락이 다이아몬드가 흩뿌려진 듯 눈부시게 빛났다.
재인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예식홀 문 앞.
재인은 이제 곧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옆에 선 아빠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의 손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외로웠던 그녀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준 엄마 아빠였다.
이제는 이 손을 놓고 새로운 손을 잡을 시간이었다.
재인은 눈물을 꾹 삼키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윽고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재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저 멀리 단상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도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인은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었다.
* * *
“재인이랑 도혁 씨, 비행기는 잘 탔으려나…….”
유라가 서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준이 다독이듯 유라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걱정 마. 아마 지금쯤 동해 위를 날고 있을걸?”
도혁과 재인의 결혼식은 무사히 끝이 났다.
성준과 유라는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을 공항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곧 일본에서 몇 년을 살 텐데 신혼여행이 일본이라니, 너무하지 않아요?”
“결혼 준비하느라 유학 준비를 제대로 못 했잖아. 사전답사도 할 겸 좋지, 뭐.”
“그건 그렇네요. 근데…….”
갑자기 유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성준은 신경이 쓰여 슬쩍 유라를 곁눈질했다.
“유라야, 왜 그래?”
“아니에요. 좀 걱정이 돼서…….”
“뭐가?”
“부케를 받고 6개월 안에 결혼 못 하면 3년 동안 결혼 못 한대잖아요.”
유라가 성준 보고 보란 듯이 부케를 들어 보였다.
성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거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신이야. 걱정 마.”
“제가 미신을 좀 믿는 편이라…….”
“응?”
“실은 이모가 35년 전에 부케를 받았는데, 하필이면 결혼할 남자친구랑 바로 헤어져서 6개월 안에 결혼을 못 하셨거든요. 그 뒤로 쭉 애인도 없고 환갑 넘게 혼자세요.”
유라가 성준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덧붙였다.
“저도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진짜 귀엽다.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에 성준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기만 해요? 전 심각한데…….”
“유라야, 집에 가기 전에 어디 좀 잠깐 들러도 돼?”
“어딜요?”
성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 만나러.”
“오빠……!”
유라의 눈에서 하트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아마 우리 어머니랑 말이 잘 통할 거야.”
“왜요?”
“우리 어머니도 미신을 좀 믿는 편이시거든. 어렸을 때 문지방 밟으면 복 달아난다고 엄청 혼났어.”
“어머, 그러시구나! 저랑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성준이 신이 난 유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유라야, 유라 어머님 남자 형제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아주 먼 사촌 이모예요. 오빠는 마주칠 일 없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근데 어머님은 뭐 좋아하세요?”
유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평생 심심할 일은 없겠어.
성준은 제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유라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를 보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긴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우리 어머니는…….”
* * *
그날 저녁, 하네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도혁은 곧장 재인을 도쿄 중심부에 있는 한 맨션으로 데려갔다.
“호텔에 묵는 게 아니었어요?”
재인은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다.
숙소부터 코스까지 모든 것을 알아서 준비해뒀다는 도혁의 말을 믿고 따라왔는데 웬 가정집?
꼭대기 층인 맨션에서는 확 뚫린 통창으로 도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내부는 고급스러운 가구와 가전제품이 구비되어 있었다.
주방에는 최신식 제빵 기구들이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딱 봐도 수억 엔을 호가하는 최고급 맨션이었다.
“여기가 앞으로 재인이가 지낼 곳이야.”
도혁이 소파에 편안하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벌써 집 구해놓은 거 아시잖아요?”
“그 집은 내가 불편해서 싫어.”
“그래도 혼자 살 건데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아요.”
“괜찮아.”
“아니에요. 제가 적당한 곳으로 다시 알아볼게요.”
재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 재인이 감동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도혁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재인아, 내가 주는 결혼 선물이니까 그냥 받아줘.”
“그래도 이건 너무 부담스러워요. 왠지 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흠. 도혁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재인에게 물었다.
“재인아, 이 집은 누구 거지?”
“도혁 오빠 거요.”
“그렇지. 그럼 난 누구 거야?”
꺅! 꺄악!
잘도 그런 닭살 돋는 말을!
이거야말로 어디서 많이 보고 듣던 건데?
재인은 순식간에 온몸에 닭살이 돋아 버렸다.
그래도 정답은 오직 하나뿐.
“……재인이 거요.”
“그렇지. 그러니까 이 집도 재인이 게 맞잖아. 안 그래?”
과연.
묘하게 설득력 있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재인이 어찌해야 하나 고심하던 그때였다.
도혁이 예고도 없이 재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왜, 왜 이러세요?”
“하여튼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니까. 일단 같이 샤워부터 하자.”
재인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재인을 집어삼킬 듯 쳐다봤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욕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만요!”
“왜?”
재인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도혁을 빤히 쳐다봤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마음의 준비 좀 하면 안 될까요?”
“이제 우리 부부라고! 언제까지 내외할 거야?”
“그치만…….”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끌어올렸다.
그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인이는 누구 거지?”
그 순간, 재인은 제 안에서 무언가 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맥박이 치솟고 얼굴은 불덩이처럼 새빨개졌다.
그러나저러나, 정답은 오직 하나뿐.
“……도혁 오빠 거요.”
“그래야지.”
도혁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에라, 모르겠다.
재인은 뜨겁게 달아오른 도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안은 도혁의 팔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자, 그럼 이만 들어가 볼까?”
그렇게 두 사람은 유유히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은 뒤였다.
팀장님, 약속이 다르잖아요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