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꼭 해보고 싶었는데…… (128/129)


127화. 꼭 해보고 싶었는데……
2023.08.19.



 
재인은 온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도혁이 ‘재인아’라고 이름으로만 부른 건 처음이었다.

민망해하는 재인과 달리 도혁은 아주 신이 난 듯했다.


“진작부터 ‘재인아’라고 불러보고 싶었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데?”

“저기……, 저는 그냥 원래대로 ‘서재인 씨’로 부르셔도 괜찮아요.”

제발 부탁입니다.

재인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자 도혁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곤란해, 재인아. 우리 결혼할 건데 빨리 익숙해져야지.”

“전 정말 괜찮은데…….”

몸 둘 바를 몰라하는 재인의 모습에 도혁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재인아, 그렇게 어색해?”

“그럼 팀장님은 안 어색하세요?

“팀장님?”

도혁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 아니라 ‘오빠’라고 해야지, 재인아.”

꺄아아아악!

연타를 맞은 재인은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간신히 ‘오빠’를 뛰어넘자마자 또 다른 장벽에 부딪치고만 재인이었다.

* * *



“할아버님, 저기 좀 보세요! 코끼리예요!”

재인은 차대산 회장의 팔을 잡아끌며 코끼리 우리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코끼리 두 마리가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고 있었다.

와! 와!

갑자기 환호성이 들리더니 어린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재인과 차 회장을 지나쳐 코끼리 우리에 매달렸다.

코끼리를 본 아이들이 너나없이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재인이 누나, 코끼리 진짜 커!”

“우와! 코끼리 똥도 엄청 크다!”

지금 재인과 도혁은 약속대로 별사랑보육원 식구들과 함께 네버랜드에 와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라는 명목하에 차 회장도 함께.

2월 말, 때 이른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어느 날이었다.

재인은 코끼리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지난번에 차 회장이 코끼리가 보고 싶다고 해서 시내 동물원까지 갔다가, 허탕 치고 돌아온 내내 마음에 걸렸던 재인이었다.

차 회장이 왜 가자고 했는지 알기에 더더욱.


「실은 도혁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나, 나한테 코끼리 보러 가자고 졸랐는데 일이 바빠서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루다 결국 못 갔거든. 나중에 들으니 제 엄마 아빠도 바쁘다는 핑계로 비서한테 시켜서 보냈다더군.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더니 그 뒤로는 코끼리 얘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어. 그땐 일에 정신이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리더라고.」

도혁에 대한 차 회장의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져 재인은 괜스레 목이 메었다.


“할아버님, 지난번엔 날이 추워서 코끼리가 안 나왔다고 엄청 아쉬워하셨잖아요. 오늘 따뜻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코끼리 우리에 매달려 있던 아이들이 차 회장을 흘낏흘낏 쳐다봤다.

차 회장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재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흠흠. 좀 작게 얘기할 순 없었나?”

“네? 아, 죄송해요. 제 목소리가 좀 컸죠.”

“좀이 아니라 많이 컸어. 그리고, 코끼리는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혁이 때문이라니까.”

“알죠. 팀장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재인이 생긋 웃으며 홀로 멀찌감치 떨어져 코끼리를 보고 있는 도혁을 가리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도혁은 코끼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도혁을 바라보는 차 회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 누군가 차 회장의 코트 깃을 잡아당겼다.


“할아버지도 코끼리 좋아하세요?”

“응?”

차 회장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방긋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코끼리 무지무지 좋아해요. 맨날 텔레비전에서만 봤는데 진짜 멋져요!”

“…….”

순간, 차 회장은 아이의 얼굴 위로 어린 시절 도혁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차 회장은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다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할아버지도 코끼리 무지무지 좋아해.”

“나랑 똑같네요?”

“그러니까, 다음에 또 코끼리가 보고 싶거든 여기 있는 예쁜 누나한테 얘기해. 할아버지랑 친구들이랑 다 같이 또 오자꾸나.”

“정말요?”

“그럼. 자, 약속!”

차 회장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아이가 활짝 웃으며 조막만 한 손가락을 걸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재인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뭐하고 계세요?”

언제 왔는지 도혁이 불쑥 차 회장에게 물었다.

차 회장이 움찔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아, 할아버님이…….”

“흠흠. 아, 아무것도 아니다.”

차 회장은 재인에게 아무 말 말라는 듯 눈짓을 하고는 황급히 아이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할아버님과 저만의 비밀이에요.”

“재인아, 벌써부터 나 빼고 비밀을 만들기야? 너무하네.”

도혁이 볼멘소리를 하자 재인이 슬그머니 그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앞으로 우리 둘 사이에는 더 많은 비밀이 있을 텐데요, 뭘.”

도혁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군.

* * *

어느덧 시간은 흘러 흘러,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재인과 아이들은 바닥에 줄지어 앉아 퍼레이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버랜드에 도착한 지 어언 10시간째.

차 회장은 점심 식사를 함께한 뒤에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김 원장과 지도 교사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느라 녹초가 된 상태였다.

반면, 아이들은 너무나도 쌩쌩한 모습으로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재인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현아에게 담요를 감싸주며 물었다.


“현아야, 괜찮니? 힘들진 않아?”

“괜찮아. 언니, 네버랜드 데려와 줘서 고마워.”

“나도 너희랑 같이 와서 너무 행복해.”

현아가 생긋 웃으며 도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래. 오늘 재밌었니?”

도혁의 물음에 현아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정말 최고의 날이었어요. 우리 오빠도 진짜 재밌었대요.”

“확실히 그런 것 같네.”

도혁은 목을 길게 빼고 퍼레이드를 기다리고 있는 현우의 뒤통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 어디 갔지?”

갑자기 현아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현아야?”

“언니, 내 가방이 없어졌어.”

“가방?”

“응. 내가 아끼는 건데…….”

현아가 늘 메고 다니는 하늘색 크로스백이었다.


“어디서 잃어버렸나 보다.”

“아! 좀 전에 대관람차 탔을 때 벗어놨는데 내릴 때 깜박했나 봐. 언니, 어떡하지?”

재인이 울상이 된 현아를 다독였다.


“걱정 마, 직원이 잘 맡아두고 있을 거야. 언니가 지금 다녀올게.”

“정말? 여기서 대관람차까지 먼데…….”

“괜찮아. 퍼레이드 곧 시작이니까 넌 재밌게 보고 있어.”

“……고마워, 언니.”

재인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도혁이 따라나섰다.


“나도 같이 가지.”

“아니에요.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같이 가고 싶어. 꼭!”

도혁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아, 혼자 있기 어색해서 그렇구나. 은근히 낯을 가리신다니까.’

재인은 피식 웃으며 도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인과 도혁은 손을 꼭 잡고 걸은 지 한참 만에 대관람차 앞에 도착했다.

다채로운 색깔로 불을 밝힌 대관람차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다들 퍼레이드를 보러 간 탓인지 탑승객이 거의 없었다.

재인은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분실물 들어온 것 중에 조그만 하늘색 크로스백이 있었나요?”

“그런 건 없었는데요.”

“아, 그래요? 여기서 잃어버렸다고 하던데…….”

“관람차 바닥에 떨어졌을지도 모르죠. 직접 확인해보세요.”

하는 수 없이 재인과 도혁은 관람차가 지상에 도착할 때마다 하나하나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기를 10여 분, 드디어 관람차 바닥 구석에 끼어 있는 하늘색 크로스백을 발견했다.


“아, 저기 있어요! 잠시만요.”

재인은 가방을 가지러 대관람차 안으로 들어갔다.

재인이 가방을 집어 들고 내리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뒤따라 탄 도혁이 자리에 앉더니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재인은 도혁의 옆에 털썩 앉게 되었다.

그리고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대관람차의 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잠깐 둘만의 시간을 좀 가지려고.”

“현아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나도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이 시간이 오기만을.”

도혁이 씩 웃으며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재인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잠깐만.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인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녀가 대관람차를 타면 아주 높은 확률로 키스를 했었다.

예측 가능한 뻔한 장면인데도 볼 때마다 설렜던 재인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관람차 안의 은은한 조명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솔일 때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뜬 재인이었다.

따사로운 조명 아래 도혁의 준수한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그늘을 드리웠다.

두근.

재인은 말릴 새도 없이 가슴이 너울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따라오신 거예요?”

“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말투였다.

차도혁을 누가 말려.


‘그나저나 모솔 서재인, 그래도 결혼 전에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가는구나!’

재인은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 새초롬하게 입술을 모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도혁의 얼굴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재인이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은 그때였다.

Rrrrrrr. Rrrrrrr.

난데없는 휴대전화 벨 소리가 재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여보세요.”

도혁이 전화를 받았다.

재인은 기가 막혀 눈을 번쩍 떴다.


‘이 분위기에서 전화를 받는다고? 저기요, 우리 좀 전에 키스하려던 중이었는데요? 그것도 일단 탔으면 키스로 넘어가는 게 예의인 로맨틱한 대관람차 안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도혁은 등을 돌린 채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었다.


“김 실장님, 무슨 일이세요?”

성준의 전화라면 중요한 일일 터.

재인은 어이가 없지만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설마……. 곧 끊겠지?’

하지만 도혁은 재인의 기대를 가차 없이 꺾어버렸다.


“그럼요, 지금 통화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도혁은 어느새 철저한 비즈니스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워커홀릭 차도혁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차도혁 씨, 지금 나랑 장난해요? 분위기 다 잡아놓고 이게 뭐예요! 사람 눈까지 감게 해놓고 민망하게 만들기예요?’

재인이 원망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데도 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준과의 통화에만 열중했다.

그사이 대관람차는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재인은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민망함을 달랬다.

이거, 대관람차 안이라 뛰어내릴 수도 없고.


“김 실장님, 감사합니다. 이래서 김 실장님이 안 계시면 정말 곤란하다니까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혁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재인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차도혁 씨, 정말 너무하시네. 두 분, 훈훈한 브로맨스 영원하시길!’

심통이 난 재인이 창밖을 내다보며 입술을 삐죽이던 그때였다.

갑자기 관람차 안에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재인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멀리 공중 위로 수백 개의 불빛이 형형색색 빛을 발했다.

드론이었다.


“어! 저것 좀 보세요!”

재인이 깜짝 놀라 도혁을 불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혁은 아직도 통화 중이었다.

할 수 없지.

재인은 혼자서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그사이 불빛들이 하늘에 멋진 그림을 그려 놓고 있었다.

갖가지 꽃들이 하나둘 떠오르더니 앗, 하는 사이에 화려한 꽃다발로 바뀌었다.


“어머, 멋지다!”

재인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 그때, 불빛이 탁 꺼지더니 다이아몬드 반지 모양이 두둥실 떠올랐다.

우와!

재인은 사진을 찍을 생각도 못한 채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다음 순간, 황홀한 자태를 뽐내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이어 휘황찬란한 황금빛 메시지가 캄캄한 밤하늘을 수놓았다.

[나랑 결혼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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